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일대기]
[ 性徹스님 일대기]
성철스님은 음력 1912년 2월 19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부친 이상언과 모친 강상봉 사이에서 4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 법호(法號)는 퇴옹(退翁) 법명(法名)은 성철(性徹)이다. 단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자치통감까지 배웠다한다. 늘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였으나 해결점을 찾지 못하다가 24살의 어느 날 노스님이 건네준 영가대사의 증도가(證道歌)를 읽고 홀연히 심안이 밝아짐을 느꼈다고 한다. 그 길로 산청 대원사로 들어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라는 무(無)자 화두를 들고 불철주야로 정진하여 42일 만에 화두가 동정일여(動靜一如)에 이르게 되었다.
1936년(25세) 봄, 해인사로 출가하여 백련암의 동산스님을 은사로 수계(受戒)를 받고, 이듬해 3월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운봉스님으로 부터 비구계를 받고 출가송(出家頌)을 읊었다.
출가 4년만인 29세 때,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오도송(悟道頌)을 읊고 용성, 동산, 성철로 이어지는 한국불교의 선맥(禪脈)을 이었다. 그 뒤 여러 선원에서 안거하면서 익히지 않은 음식을 하루 한 끼만 먹고, 눕지도 자지도 않는 장좌불와(長座不臥)로 고행 정진하였다. 1947년(36세)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답게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공주규약(共住規約)을 만들어 결사(結社)를 추진하였다. 이는 한국불교의 종풍(宗風)과 옛 총림(叢林)의 법도를 바로 세우는 일로서, 오늘날 한국 조계종의 형식과 질서를 세웠다. 통영 안정사 골짜기의 천제굴(闡提屈)에 머물며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처음으로 3천배를 시키고, 스스로 기도하고, 참회하고, 그 공덕은 남에게 베풀라고 가르쳤다. 1955년(44세) 해인사 초대 주지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철망을 두르고 절문 밖을 일절 나오지 않았다. 이 때 독보적인 불교이론과 실천논리가 확립되었다. 10 여년 동구불출(洞口不出)을 마치고 1965년(54세)에 문경의 김룡사에서 최초의 대중법문을 하였다.
1967년(56세)에 해인총림 초대방장에 취임하고, 그 해 겨울에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사부대중(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을 위해 하루에 두 시간 씩 법문을 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백일법문(百日法問)"이다. 백일법문은 불교의 근본 진리가 중도(中道)에 있음을 밝히고, 선종의 정통 종지(宗旨)는 돈오돈수(頓悟頓修)임을 천명하는 대법석(大法席)이었다.
18년 동안 해인총림의 방장으로 퇴설당과 백련암에 머물며 서릿발 같은 선풍(禪風)의 기강을 드높여 가야산 호랑이로 불렸다. 1981년(70 세)에 대한 불교 조계종 제6대 종정에 추대되어 한국불교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종단의 안정을 가져왔다.
1993년(82세) 법랍(法臘) 58년으로 11월 4일 새벽(7시),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잘 하라.’ 는 마지막 말씀과 열반송(涅槃頌)남겼다. 다비식에 30만 이상이 다녀갔고 사리(舍利)가 110여과가 나왔다.
성철스님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을 버린 용기, 평생토록 지킨 철저한 수행, 무소유와 절약정신은 우리 곁에 오셨던 부처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자기를 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던 그 참된 가르침은 오늘도 울리고 있다.
<성철스님 연보>
1912년 2월 19일 경남 산정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출생
24세(1935) 열가대사 증도가, 승찬대사 신심명을 읽고 감명, 지리산 대원사로 들어가 42일 만에 동정일여에 이름
25세(1936) 해인사 하동산스님은 은사로 출가
26~27세(1937~1938) 범어사 내원암에서 하안거, 통도사 백련암에서 동안거
28세(1939) 경북 은해사 운부암에서 하안거, 금강산 마하면에서 동안거
29세(1940) 금강산 마하면에서 하안거,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동안거중 오도송 읊음
30세(1941) 전남 송광사 삼일암에서 하안거, 충남 수덕사 정혜사에서 동안거
31세(1942) 중남 서산군 간월도 만공스님 토굴에서 하안거, 동안거
32세(1943) 충북 법주사 복천암 하안거, 경북 선산 도리사에서 동안거
33세(1944) 경북 선산 도리사에서 하안거, 경북 문경 대승사에서 등안거
34세(1945) 대승사에서 하안거, 대승사 묘적암에서 동안가.
35세(1946)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서 하안거. 동안거, 부인이 찾아왔으나 쫓아냄
36세(1947) 통도사 내원암에서 하안거, 문경 봉암사에서 동안거 중 봉암결사(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아래. 청담,자운,월산,혜암,성수,법전 스님 등과 주석)
37세(1948) 봉암사에서 하안거, 동안거.
38세(1949) 봉암사에서 하안거, 경남 월내리 묘관음사에서 동안거. 묘관음사로 13세 딸 이수경이찾아 왔으나 가라고 쫓아냄.
39세(1950) 경남 고성 문수암에서 하안거, 등에서.
40세(1951) 경남 고성 은봉암 하안거, 안정사 산자락 천제굴 동안거, 신도들에게 3전배하게 함.
41(1952) 천제굴에서 하안거, 창원 성주사 동안거
42세(1953) 천제굴에서 하안거, 동안거. 진주사범대 입학한 18세 된 딸 이수경이 두 번째로 찾아옴. 영원한 행복에 대해 이야기 함.
43세(1954) 천제굴 하안거, 동안거. 종단 정화 시작
44세(1955) 남해 용문사 백련암 하안거, 파계사 성전암 동안거.
45세~52세(1956~1963) 대구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 두문불출하며 하안거, 동안거. (57년 4월12일 모친, 59년 8월28일 부친 돌아가심.)
53세(1964) 부산 다대포 하안거, 서울 도선사 동안거.
54세(1965) 경북 문경 김룡사 하안거, 동안거 중도이론법문
55세(1966) 김룡사 하안거. 육조단경, 금강경, 증도가, 중도이론을 대중들에게 설법.
56세(1967) 해인사 백련암 주석. 해인총림 초대방장 취임. 동안거 기간에 백일법문 설법
57세~(1968) 해인총림 방장으로 퇴설당과 백련암에 주석
70세(1981) 1월 조계종 6대 종정 취임.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2월 ‘선문정로’ 출간.
71세(1982) 11월 본지풍광 출간
75세(1986) 6월 돈오입도요문론, 신심명증도가 강설 출간.
76세(1987) 6월 자기를 바로 봅시다. 출간 7월 백련불교문화재단설립 11월 도서출판 장경각 설립(선림고경총서 출판 시작)
77세(1988) 2월 돈황본 육조단경 출간. 7월 영원한 자유 출간.
80세(1991) 8월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 취임
81세(1992) 4월 백일법문 출간.
82세(1993) 11월4일 오전 7시30분 해인사 퇴설당에서 입적. 법람 58세, 1993년 11월 10일 해인사에서 다비식 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