<산천재의 소>
- 하만석 변호사 글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6년째 되던 해 왜는 다시 조선에 대규모 군사를 침입시킨다. 정유재란이다. 당시 일본 군벌 내에서 고니시(소서행장)와 가또(가등청정)는 라이벌 관계에 있었고, 고니시 측에서 가또의 군대가 며칟날 부산으로 들어 올 것이라고 조선에 귀뜸해 준다. 이 정보를 입수한 선조는 이순신에게 부산으로 진출해 침입하는 왜선을 쳐부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정보가 적의 간계일 수 있고 부산은 군선를 숨길 장소가 마땅찮고 잠복해 있을지 모를 적의 역습에 대비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입수한 정보로 적을 무찔렀다는 소식을 기대했던 선조는 분개하였고, 즉각 이순신를 체포해 서울로 압송하여 옥에 가두었다. 군령을 거부한 군인은 사형에 처하는 것이 군법이다. 이순신은 처형 직전에 와 있었다. 이 때 선조를 설득하여 이순신의 생명을 구한 분이 약포 정탁이다.
예천 사람인 약포는 퇴계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과거를 통해 벼슬길로 나갔다. 그가 진주 향교의 교수로 부임했을 때 산청 덕산의 산천재로 남명 선생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다. 약포는 말이 좀 빠른 것을 제외하면, 학문에 막힘이 없었고 기개도 출중하여 관리로서의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남명은 약포의 학식을 높이 평가하고 자신은 더 보태 줄 것이 없다고 했다. 약포가 진주에서의 소임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인사차 들렀을 때 남명은 그에게 뒤안에 가면 소가 있으니 끌고 가라고 했다. 약포가 뒤안에 가 보았지만 소는 없었다.
대부분의 학문을 퇴계 문하에서 익힌 약포가 자신의 스승은 퇴계와 남명이라며 남명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을 자랑으로 말하고 이 소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것을 보면 이것은 약포에게 큰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남명과 퇴계는 교수법에 큰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양대 문하를 드나들며 학문을 익힌 한강 정구에 의하면, 퇴계는 책 내용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학생의 머리에 쏙쏙 집어넣어 주는 방면, 남명은 학생 스스로 책을 읽게 하고 후에 그 내용에 대한 서로 의견을 나누는 방법을 선호하였다고 한다. 퇴계는 경전 등 학습자료 내용의 습득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남명은 스스로 생각하고 깨치고 실천하는 능력을 함양시키는데 주력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남명의 방법론은 확실히 전통 유학의 방법론과 차이가 있었던 것같다. 남명이 약포에게 했다는 소 이야기는 불교의 간화선를 닮아 있다. 남명은 약포에게 '뒤안의 소를 끌고 가라'는 화두를 던진 것이다. 영민한 제자는 이 화두를 평생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대체로 남명 선생 말씀 취지가, 머리가 좋고 학문이 출중하지만 말이 빠르고 성격이 급한 약포에게 소처럼 우직함도 갖추어야 한다고 충고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스티브잡스의 표현을 빌리면 "Stay foolish". 이 견해에 나도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약포는 이 화두에서 더 많은 의미를 찾으려고 고심했지 않았을까. 성격이 대쪽같고 기개가 지리산같았던 남명 선생이 허투로 아무 말이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고래에 꽂혀 다양한 고래에 대해 탐구하듯이 약포도 소에 관하여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소는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에게는 관념속에서 우직한 성품의 비유겠지만, 농사짓는 백성들에게는 현실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농기구다. 전세가 유리하지 않은 전쟁 중에 거의 유일한 전략자산이었던 이순신의 처형을 눈 앞에 두고 그를 어떻게 구해 낼 것인지를 고심하던 약포에게 영감을 준 것은 농사짓는 소 아니었을까? 농사철에 소를 죽이면 농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약포는 이순신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상소를 써 내려갔다. 그는 임금이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옳았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지금은 전란중이니 명장를 죽여서는 안 된다. 앞날을 대비해야 한다"고 썼다. 그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이야기했다.
선조는 물러설 명분을 얻었다. 조선은 전쟁중이다. 이순신을 석방하고 백의종군을 명했다. 석방된 장군은 권율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합천 초계로 가기 위해 충청도 전라도를 거치고 광양 하동을 지나 산청 남사의 내 고향집 앞을 지나 갔다. 그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순신이 파직된 뒤 3도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은, 부산으로 진출해 왜군을 진멸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고 이순신이 구축해 놓은 조선 수군 선단을 이끌고 출전하였다가 칠천량에서 궤멸되었다.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은 파괴된 수군 진영을 돌아 본 후 다시 군사를 규합하여 훈련을 시작했다. 그곳이 진주 수곡 원계리이다. 내 고향마을에서 6키로 떨어진 곳이다. 장군은 그곳에서 3도수군통제사로 복위한다는 교서를 받는다. 선조는 교서에서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며 나라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복위된 장군은 명량해전, 노량해전에서 승리해 7년간의 전쟁을 마무리했다.
산천재에는 3개의 벽화가 남아 있다. 여느 절집 법당 뒷벽의 심우도를 연상시키는 소 그림이 2개다. 유학자의 서재로서는 특이한 점이다. 하나는 요순시대 임금으로부터 벼슬을 제의받은 선비가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었다며 냇가에서 귀를 씻고 그 내에서 소에게 물을 먹이려던 친구는 그 물이 더럽다며 그냥 돌아갔다는 고사를 표현하고 있고(허유소부도), 다른 하나는 그냥 농부가 소를 부려 논을 가는 그림이다(우경도).
이 서재는 병화로 없어진 것을 1700년대에 복원한 것이므로 남명선생 생시의 벽화는 아니다. 복원된 시설에 벽화가 있다는 것은 복원 전의 건물에도 같은 벽화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산천재 벽화속의 소는 약포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약포가 남명 선생이 말한 소를 생각할 때는 제일 먼저 이 소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약포에게 이순신을 구할 논리를 만드는데 어쩌면 논을 갈고 있는 이 소가 영감을 주었을지 모른다.
"소를 좋아한 남명은 약포에게 소를 끌고 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약포는 그 소를 키워 이순신을 구하는 조선 최고의 변론서 '신구차'로 쓰고 목숨을 구한 이순신은 비를 맞으며 내 고향마을을 지나가고 또 두달 후 옆 동네에서 복위되여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나는 즐겁고 흥분된다. 산천재 남명의 소는 400살이다. 그런데 최근 이동기의 팝아트처럼 젊어졌다. (2023. 2. 13.하만석 변호사 글 _남사학교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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