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락정(四樂亭)

면우선생문집(俛宇先生文集) 구성과 내용

도원 정운종 2021. 8. 13. 16:42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편찬및간행

저자는 구한말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독립 운동가이다. 寒洲 李震相의 문인으로서 心卽理說을 계승하여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1919년에는 「巴里長書事件」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저자는 생전에 著述의 일부를 정리해 두었다. 저자의 조카 郭奫이 1920년 金思鎭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중년 이전의 글은 저자가 손수 刪定하여 정리를 마쳤는데, 詩稿가 8책, 疏箚가 3책, 書札이 33책, 記ㆍ狀ㆍ碣ㆍ雜著가 15책으로서 모두 59책이었다고 한다. 1919년 8월 저자가 졸하자 門人들은 개별적으로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던 자자의 유문을 수습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이듬해 2월에는 郭奫의 주도하에 본격적인 유문의 정리가 시작되었다. 기존의 手稿本 59책과 문인들이 脫稿 중에 있던 유문 등을 합하면 100여 책에 달하는 巨帙이었고, 여기에 더하여 앞으로 수집될 분량이 수십 책이 될 것으로 곽윤은 추정하였다. 유고의 筆寫는 詩稿, 書, 雜著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연내에 완료할 계획이었다. 詩稿의 필사는 陝川 幷木에서 하기로 하였고, 書는 居昌 茶田 如齋에서, 雜著는 權相經이 자청하여 맡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에 곽윤이 鄭德永에게 답한 편지에 따르면 “처음에는 동지들을 많이 모아 기일 안에 탈고를 마치려고 하였으나, 중간에 外人이 엿볼 염려가 있을까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다만 두세 명과 날마다 몇 폭씩을 베꼈다. 매우 頭緖가 없기 때문에 비록 탈고를 마치더라도 훗날 刊行을 할 수 있을 지 걱정된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유문의 내용 가운데 排日에 관련된 내용이 많아 日帝의 감시를 피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1921년 봄에는 유문의 필사가 완료되었고, 여름에는 문인들이 茶田에 모여 유문을 校正하였다. 그해 8월에는 저자의 大祥을 마친 문인들이 茶田書堂에 모여 본격적으로 문집의 간행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곽윤이 1923년에 金銖에게 답한 편지에는 문집의 간행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만약 다시 시일을 끈다면,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의 변화에 간행을 못할 수도 있다. 간행할 수만 있다면 校正의 정밀함을 따지지 말고 우선 서둘러 일이백 본을 活字로 印出한 뒤에 遠近에 유포하여 문집이 遺失되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 만약 하늘이 돕는다면 훗날 정밀하게 교정하여 木板으로 간행할 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곽윤의 이러한 주장은 문인들 사이에 문집의 간행 절차에 대한 많은 논란을 야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문집의 간행이 그의 주장대로 곧바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1925년에 가서야 착수되기 때문이다. 1924년 여름에는 다시 다전에 문인들이 모여 유문을 교정하였고, 11월에는 저자의 改葬을 마치고 모인 문인들이 다시 문집의 간행을 논의하였다.

문집을 간행하기로 확정한 것은 1925년 2월의 일이다. 丹城 尼東書堂에 모인 문인들이 서울에 刊所를 차리고 활자로 문집을 간행하기로 결의하였다. 문집의 간행은 곽윤이 주도하고 河謙鎭, 金在植, 金銖, 權相經, 金榥 등의 문인들이 참여하였다. 3월에 刊所가 설치되었으며, 11월에 서울 寬勳洞에 소재한 漢城圖書株式會社를 통해 鉛活字로 印行되었다. 이 본은 현재 규장각(奎15675),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792),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204) 등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는 「茶山全書」라는 제목의 稿本이 소장되어 있는데, 분량은 原集 182권, 續集 12권, 逸集 4권 합 100책이다. 筆禮가 일정하지 않고, 用紙도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여러 사람이 나누어 필사한 것으로 판단되며, 編次와 分量, 校正事項 등으로 미루어 볼 때 1921년경에 처음으로 정리된 고본일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의 저본은 1925년에 연활자로 간행된 초간본으로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본 영인 저본 중 日帝의 檢閱로 인하여 삭제된 부분이 다수 있으므로 이를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소장의 「茶山全書」에 의거하여 組版ㆍ補充하였으며, 原集 권5의 제17ㆍ18판, 권57의 제32판, 권151의 제7ㆍ8판이 落張이므로 同一本인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으로 보충하였다.

年譜, 晦峯遺書(河謙鎭), 謙窩遺稿(郭奫), 重齋集(金榥)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집은 卷首, 目錄, 原集 165권, 續 12권 합 63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序와 跋은 없다.

첫머리에 高宗이 내린 3편의 敦諭가 실려 있는데, 각각 1899년 2월과 1903년 7월, 1904년 10월에 내린 것으로 모두 조정에 나와 政事를 보좌하라는 내용이다. 卷首는 上疏와 箚子, 獨對日記, 辭狀을 별도로 모은 것이다. 疏는 모두 17편이다. 1899년에 召命을 사양하는 상소, 1903년에 議政府 參贊과 經筵官을 사양하는 상소, 1904년에 純明妃의 服制를 改正할 것을 청하는 상소, 1905년 請對의 상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到京請對疏〉는 乙巳勒約의 소식을 듣고서, 직접 高宗을 面對하여 條約의 부당성을 토로하기 위해 올린 상소이다. 箚는 4편으로, 1903년에 올린 것이 3편, 1905년에 올린 것이 1편이다. 이 가운데 〈密進箚子〉는 1903년 9월에 올린 것으로, 러시아와 일본에 대한 외교와 을미사변에 대한 복수 방법을 건의한 秘密箚子이다. 獨對日記는 1903년 8월 23일 저녁 高宗을 獨對했던 일을 기록한 것으로, 許萬弼이 기록한 登對筵說이 뒤에 붙어 있다. 辭狀은 모두 3편으로, 比安 縣監과 中樞院 議官을 사직하는 글이다.

原集 권1~9는 賦 6편, 操 1편, 詩 1,078제, 樂府 3제이다. 〈村隣賦〉는 1870년에 嶧洞에서 살 때 지은 것으로, 이웃 간의 화목과 순후한 풍속을 노래한 글이다. 권1 첫머리의 〈俯海〉부터 〈挽南子深〉까지는 1882년부터 1918년 사이에 지은 四言詩를 별도로 모은 것으로서, 「詩經」의 표현 형식을 모방하여 賦, 比, 興으로 나누어 지은 것이다. 그 뒤로는 1861년 16세 때에 지은 〈和槐齋諸友贈別〉을 시작으로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권2의 〈頭流記行二十五篇〉은 1877년 8월 許愈, 金鎭祜, 河龍濟 등과 지리산을 유람할 때에 지은 25편의 連作詩이고, 권3의 〈後頭流記行三十篇〉은 지리산 유람에서 돌아오자마자 스승인 李震相과 朴致馥, 金麟燮 등을 모시고 다시 두류산을 유람했을 때에 지은 시이다. 권3에는 이 밖에 1878년 가을, 善山의 採薇亭, 金烏山, 禪石寺과 安東의 大山書堂, 牧隱影堂, 石門亭, 陶山書院, 淸涼山 등을 방문했을 때에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권4는 東遊錄이다. 1883년 李道樞, 朴圭浩, 河龍濟 등과 金剛山을 유람했을 때 지은 시와 왕래하는 길에 忠州의 忠愍祠, 江陵의 烏竹軒, 太白山 黃池, 紹修書院 등을 방문하여 지은 시를 모은 것이다. 권5에는 1884년부터 1892년 사이에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幽僑日用三十詠〉은 1884년 安東 春陽 筬山에 卜居할 때 지은 것으로, 山村에서의 日常을 읊은 시이고, 〈四月出遊〉부터 〈東遊歸路有懷子翼〉까지의 26題는 1886년 4월에 淸涼山과 東海를 유람할 때 지은 것이다. 권6에는 1892년부터 1896년 사이에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五十川途中〉, 〈竹西樓用尙相國韻〉, 〈東海碑〉, 〈武陵溪〉 등은 1892년 7월, 權有淵과 陟州를 유람할 때 지은 것이다. 권7에는 1897년부터 1901년 사이에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三峯書堂十二詠〉은 李震相이 生前에 老後를 위해 마련해 두었던 곳에 지은 三峯書堂의 全景을 읊은 시로서, 1897년에 지은 것이다. 1897년 이후의 시에는 挽詩가 많은 것이 특징인데, 권7에는 鄭趾善, 金鳳來, 金興洛, 張福樞, 姜鐄 등에 대한 만시가 있다. 권8에는 1901년부터 1910년 사이에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1901년 문인들과 泗川과 南海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지은 〈露梁懷古〉, 〈龍門寺〉, 〈錦山十七詠〉 등의 시가 있고, 만시로는 河在崑, 曺錫晉, 趙性家, 崔琡民, 姜必翼 등에 대한 것이 있다. 권9는 1911년부터 1918년 사이의 詩와 3題의 樂府이다. 특별한 내용의 시는 없고 주로 만시인데, 李錫宙, 鄭載圭, 李晩燾, 李翊九, 金道和 등에 대한 것이다. 악부 가운데 〈有懷南鄕諸公〉은 1892년의 작품으로, 筬山에 寓居할 때에 고향의 벗을 그리며 지은 것이다.

권10~127은 書 3,019편이다. 권10~11은 李震相에게 보낸 편지 21편이다. 書院撤廢令에 대해 관직이 없는 儒者들이 임금께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은 주제넘은 것이고, 화를 자초할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와 心의 動靜이 易의 消息과 합치되는 것을 밝힌 心易圖를 설명한 편지, 氣質之性에 대해 논한 편지 등이 있다. 권12는 朴奎祥에게 보낸 편지 5편이다. 1872에 보낸 편지에서는 太極圖說의 疑義에 대해 논하였다. 권13은 李敦禹, 張福樞, 金興洛 등 14인에게 보낸 편지 22편이다. 1879년에 김흥락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人心道心과 四端七情에 대해 논하였다. 권14는 朴致馥, 河兼洛, 郭致道 등 10인에게 보낸 편지 30편이다. 1870년에 박치복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文章의 實과 性齋 許傳의 「士儀」, 深衣 등에 대해 논하였다. 권15는 金麟燮, 卞榮奎, 姜龜相 등 11인에게 보낸 편지 17편이다. 1897년 강귀상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南冥集」의 校正과 重刊에 대해 언급하였다. 권16~18은 許愈에게 보낸 편지 57편이다. 1873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形, 氣, 神, 理의 관계에 대해 논하였다. 권19는 崔益鉉, 申箕善, 朴尙台 등 13인에게 보낸 편지 29편이다. 1906년에 崔益鉉에게 답한 편지는 擧義하자는 요청을 거절하는 내용인데, 거절의 이유로서 첫째로 日帝에게 침략의 빌미가 될 수 있는 점, 둘째로 聖旨를 왜곡하는 무리들에 의해 逆賊으로 몰릴 수 있는 점, 셋째로 못된 무리들이 의병을 빙자하여 반역을 꾀할 수 있는 점, 넷째로 의병의 비용을 대기 위해 향촌이 피폐해 질 수 있는 점을 들었다. 권20은 李種杞, 崔琡民, 盧秀五 3인에게 보낸 편지 28편이다. 1901년과 1902년에 이종기에게 답한 편지는 心卽理說에 대해 논한 것이다. 권21은 李載基, 許薰, 權世淵 등 9인에게 보낸 편지 41편이다. 1895년에 권세연에게 보낸 편지는 儒林들이 乙未事變을 맞아 擧義하면서 저자를 亞將으로 추대하자, 이를 사양하기 위해 쓴 것이다. 권22는 張升澤에게 보낸 편지 13편이다. 1901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虛靈知覺과 心性, 理氣의 관계 등에 대해 논하였다. 권23은 李以鍵, 曺錫斌, 盧泰鉉 등 14인에게 보낸 편지 26편이다. 1880년에 조석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母親의 服을 벗기 전에 父親의 喪을 당했을 때의 喪禮에 대해 논하였다. 권24는 張錫藎, 宋晉翼, 李爀明 등 6인에게 보낸 편지 16편이다. 1896년에 송진익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義兵의 亞將을 사양한 것에 대한 비난과 소문을 해명하고, 「理學綜要」의 校正에 대해 언급하였다. 권25는 金麟洛, 李道默, 宋民用 등 9인에게 보낸 편지 36편이다. 1901년 송민용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物에 主宰가 없다는 說에 대해 논하였다. 권26은 鄭載圭에게 보낸 편지 12편이다. 學問에 있어서 實踐과 義理의 窮究를 모두 중요시 해야 한다는 내용과 「大學」의 明德에 대해 논한 편지가 있다. 권27은 柳必永, 李學淵, 郭永甲 등 25인에게 보낸 편지 56편이다. 1896년 곽영갑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濯淸軒 郭趪의 實記를 간행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일을 논하였다. 권28은 金鎭祜에게 보낸 편지 21편이다. 1878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四端十情經緯圖〉를 보내면서 이치에 맞지 않는 곳을 지적해 달라고 하였고, 1901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理의 偏全과 氣의 偏全의 관계에 대해 논하였다. 권29는 尹冑夏, 盧近壽, 宋止洛 등 13인에게 보낸 편지 45편이다. 1895년에 윤주하에게 답한 편지는 出處의 義理에 대해 논한 것이다. 권30은 柳基一, 南健, 安重燮 등 24인에게 보낸 편지 59편이다. 1897년에 유기일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華西 李恒老와 寒洲 李震相의 학설이 합치된다고 하고, 「寒洲集」의 活印本 27책을 보내니 평가를 바란다고 하였다. 권31은 李正模, 李師範, 朴以晦 등 8인에게 보낸 편지 20편이다. 1874년 이사범에게 답한 편지는 「家禮」의 疑義에 대해 논한 것이다. 권32는 李承熙에게 보낸 편지 39편이다. 1894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理學綜要」의 校勘에 대해 논하였고, 1896년의 편지에서는 明德과 心體의 관계에 대해 논하였다. 권33은 李中轍, 朴圭浩, 成琪永 등 17인에게 보낸 편지 40편이다. 1870년 박규호에게 보낸 편지는 「詩經」을 읽는 것도 좋지만 「小學」과 「大學」을 공부하는 것만은 못하다고 조언하는 내용이다. 권34는 曺坦淳, 李道樞, 余秉均 등 15인에게 보낸 편지 49편이다. 1897년 이도추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李佑贇의 「月浦集」의 간행을 치하하고, 「南冥集」의 간행을 두고 생겨난 분란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 논하였다. 권35는 張錫英에게 보낸 편지 28편이다. 1918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艮齋 田愚의 性師心弟說에 대해 논하였다. 권36은 李正鎬에게 보낸 편지 20편이다. 1899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心卽理說을 논하였다. 권37은 權有淵, 都正澮, 趙鎬來 등 29인에게 보낸 편지 47편이다. 1895년 조호래에게 답한 편지는 「南冥集」의 重刊이 거의 완료된 것을 치하하는 내용이다. 권38은 趙貞奎, 丁大稱, 申敦植 등 27인에게 보낸 편지 44편이다. 1894년 정대칭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어지러운 國內 情勢와 兄을 잃은 자신의 처지를 언급하고, 淸나라 군사가 忠州에 주둔했다는 소문에 대해 물었다. 권39는 河龍濟, 趙昺澤, 卞熺五 등 4인에게 보낸 편지 39편이다. 1878년 하용제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明나라의 李攀龍과 王世貞의 문장이 기이하고 경박한 것만을 숭상하였다고 평가하고, 명나라 이후로 수백 년 동안 文運이 쇠퇴한 이유도 이들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 권40은 洪洛鍾, 李光龍, 金澤柱 등 15인에게 보낸 편지 53편이다. 1909년 홍낙종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이른바 ‘學校’라는 것이 功利를 얻기 위한 방편일 뿐이며, 儒家의 전통을 완전히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권41은 崔孝龍, 文濟萬, 林秀養 등 14인에게 보낸 편지 23편이다. 1871년 최효룡에게 답한 편지는 「家禮」의 疑義에 대해 논한 것이다. 권42는 李斗勳, 金忠燮, 琴海圭 등 5인에게 보낸 편지 35편이다. 1896년에 이두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寒洲集」에 수록된 梅圃 李澤龍과 竹圃 李見龍의 行狀에 小科 合格年이 잘못 기재되어 있으니, 頒帙되기 전에 修正하라고 하였다. 권43은 宋宗翼, 姜鑌, 李壽安 등 17인에게 보낸 편지 49편이다. 1896년에 송종익에게 답한 편지는 부탁받은 〈毅山扁記〉를 지어 부치면서 보낸 것이다. 권44는 朴升奎에게 보낸 편지 8편으로서, 「周易」과 「春秋」의 疑義에 대해 논한 것이 있다. 권45는 河憲鎭, 李炳憙, 卞穰錫 등 21인에게 보내는 편지 36편이다. 1898년 하헌진에게 답한 편지는 寒齋契를 헛되이 飮酒와 談笑로 그칠 것이 아니라 講學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권46은 柳淵龜, 宋在洛, 李道容 등 12인에게 보내는 편지 33편이다. 1911년에 송재락에게 보낸 편지는 「退溪集」의 疑義에 대해 논한 것이다. 권47은 金熙㴤, 張志衡, 河載華 등 22인에게 보낸 편지 44편이다. 1905년 김희주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世子에 대한 服制와 出嫁했으나 남편과 자녀가 없는 여자에 대한 복제에 대해 논했다. 권48은 金克永, 南朝洼 등 10인에게 보낸 편지 22편이다. 1912년 남조와에게 보낸 편지는 학문을 면려하는 내용과 「癡軒集」의 跋文을 지어 보낸다는 내용이다. 권49는 劉錫中에게 보낸 편지 24편이다. 「小學」과 「家禮」의 疑義를 논한 편지가 있다. 권50은 文鏞, 宋箕用, 南孝順 등 5인에게 보낸 편지 31편이다. 문용에게 보낸 편지에는 「朱子語類」, 「周易」 繫辭傳, 「禮記」의 疑義에 대해 논한 것이 있다. 권51~54는 金聲夏, 崔正愚 2인에게 보낸 편지 23편이다. 김성하에게 보낸 편지에는 「雅誦」과 冠禮, 「小學」의 疑義에 대해 논한 것이 있다.

권55~57은 宋鎬完, 崔允模, 梁昌圭 등 22인에게 보낸 편지 84편이다. 1897년 송호완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志氣의 확고함과 학문의 조예를 칭찬하고, 한가하고 젊을 때에 학문에 더욱 힘쓸 것을 면려하였다. 권58~60은 鄭宗世에게 보낸 편지 11편이다. 1892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사람은 貴賤에 관계없이 天性을 온전히 具備하고 태어났으니, 신분에 얽매이지 말고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권61은 權相翊, 鄭載星, 河在允 등 14인에게 보낸 편지 30편이다. 1901년 정재성에게 답한 편지는 人物性同異에 대해 논한 것이다. 권62는 鄭鎔, 沈斗煥, 吳寅淳 등 13인에게 보낸 편지 31편이다. 1898년 정용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李震相의 〈達道說〉과 〈四七經緯說〉, 朱子의 〈答潘子善書〉 등의 내용에 대해 논하였다. 권63은 安鍾彰, 韓南敎, 郭泰根 등 9인에게 보낸 편지 46편이다. 1916년에 안종창에게 보낸 편지에는 李承熙의 사망 소식에 애통해하면서, 그를 중국으로부터 反葬할 것인지 알아보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권64는 宋鎬坤에게 보낸 편지 45편이다. 1913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耶蘇敎의 害毒을 지적하면서,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워지는 것은 천하의 순환인 만큼, 장차 天道가 회복될 것이라고 하였다. 권65는 鄭濟鎔, 李基默, 李寅杓 등 14인에게 보낸 편지 36편이다. 1905년 정제용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朱子語類」의 간행 비용에 대한 조언과 東學亂에 대한 대처 방안, 勉菴 崔益鉉이 高宗에게 올린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실 등을 언급하였다. 권66은 宋鎬彦에게 보낸 편지 17편이다. 1898년에 보낸 편지는 啓蒙說에 대해 논한 것이다. 권67은 河鳳壽, 宋雲用, 朴時瑗 등 9인에게 보낸 편지 29편이다. 1900년경에 하봉수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李恒老가 지은 「華西雅言」의 글을 인용하여 陽明學과 佛敎에서 말하는 理의 개념을 비판하였다. 권68은 崔炳寅에게 보낸 편지 22편이다. 1896년에 답한 편지는 太極圖의 疑義에 대해 논한 것이다. 권69~70은 朴熙元에게 보낸 편지 4편이다. 宋時烈, 李恒老, 李震相, 金平默 등 先儒의 心性說과 理氣說에 대해 논한 편지와 「論語」, 「孟子」, 「書經」, 「周易」, 「小學」의 疑義에 대해 논한 편지 등이 있다. 권71은 孫晉洙, 韓愉, 曺庸相 등 22인에게 보낸 편지 42편이다. 1917년에 조용상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曺兢燮이 지은 〈書退溪集答黃仲擧金敬夫二書後〉의 내용에 대해 언급하였다. 권72는 宋浚弼, 李圭南, 禹熙容 등 15인에게 보낸 편지 35편이다. 1903년에 송준필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退溪 李滉과 高峯 奇大升 간의 四七論辯에 대해 논하였다. 권73은 丁敦燮, 李學魯, 李洪翼 등 8인에게 보낸 편지 23편이다. 1889년에 정돈섭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六藝의 疑義에 대해 논하였다. 권74는 河謙鎭에게 보낸 편지 31편이다. 1896년에 답한 편지는 「南冥集」의 新本과 舊本을 두고 儒林들이 갈등을 빚자, 해결책을 제시한 글이다. 권75는 尹弘洛에게 보낸 편지 17편이다. 「詩經」의 疑義에 대해 논한 편지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권76~77은 金殷埴, 李道勉, 李炳憲 등 5인에게 보낸 편지 28편이다. 1898년에 이병헌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孟子」 萬章에 나오는 ‘怨慕’의 ‘怨’ 자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의미가 아닌 ‘서러워한다’의 뜻으로 풀이하였다. 권78~79는 鄭敏錫에게 보낸 편지 17편이다. 「小學」, 「心經」, 喪禮의 의의에 대해 논한 것이 있다. 권80~81은 李存垕에게 보낸 편지 18편이다. 1903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공개적으로 상소를 올리지 못하고, 秘密 箚子를 올리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召命에 대한 자신의 거취를 밝혔다. 권82~83은 郭徽承, 安永在, 韓夔錫 등 6인에게 보낸 편지 21편이다. 곽휘승에게 보낸 편지가 많은데, 「中庸」, 〈太極圖說〉, 「書傳」, 鄕飮酒禮의 疑義에 대해 논한 것이 있다. 권84는 尹昌洙, 安鼎呂, 河啓洛 등 16인에게 보낸 편지 37편이다. 1915년에 윤창수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從子가 伯叔父의 喪에 올리는 祝辭와 미리 부모의 棺을 준비하는 것의 當否에 대해 논하였다. 권85는 曺兢燮에게 보낸 편지 14편이다. 1899년에 답한 편지는 이진상의 心卽理說과 이황의 心合理氣說의 차이에 대해 논한 것이다. 권86은 李中燮, 李貞基, 宋鍾述 등 14인에게 보낸 편지 26편이다. 1899년 송종술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知行說에 대해 논하였다. 권87은 金在植, 崔海潤, 朴世煥 등 13인에게 보낸 편지 34편이다. 1904년 최해윤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거듭 喪을 당한 것을 위로하고, 혼란한 세태에 宗社와 백성의 安危를 염려하였다. 권88은 權旭淵, 韓圭錫, 姜台秀 등 5인에게 보낸 편지 26편이다. 1896년 권욱연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義兵에 참여하지 않은 일을 해명하고, 이 일로 인해 향촌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移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권89~90은 權喆淵에게 보낸 편지 43편이다. 1897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人心과 道心에 대해 논하고, 「論語」를 精讀하고 실천할 것을 권하였다. 권91은 權相圭, 李壽熙, 曺元承 등 18인에게 보낸 편지 40편이다. 1915년에 조원승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자신이 써 준 碑碣文에 저자의 官銜을 기록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였다. 권92는 李泰植, 張右遠, 權載甲 등 9인에게 보낸 편지 32편이다. 1909년에 이태식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학문에 힘쓸 것을 면려하고, 부탁받은 墓道文에 대해 논하였다. 권93은 河經洛에게 보낸 편지 27편이다. 1898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寒洲學派의 主理說이 세상에서 비난을 받고 있지만, 문도들은 주리설을 지키고 전수하여 옳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유일한 바람이라고 하였다. 권94는 河泳台, 河弘逵, 金基浩 등 9인에게 보낸 편지 29편이다. 1901년 하영태에게 답한 편지는 「中庸」의 疑義에 대해 논한 것이다. 권95는 趙顯珪, 丁泰鎭, 許容孝 등 15인에게 보낸 편지 32편이다. 1906년에 조현규에게 답한 편지는 학문을 면려하고, 墓道文을 찬술해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는 내용이다. 권96은 權載玉, 宋廷用, 朴鍾厚 등 11인에게 보낸 편지 37편이다. 1901년에 송정용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人物性同異에 대해 논하였다. 권97~98은 余象勳에게 보낸 편지 19편이다. 「소학」, 「논어」, 「대학」의 疑義와 四端七情에 대해 논한 글이 있다. 권99는 林苾熙, 卞永殷, 沈鶴煥 등 10인에게 보낸 편지 31편이다. 1899년에 심학환에게 답한 편지는 龍湖에 만든 契社의 명칭을 자문받고, ‘龍湖儒契’라고 지어 보낸 것이다. 권100은 朴勝復, 崔淳崑, 安鍾性 등 19인에게 보낸 편지 34편이다. 1916년에 박승복에게 답한 편지는 집안일로 여가가 없다는 핑계로 공부에 전념하지 않으면서, 山水를 遊覽하러 다니는 행태를 준엄하게 꾸짖는 내용이다. 권101은 金思鎭, 盧正容, 蔡炳達 등 19인에게 보낸 편지 42편이다. 1913년에 김사진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六經과 「春秋」를 숙독하여 기틀을 잡은 뒤에, 「綱目」을 읽을 것을 권하였다. 권102는 李炳台에게 보낸 편지 11편이다. 「대학」, 「예기」, 「논어」의 疑義에 대해 논한 것이 있다. 권103은 金昌淑, 金世榮, 宋毅用 등 14인에게 보낸 편지 43편이다. 1902년 김창숙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山海集」의 간행과 돌아가신 부모의 生忌 문제에 대해 논하였다. 권104는 朴齊燾, 曺秉憙, 崔兢敏 등 10인에게 보낸 편지 20편이다. 1911년에 박제도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性理類選」의 編纂과 校正에 대해 언급하였다. 권105~106은 洪濬에게 보낸 편지 23편이다. 1906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新式 學校가 인재를 끌어다 망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마땅히 事功보다 道德을 앞세우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권107은 金東燮, 鄭鏞, 馬周燮 등 6인에게 보낸 편지 17편이다. 1917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天命에 편안하고 이치에 순종해야 하며, 道가 행해지지 않음을 근심해야지 가난을 근심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권108은 安壎, 李炳奭, 許永 등 6인에게 보낸 편지 32편이다. 1906년에 안훈에게 답한 편지는 근래 학자들이 虛僞에만 힘쓰고 있으니, 이를 본받지 말고 內實에 힘쓰라는 내용이다. 권109는 黃雲河, 黃復性, 韓德銖 등 4인에게 보낸 편지 36편이다. 황운하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人心道心, 「書傳」의 疑義 등을 논한 것이 있다. 권110은 宋元求, 盧普鉉, 文載畿 등 10인에게 보낸 편지 35편이다. 1907년에 손원구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先親의 遺文을 수습하고 行狀을 찬술하는 일에 대해 언급하였다. 권111은 安鍾斗, 金源, 李敎宇 등 11인에게 보낸 편지 34편이다. 1900년에 김원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理氣에 대해 논하였다. 권112는 裵炳翰에게 보낸 편지 18편이다. 1899년에 답한 편지는 涵養과 省察의 공부, 四端과 七情, 心性說 등에 대해 논하였다. 권113은 琴錫命, 崔薰敎, 姜必秀 등 5인에게 보낸 편지 17편이다. 1902년에 강필수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退溪集」의 疑義에 대해 논하였다. 권114는 郭繡坤에게 보낸 편지 5편이다. 1903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근래에 젊은이들이 名利에 빠져드는 세태를 탄식하고, 이를 경계로 삼아 면려할 것을 당부하였다. 권115는 南孝檍, 鄭鍾和, 洪載夏 등 13인에게 보낸 편지 32편이다. 1912년에 남효억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心卽理說과 心合理氣說에 대해 논하면서, 심합리기설은 心의 通體를 가지고 논한 것이고, 심즉리설의 심은 本體를 가지고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권116은 文采洙, 安鍾和, 權珪容 등 26인에게 보낸 편지 48편이다. 1905년 권규용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詩傳」의 疑義에 대해 논하였다. 권117은 鄭升謨, 李學基, 崔時潤 등 15인에게 보낸 편지 33편이다. 1919년 정승모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공부를 할 때 단계를 뛰어넘지 말고 순차적으로 할 것을 충고하였다. 권118은 權命燮, 鄭德永, 李基元 등 20인에게 보낸 편지 42편이다. 1915년 정덕영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卒哭과 服制 등 喪禮에 대해 논하였다. 권119는 金在華, 李鉉珪, 郭鍾成 등 17인에게 보낸 편지 35편이다. 1914년 김재화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文章 공부에 치중하기보다는 이치를 마음속에 터득하는 공부를 먼저 할 것을 권면하였다. 권120은 尹在洙, 朴憙鍾, 秋敎勉 등 13인에게 보낸 편지 19편이다. 1898년 추교면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小學」의 疑義에 대해 논하였다. 권121은 權相經에게 보낸 편지 14편이다. 氣의 淸濁과 偏全, 心性, 知覺, 「맹자」와 「논어」의 疑義 등에 대해 논한 것이 있다. 권122는 金銖, 李弘基, 夫根晦 등 20인에게 보낸 편지 39편이다. 1916년 김수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맹자」의 疑義와 사단칠정에 대해 논하였다. 권123은 朴膺鍾, 金濟東, 權相銖 등 12인에게 보낸 편지 29편이다. 1914년 박응종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강건한 기운을 키울 것과 「논어」와 「맹자」를 충분히 공부한 뒤에 「心經」과 「近思錄」을 읽을 것을 권하였다. 권124는 洪晦根, 金楗, 金永善 등 24인에게 보낸 편지 41편이다. 홍회근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世道가 날로 허물어지는 것을 탄식하며, 天道와 人倫을 회복시키는 데 힘쓰기를 당부하였다. 권125는 金榥에게 보낸 편지 10편이다. 1915년에 답한 편지에서는 道와 文은 어느 한쪽만을 폐기할 수 없는 것이지만, 道가 文의 主가 된다고 하였으며, 居敬窮理의 공부에 있어서 ‘重’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권126은 李紓華, 崔益翰, 姜炳續 등 16인에게 보낸 편지 25편이다. 1914년 최익한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대학」의 句讀와 뜻풀이를 바로잡아 주었다. 권127은 魯城 闕里祠의 儒生, 「朱子語類」의 刊所, 晉陽鄭氏 門中, 형 郭珽錫, 조카 郭沁ㆍ郭湛ㆍ郭溶ㆍ郭奫 등에게 보낸 편지 30편이다. 노성 궐리사의 유생에게 답한 편지는 궐리사에서 孔子의 肖像을 새로 그려 봉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보낸 것이다.

권128~132는 雜著 118편으로서, 저자의 학문적 업적을 살필 수 있는 글이 많다. 〈晦窩三圖〉는 1866년 21세 때에 晦菴 朱熹, 晦軒 安珦, 晦齋 李彦迪을 尊慕하여 지은 것으로, ‘晦’ 자의 의미를 부연하여 7개의 贊과 11개의 銘, 11개의 箴을 짓고, 이를 3개의 圖表로 그린 저작이다. 〈學賊〉은 好名, 護短, 姑息, 苟同, 自信의 다섯 가지를 학문의 賊으로 규정하고, 그 가운데 한 가지라도 있다면, 학문을 성취할 가망이 없다는 내용의 글이다. 〈繹古齋夾室壁上戒〉는 學問, 言行, 四勿, 文字 등 총 50조목에 대해 경험에서 우러나온 격언을 모은 글이다. 〈四端十情經緯圖〉는 1871년 26세 때에 그린 것으로, 자세한 解說이 붙어 있다. 여기서 저자는 七情을 五行의 相生과 相剋의 관계 속에서 愛, 喜, 樂, 憂, 哀, 惡, 怒, 忿, 欲, 懼의 十情으로 분류한 뒤에, 四端을 經으로 十情을 緯로 파악하였다. 〈心出入集說〉은 공자와 맹자 이후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이 제시한 心의 出入에 대한 학설을 모아 분석한 뒤에 자신의 견해를 붙인 글이다. 〈理訣〉은 理를 氣, 動靜, 體用, 性情, 心, 明德 등의 측면에서 살펴봄으로서, 理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논저이다. 〈柳省齋心說辨〉은 1891에 지은 것이다. 일찍이 저자는 華西 李恒老의 학설이 李震相의 心卽理說과 합치된다고 생각하였는데, 화서의 제자 柳重敎가 화서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자 이를 辨破한 글이다. 〈代服難〉은 1900년에 지은 것으로, 자식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할아버지의 服을 입는 것은 잘못임을 밝힌 글이다.

권133~136은 序 108편이다. 文集序로는 姜渾의 「木溪集」, 洪錫의 「遜愚集」, 鄭必達의 「八松集」, 安侹의 「道谷集」, 鄭濟鎔의 「溪齋遺稿」, 趙徵天의 「道峯遺集」, 都敬孝의 「病隱集」, 盧秀五의 「芳旅遺稿」, 朴忠源의 「陶塢逸稿」, 文宣浩의 「畏庵稿」, 權必稱의 「梧潭集」, 李志容의 「南皐遺稿」 등에 대한 것이 있다. 字序로는 河龍濟, 丁奎弼, 金聲夏, 余象勳 등에게 지어 준 것이 있고, 送序로는 崔琡民, 金顯玉, 崔海潤, 權鍾遠 등을 전송하며 지어 준 것이 있다. 이외에 高靈李氏家乘, 晉陽河氏派譜, 慶州鄭氏派譜, 昌原黃氏族譜, 光州李氏族譜 등의 族譜와 「晦軒實紀」, 「龜山實紀」, 「克齋實紀」 등의 實紀에 쓴 것이 있다.

권137~140은 記 116편이다. 주로 서재, 정자, 서당 등의 건물에 대한 記文이다. 권137은 三峯書堂, 勿川書堂, 道泉齋, 藏淸軒, 德友亭, 鼓山齋, 烈婦金氏旌閭, 道章齋, 仁智齋 등에 대한 기이다. 이 가운데 〈三峯書堂記〉는 李震相이 亭子를 짓고 老年을 보내기 위해 마련해 둔 땅에 후손과 문인들이 지은 書堂에 쓴 기문이다. 권138은 李氏三世孝烈旌閭, 孝烈婦李氏旌閭, 東湖亭, 芝山亭, 不欺堂, 石東精舍, 鼎山齋, 濯淸臺 등에 대한 기이다. 이 가운데 〈不欺堂記〉는 1905년에 지은 것으로서, 泗川에 있는 龜巖 李楨이 거처하던 건물에 쓴 기문이다. 권139는 慕道齋, 屛潭亭, 孝子鄭公旌閭, 養心齋, 三斯齋, 如在庵, 孝友堂, 春來亭 등의 기이다. 이 가운데 〈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鄭公旌閭記〉는 晉州에 살았던 효자 鄭碩基의 정려에 쓴 것이고, 〈春來亭記〉는 德溪 吳健을 기리기 위해 山淸 金石에 지은 정자에 쓴 것이다. 권140은 農山齋, 喜靜堂, 鳳凰亭, 義學書堂, 七里亭, 至愚堂, 寒泉亭, 靈棲齋 등의 기이다. 〈農山齋記〉는 全州李氏 完原君의 후손들이 조상의 遺志를 기리기 위해 지은 居昌의 農山齋에 쓴 기문이다.

권141~142는 跋 71편이다. 문집의 발로는 河弘度의 「謙齋集」, 郭趕의 「竹齋集」, 河友賢의 「豫菴集」, 郭期壽의 「寒碧堂集」, 許燉의 「滄洲集」, 金玏의 「柏巖集」, 金德五의 「癡軒集」 등에 쓴 것이 있고, 기타 저술에 쓴 발로는 〈朱子語類重刊跋〉, 〈春秋集傳跋〉, 〈書秋潭年譜後〉, 〈書曺仲謹困言後〉 등이 있다. 이외에 〈書韓南塘人心道心說後〉는 韓元震의 人心道心說이 栗谷만을 존숭하고 退溪의 설을 배척한 것을 보고 이를 변파하기 위해 지은 글이고, 1891년에 지은 〈書洪思伯心說後〉는 李恒老의 문인 洪在龜가 柳重敎의 心說을 변파하기 위해 지은 글의 모순을 기록한 것이다.

권143은 銘 51편이다. 이 가운데 〈望楸亭八銘〉은 저자가 한때 머물며 독서하기도 했던 산청에 있는 密陽朴氏의 墳菴인 望楸亭을 두고 지은 것으로, 誠有齋, 泂酌室, 視均堂, 景義門, 漱玉泉, 仰喬臺 등 건물과 샘, 臺에 각각 명을 붙였다. 〈戒懼堂銘〉은 朴孝英이 輪山에 정자를 짓고, 그 堂인 戒懼堂에 붙일 명을 구하자 지어 준 것이고, 〈無聲琴銘〉은 李斗勳이 소장하고 있는 거문고를 두고 지은 것이다. 〈光州硯銘〉은 葛川 林薰이 光州 牧使로 재직할 때 얻었던 瑞石山의 옥돌로 만든 벼루를 두고 지은 것이다.

권144는 箴 17편, 贊 8편, 頌 2편, 昏啓 4편, 上樑文 10편이다. 箴으로는 〈經筵箴〉, 〈書筵箴〉, 〈繹古齋箴〉, 〈鷄鳴箴〉, 〈活齋箴〉, 〈五箴〉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오잠〉은 저자가 48세 때에 자신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好惡, 思慮, 守身, 處困, 講學의 다섯 가지를 면려한 글이다. 贊으로는 〈圃隱先生遺像贊〉, 〈退溪先生十訓贊〉, 〈率禮旌閭十贊〉, 〈四友贊〉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솔례정려십찬〉은 玄風 率禮에 세거하는 玄風郭氏의 忠臣 郭䞭, 孝子 郭履尙ㆍ郭潔, 烈婦 廣州李氏ㆍ居昌愼氏 등 15인을 기리는 글이다. 頌은 〈天君頌〉과 〈甘雨頌〉이다. 상량문은 閎精閣, 鳶魚亭, 祖雲憲陶齋, 繹古齋, 龜山齋 등의 상량문이다.

권145~146은 祝文 12편, 祭文 44편, 哀辭 11편이다. 축문으로는 鐵馬山川에 비를 기원할 때 지은 것, 比安 縣監을 사직한 후 家廟에 告할 때에 지은 것, 亡室 崔氏의 墓에 고하기 위해 지은 것, 愼齋 周世鵬의 影幀을 봉안하면서 지은 것 등이 있다. 제문은 李震相, 李正模, 黃灝, 安永培, 郭濟坤, 李種杞, 許愈, 尹冑夏, 宋鎬彦, 余秉均, 崔益鉉, 鄭載圭, 李承熙 등에 대한 것이고, 애사는 權有淵, 丁奎弼, 郭泰根, 洪濬, 郭海坤 등에 대한 것이다.

권147~151은 碑 34편, 墓誌銘 42편, 壙誌 5편이다. 권147에는 姜民瞻, 李達衷, 趙宗道, 姜渾, 表沿沫, 李惟樟 등 11인의 神道碑가 수록되어 있다. 권148에는 李碩文, 河兼洛, 李始元, 郭建, 柳晦文, 李冕宙 등 12인의 墓碑가 수록되어 있다. 권149에는 星山李氏六賢遺墟碑, 竹皐書院遺墟碑, 孝子 柳心鐸의 旌閭碑, 李翮 妻 孝婦 金氏의 旌閭碑 등 11편의 碑文과 曺植, 李屹, 朴而章, 曺挺立, 權斗緯 5인의 묘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권150에는 金泰鴻, 權重淵, 李正模, 丁一愼, 孫亮泰, 裵大維 등 21인의 묘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권151에는 李宗榮, 朴周大, 卞榮奎, 黃履昌, 文鎭宅 등 16인의 묘지명과 金道和, 河兼洛, 尹冑夏, 鄭濟鎔, 河載崐 5인의 광지가 수록되어 있다.

권152~154는 墓表 107편이다. 권152에는 郭海, 沈聖魯, 崔必鴻, 河泓, 劉錫中, 金廷麟, 許悅 등 33인, 권153에는 曺馨振, 李東權, 姜時厚, 林璣源, 梁天翼, 趙性敎, 盧光均 등 39인, 권154에는 朴致箕, 全現, 河晉賢, 柳宜文, 權有淵, 先考 郭源兆 등 35인의 묘표가 수록되어 있다.

권155~161은 墓碣銘 168편이다. 권155에는 文緯, 李惟碩, 郭維藩, 安濟遠, 崔縉 妻 安氏 등 20인, 권156에는 河忭, 宋廷男, 辛景夏, 周孟獻, 郭聖龜 등 22인, 권157에는 權承夏, 林眞懋, 李命允, 梁思貴, 許愈 등 25인, 권158에는 尹炳周, 盧秀五, 吳世潤, 裵世績, 李思訥 등 23인, 권159에는 朴明壽, 金克讓, 南孝源, 張錫龍, 李翊九 등 26인, 권160에는 安思喆, 閔致珏, 李潤德, 河必淸, 安秉遠 등 25인, 권161에는 崔宅淳, 都炳寅, 李宗植, 宋祺善, 白基東 등 27인의 묘갈명이 수록되어 있다.

권162~165는 行狀 19편, 遺事 3편, 傳 6편이다. 권162에는 李震相 1인의 행장, 권163에는 李東汲, 河禧源 妻 朴孺人, 崔虎文, 黃鍾煥 등 9인의 행장, 권164에는 吳世益, 邊奎錫, 韓致濂 등 6인의 행장, 권165에는 王考 郭守翊, 先考 郭源兆, 先妣 鄭氏 3인의 행장과 鄭宅秀, 林世弼, 李奎大 3인의 유사, 金啓烈 妻 殷孺人, 孝子 金致明 등 6인의 전이 수록되어 있다.

續 권1은 詩 13제와 書 38편이다. 李正鎬에 和答한 시, 李晩瓛과 李祥奎의 시에 次韻한 시, 李英勳, 李元浩를 추모하는 시 등이 있다. 〈獄中端陽有感〉은 1919년 巴里長書 事件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大丘 監獄에 구속되었을 때 端午節을 맞아 지은 시이다. 書는 許奫, 徐泳坤, 金鎭祜 등 12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876년에 김진호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靈이 理와 氣 가운데 어디에 해당되는지를 논하였다.

권2~11은 書 516편이다. 권2에는 鄭載善, 尹冑夏, 李承熙 등 20인에게 보낸 편지 45편이 수록되어 있다. 1905년경에 정재선에게 답한 편지는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 달려가 목숨을 바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고, 각자의 처지에서 의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권3에는 朴勝振, 尹坪夏, 李正鎬 등 16인에게 보낸 편지 53편이 수록되어 있다. 1911년 박승진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嘯皐 朴承任이 편찬한 「性理類選」의 定本을 완성한 것을 치하하고, 자신이 지은 〈性理類選序〉의 내용에 대해 언급하였다. 권4에는 張錫英, 金在明, 李鉐均 등 19인에게 보낸 편지 40편이 수록되어 있다. 1917년 이석균에게 답한 편지는 「朱子語類」의 疑義에 대해 논한 것이다. 권5에는 柳鳳熙, 李光龍, 李鉉圭 등 26인에게 보낸 편지 63편이 수록되어 있다. 1916년 유봉희에게 답한 편지는 拓菴 金道和의 壙誌가 바쁜 와중에 짓다 보니 엉성하고 하자가 있어서 부끄럽다는 내용이다. 권6에는 柳遠重, 朴憲韶, 安鍾彰 등 35인에게 보낸 편지 70편이 수록되어 있다. 1908년에 안종창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后山 許愈와 膠宇 尹冑夏의 遺稿, 愼齋 周世鵬의 年譜를 校正한 일을 언급하였다. 권7에는 南朝珪, 河啓洛, 許琡 등 38인에게 보낸 편지 69편이 수록되어 있다. 1916년 허숙에게 답한 편지는 「南冥集」의 疑義에 대해 논한 것이다. 권8에는 權喆淵, 張右遠, 李泰植 등 23인에게 보낸 편지 38편이 수록되어 있다. 1906년에 권철연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동생의 죽음을 애도하고 위로하였으며, 아울러 時事에 대해 물었다. 권9에는 丁泰鎭, 李炳國, 金在洙 등 19인에게 보낸 편지 40편이 수록되어 있다. 1916년에 정태진에게 보낸 편지는 부탁받은 墓道文을 보내면서 아울러 定庵 郭越의 事蹟을 문헌에서 보는 대로 보내 달라는 내용이다. 권10에는 李相羲, 洪濬, 黃雲河 등 48인에게 보낸 편지 66편이 수록되어 있다. 1908년에 홍준에게 보낸 편지는 東亭 李正鎬의 죽음을 애도하고, 문인들이 遺文을 조속히 수습하여 정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권11에는 李泰夏, 朴熹鍾, 李敎明 등 23인에게 보낸 편지 32편이 수록되어 있다. 1913년에 박희종에게 답한 편지는 「맹자」의 疑義에 대한 것이다.

권12는 雜著 15편, 序 2편, 記 1편, 跋 2편, 銘 1편, 祝文 3편이다. 잡저 가운데 〈五倫小說〉은 父子, 君臣, 夫婦, 長幼, 朋友의 五倫의 개념과 올바른 관계에 대한 견해를 기록한 글이고, 〈悶雨小話〉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혜택이 도리어 害毒이 되었으니, 하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내용이다. 序는 尹思進의 「篁林集」과 「井觀癡說」에 대한 것이다. 記는 朴氏의 書堂인 德陽齋에 쓴 것이고, 跋은 尹時衡의 「憂庵集」과 許奫의 晬辰詩에 쓴 것이다. 銘은 趙鎬來에게 써 준 「連齋銘」이고, 축문은 藍田書堂의 告由文ㆍ常享文과 陽湖書堂의 상향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