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공파(恭戴公派) - 장령공(掌令公) 계도
• 진주정씨(晋州鄭氏) 공대공파(恭戴公派) - 장령공(掌令公)계
진주정씨(晋州鄭氏) 또는 진양정씨(晋陽鄭氏)는 이른바 진주팔정(晋州八鄭)이 있는데 공대공파(恭戴公派)도 그 하나이다. 시조(始祖) 휘 장(莊)은 고려 말기에 통정첨지 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증손 척(陟)은 조선왕조 초기 태종대 이후 6대 왕에 걸쳐 벼슬한 진주정씨 장계(莊系)의 중흥조(中興祖)이다. 척(陟)은 3세 설(舌)의 아들로서 자(字)는 명지(名之)요, 호(號)는 정암(整菴)인데 시호(諡號)는 공대공(恭戴公)이다.
어려서 총명하였으며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 많은 벼슬을 거쳐 경창부윤(慶昌府尹)에 등용됐다. 1449년(세종 31)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후 1454년(단종 2)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이듬해 충청도 도체찰사(忠淸道都體察使)가 되어 굶주리는 백성을 구호했다. 세조 때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으로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본국지도(東國地圖)를 만들어 찬진(撰進)하였고, 해서(楷書)와 전서(篆書)에 뛰어나 왕실의 신인(信印)인 새보(璽寶)와 관인(官印)의 글자를 썼다. 또 전고(典故)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의제(儀制)를 찬했다. 청렴하고 조심했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가 향년(享年) 86세로 별세하였다. 산소는 경기도 광주군 세부면 초이리에 소재하고, 진주의 평천서원(平川書院)에 제향(祭享)됐다.
3세 설(舌)의 묘는 진주시 신안동 석갑산(石岬山)에 있으며, 공대공의 묘는 현재 하남시 초이동 묘역에 있다.
이후 5世 상계대(上系代)에서 사직공(司直公.恭謹.광양), 참의공(參議公.忠謹.진주), 목사공(牧事公.良謹.강원), 충절공(忠節公.誠謹.하남)으로 나눠진다.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참의공(충근)계는 6세에서 남호공파(南湖公派.奫.하동),
장령공파(掌令公派.夽.사천), 사간공파(司諫公派.奃.지수)로 나뉘어 아랫대로 내려오고 있다.
장령공파는 공대공(陟)의 셋째 아들인 충근(忠謹 : 관은 直長)의 차남 6세 운(夽)을 파조로 한다.
운(夽)의 자는 대운(大云)이요 호는 사락정(四樂亭).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가 중종 때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있었는데, 곧은 절개와 바른말로 임금에게 직언하다가 마침내 미움을 받아 거제현령(巨濟縣令)으로 나갔다. 그러나 곧 사직하고 돌아와 진주 비봉산 아래에 집을 짓고, 들어오면 어버이를 공양하고 자손을 가르쳤고, 나가면 농사지으며 고기잡는 일로 낙을 삼아 집이름을 사락정(四樂亭)이라고 했다. 문학과 행의(行誼)로서 종로(終老)하니 호조참판(戶曹叅判)의 품계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진주의 서쪽 평거동(坪居洞)에 있었다.
장령공 운(夽)은 아들 3형제를 두어 큰 아들(班 : 7세)은 목사(牧使)를, 둘째의 구(球)는 부사(府使), 셋째의 관(琯)은 현령(縣令)을 각각 역임하였다. 이 중에 반(班)의 아들 종원(宗元 : 8세)과 구(球)의 아들 현령(玄齡)이 처음으로 입사천(入泗川)하여 두량(斗良)에 정착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후손들은 장령공파두량(掌令公派斗良)이라 호칭하였다.
9세 희계(希契: 자 虞輔)는 8세 현령(玄齡)의 제3자 였지만 위로 희열(希說), 희직(希稷) 두형과 밑으로 희윤(希尹) 3형제가 모두 무후(无后)하여, 가계(家系)를 이었다.
이어 10세 치의(緇宜), 11세 유(瑜), 12세 동빈(東賓), 13세 지교(之僑), 지첨(之瞻), 지우(之羽), 지호(之虎) 4형제로 이어졌다. 지교(之僑)는 14세 복신(復新), 택신(宅新),수신(綏新)으로 이어지고, 각각 기립(起立).기상(起相).기림(起林) 한분씩 계를 이었다. 13세 지첨(之瞻)은 입정동(入正東)하여 학촌(鶴村)에서 후손을 이어나갔다.
14세 택신(宅新)의 계를 이은 15세 기상(起相)은 민(旻). 성(晟) 두 아들을 두었고, 16세 민(旻)은 네 아들로 극일(極一). 극홍(極洪).극주(極柱).극조(極祚)를 두었다. 넷째 극조(極祚) 할아버지는 학영(學榮).석영(錫榮) 두 아들을 두었으며, 18세 학영(學榮)은 17세 극홍(極洪) 가계를 이었고 재광(在鑛).재관(在寬) 두 아들을 두었다. 18세 석영(錫榮) 할아버지는 17세 극조(極祚) 가계를 이었고 19세 재규(在規)를 두었다.
17세 극조(極祚) 할아버지 묘는 진주 정촌, 할머니는 진주 평거동 산에 있었으나, 현재는 사천 두량(泗川 斗良) 가족묘원에 모셔져 있고. 18세 석영 할아버지 묘는 진주(晉州) 선학산(仙鶴山), 할머니는 산청 남사(山淸 南沙)에 있었으나, 현재는 사천 두량 가족묘원에 모셔져 있다.
19세 재규(在規)는 민양(敏陽).정양(正陽) 형제로 이었고, 20세 민양(敏陽)은 운종(運琮).운호(運浩).운영(運永) 3형제를 두었으며, 21세 운종(運琮)은 덕화(德和).수현(琇炫) 1남1녀를, 운호(運浩)는 도화(道和)를, 운영(運永)은 희경(喜敬).선형(善형)을 두어 대를 이어가고 있다.
19세 재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진주에 살다가 625동란때 처가인 산청 남사(山淸 南沙)로 이사하였으며, 묘는 산청 남사(山淸 南沙) 앞산에 모셔져 있다.
19세 재광(在鑛)은 운양(雲陽).시양(是陽).맹양(猛陽,일명鐥鎬).특양(特陽).윤양(閏陽) 5형제로 이었고. 재관(在寬)은 판양(判陽)으로 이었다.
20세 운양(雲陽)은 운준(運焌),운호(運淏),운식(運植) 세 형제를, 시양(是陽)은 운태(運泰),운용(運龍) 두 형제를, 맹양(猛陽,일명鐥鎬)은 운천,운열 두 형제를, 특양(特陽)은 운상(運商),운광(運光) 두 형제를, 윤양(閏陽)은 운정을, 판양(判陽)은 도정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