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不遠人(도불원인)

정운종의 고전공부

산청 문화관광해설사

<산청지역 전설, 설화 4 _ 지리산>

도원 정운종 2025. 11. 4. 15:48

[곡점마을과 임걸룡]

곡점의 신천초등학교 옆에는 깊은 소가 있었는데 고기가 많아서 밖으로 나온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어느 날 마을에 사는 여자가 병이 나서 고기를 잡아먹으면 낫는다고 하여 깊은 소로 달려가려는 것을 방안에 붙들어 놓고 문을 잠그고 말렸더니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마을 사람이 윗 동리에 가서 일을 해주고 밤에 내려오는데 길이 밝게 비치는 곳으로 오다가 보니 그만 소에 풍덩 빠지더라는 것이다. 그 뒤에도 사람이 더러 빠져 죽음 일이 있어 귀신 이야기가 무성하였다.

옛날에 호랑이의 작폐는 산골마다 있는 이야기인데 고운동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묵계 노씨 집안에서 호환을 당했다. 초저녁에 젊은 부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는데, 뜻밖에 호랑이가 내려와서 부인을 물고 뿌리치니 아이는 마당에 떨어지고 호랑이는 그 부인을 물고 가서 굴에서 죽여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전주 이씨 한 분이 담력과 지략이 비범하였는데 개를 잡아서 끌고 호랑이굴 근처에 가서 벗을 놓았다. 개를 미끼로 하여 본인은 윗통을 벗고 호랑이 굴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뒷걸음 질을 치며 나왔는데 따라나오던 호랑이가 개를 보고 물어 당기다가 덪에 걸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한 사흘간 기다렸는데 덪에 치인 호랑이가 힘이 빠질 무렵에 두들겨 잡아서 호식 당한 가족들에게 간을 빼내어 씹어서 분을 풀게 하였다. 그러고 난 뒤부터 밤이 되면 높은 나무 끝에서 호식에 간 부인이 울부짖는 것이었다. 그것은 호식에 가게 되면 혼이 호랑이 발톱에 끼이는데 호랑이가 죽고나니 그 곳에서 빠져나와 갈 곳을 몰라서 울부짖는다는 것이다. 밤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그 당시에 있던 화송총에 불을 당겨서 "좋은 데로 가지

않고 왜 그러냐" 면서 총을 쏘았더니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고 한다.

하신마을 은혜사(恩惠寺) 뒷산에 경주 정씨의 부자 묘가 아래 위로 있는데 효행이 지극한 정도행(鄭道行)이 아버지 상을 당하자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삼년간 시묘를 살고 있었다. 근처에 사는 김씨라는 사람이 살인을 하고 항상 불안하게 살다가 하루는 점을 쳐보니 점쟁이가 말하기를 "아무 년 아무 날에 벼락을 맞아 죽을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씨가 점쟁이를 붙들고 살 수 있는 방도를 물어서 애원하니 점쟁이가 마지못해 가르쳐 주기를 "그날 그 시간에 이곳 어디를 가면 남루한 옷을 입고 방갓을 쓴 사람이 올것이니 불문곡직하고 그 사람을 붙들고 시간을 보내면 살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명심하고 그때가 되어 그곳에 가 있으니 과연 헤어진 옷을 입고 방갓을 쓴 사람이 산에서 내려오므로 그냥 그 사람을 붙들고 놓지를 않고 있었다. 그랬더니 날이 구물구물하다가 천둥번개를 치고 폭우가 쏟아지면서 벼락이 내려치는데 죄 지은 자가 삼년 시묘 사는 효자와 같이 있으니 차마 벼락을 칠 수가 없어서 휘두르다가 마침내 천기를 누설한 그 점쟁이를 쳐서 죽이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바로 뒤에 정도행의 처잣집 장인.장모가 이어서 돌아갔는데 그 부인이 또한 삼년씩을 시묘를 하다가 보니 몸이 쇠약해져서 자녀를 두지 못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시묘를 살았던 골짝을 시묘골이라고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시묘골이 여러 입을 통하여 발음이 변하여 시미골이 되어서 지금은 시미골이라고 부른다.

이 고장 전설에 의도(義盜) 임걸용(林傑龍)이야기가 있다. 시천면 내공의 정각사 자리는 수백년 전에 삼남대적으로 유명한 임걸룡이 출생한 곳이라 한다. 전하는 바로는 이 자리에 엿장수를 하는 한 부부가 한 칸 집을 짓고 살다가 임걸용을 낳았는데 임걸룡이 어렸을 때에는 업고 다녔지만 4, 5세가 되자 데리고 다닐 형편이 못되어 집에 두고 장사를 나갔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 선반에 얹어둔 엿이 십여개씩 줄어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예사로 알았지만 시일이 갈수록 만들어 둔 엿이 자꾸 줄어드니 임걸룡의 모친은 하도 이상해서 엿을 가져가는 도둑을 잡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평시와 같이 장사를 가는 척 하고 숨어서 살펴보고 있었다. 그랬더니 얼마후 임걸룡이 문을 열고 나오더니 주머니에서 엽전 한 닢을 꺼내 화로 불에 달군 후 실을 엽전 구멍에 단단히 매어서 엿을 놓아 둔 그릇에 던져두었다가 잠시후 실끈을 잡아당기니 엽전에 녹아 붙은 엿가락이 실끈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 비범한 지혜를 지켜 본 어머니의 생각으로는 그들의 처지로 볼 때 자기 아들이 도적보다 큰 인물로 발전할 수 없음을 알고는 성을 내어 꾸짖으며 "요놈의 자식이 방.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다 똥

싸면서 도둑질 해 먹는 것이냐"고 호통을 치며 "앞으로 큰 도둑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있던 임걸룡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어머니가 가르쳐준대로 하겠다고 하였다. 그 후 자라면서 지략이 비범한 임걸룡은 무예를 즐겨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으며 때맞취 정각사 동쪽에 쥐설이라고 하는 묘 옆에서 준마 한 필을 얻게 되었다. 현재 정각사 입구에 석주(石柱)가 서 있는데 임걸룡이 말을 매었던 돌이라고 한다. 그후 마근담 위쪽 봉우리에 산채를 마련하여, 부하를 훈련시키고 활동하다가 산청 새고개의 길가에 있는 석굴에 숨어들어 삼남대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 새고개는 지금의 신안면 외송리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굴도 그대로 남아있다. 임걸룡은 팔도의 행상을 상대로 물품을 털었는데 전량을 날취하는 것이 아니고 물품의 일부분을 얻어 모아서 부하를 먹이고 남은 것으로는 고장에 있는 빈민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이 길목을 지나가는 등짐장수는 미리 불품의 일부분을 별도로 갖고 오다가 굴앞에 이르러 던져주고 갔다고 한다. 한때는 지금의 차황면 철수에 있는 호렴산에도 숨어 살았다는 굴이 남아있다. 그 당시 임걸룡이 출생한 내공의 지리에 대해서 풍수설에 청룡단두혈(靑龍斷頭穴)이라하여 속인이 살면 대적이 나고 공당(公堂)이 서면 길지(吉地)라 하였는데 현재 정각사가 그 자리에 세워져 있다.

 

[세석평원과 호야봉]

전설에 의하면 지리산에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한 쌍의 남녀인데 대성동계곡(大成洞溪谷)에 살았다고 한다. 남자 이름은 호야(乎也), 여자의 이름은 연진(蓮眞)이었다. 이 두 사람은 남해안에서 섬진강을 따라 화개(花開)골을 거쳐서 지리산의 비경(祕境)을 찾아든 첫 번째의 인간 가족이었던 것이다. 다정다감한 그들 남녀는 씨족 사회의 엄한 규율과 간섭을 벗어나 자유롭게 평화스러운 가정을 꾸미고 맛좋은 산채와 과일을 따서 배부르게 먹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함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어느날 남편인 호야가 산과(山果)를 따기 위하여 산골 깊이 들어가고 없는 사이에 근처에 살고 있던 검정 곰이 찾아와서 연진을 위로하며 하는 말이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세석평원에는 소원대로 아들, 딸을 낳을 수 있는 음양수라는 신비의 샘이 있다"는 것을 자랑삼아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들은 연진은 기뻐하며 남편과 상의할 겨를도 없이 혼자서 단숨에 음양수 샘터로 달려가서 기적의 샘물을 실컷 마쳤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평소에 곰과 사이가 좋지 못한 호랑이가 곰과 연진 여인이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엿듣고는 이것을 그대로 지리산 산신령에게 고해 바치니, 산신이 대노하여 음양수의 신비를 인간에게 발설한 곰을 토굴 속에 잡아 가두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그 공으로 백수의 왕이 되었고, 또 음양수 샘물을 훔쳐먹은 연진에게도 무거운 벌을 주어 잔돌(細石)평전의 들판에서 평생토록 외로이 철쭉꽃을 가꾸게 하였다. 그 날부터 연진은 뜻하지 않았던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저주하며 세석평원에서 날이면 날마다 손발이 닳도록 꽃밭을 가꾸니, 연진의 닮아 터진 다섯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철쭉꽃을 붉게 만들었다. 세석의 철쭉은 연진의 애처로운 모습을 닮아 그처럼 청초하고 애련하게 해마다 피고진다는 것이다.

그 후 연진 여인은 촛대봉 정상에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속죄를 빌다가 그대로 망부석이 되었으며, 촛대봉의 앉은 바위는 가련한 연진 여인의 굳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천왕봉 산신령도 연진 여인의 가련한 희생을 보고서는 인간에 대한 노여움을 풀고 기적의 샘 음양수를 인간에게 개방하였으며, 그 혜택을 받게하니 그 후부터 지금까지도 번함이 없다고 한다. 한편, 연진 여인의 남편 호야는 산과를 따러 나간 사이에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부인 연진을 찾으려고 날마다 계곡과 밀림 그리고 산고개를 넘어 지리산 일대를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가 칠송봉 중턱에서 까마귀로부터 연진의 소식을 전해 듣고 단숨에 세석평원으로 달려갔으나 산신령의 저지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는 세석평원 중턱 능선의 높은 봉우리에서 발돋움을 하고 세석평원을 향하여 목이 터져라 연진을 불렸으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날마다 부르기를 거듭하여 쉴 줄을 몰았다. 칠성봉에서 세석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절벽 위에 우뚝 솟아있는 호야봉(乎也峰)은 그가 애태우며 섰던 자리라하여 그런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언제까지나 아내를 부르다가 지쳐서 그대로 망부석이 되어 서 있는 호야의 굳어진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지리산 이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창업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고려의 국운이 쇠잔한 말엽에 이성계가 개국의 꿈을 품고 먼저 백두산을 찾아서 산신에게 빌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다음으로 찾은 곳이 백두산의 정기가 흘러와서 맺힌 지리산이었는데 석달 열흘동안에 지리산 산신에게 창업의 뜻을 빌었으나 또한 산신이 들어주지 않자 마음이 상한 나머지 남해 보광산에 들어가 마지막으로 빌기 시작한지 삼칠일(21)만에 드디어 보광산 산신의 허락을 받고 조선왕조의 창업을 이루었다. 왕이 되고 난 뒤에 그때의 일을 생각하여 조정대신에게 "보광산을 비단으로 감싸라"고 하였는데 중지를 모아도 비단으로는 덮을 수가 없어서 그 대신 그이름을 비단 금()자로 하여 금산이라 바꾸어 부르게 하였다. 한편으로 지리산은 불복의 산으로 밉게 여겨서 반역산(反逆山) 또는 적구산(赤狗山)으로까지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지리산 산신이 조선에 불복하자 앞으로 이심(異心)을 갖는 사람이 날 것이라 하여 지리산(地理山)을 지이산(智異山)으로 고치고 전라도로 귀양을 보냈다는 전설이 있다.

 

[음사와 천연스님]

음사(淫祠)와 천연(天然)스님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천연은 남도(南道) 스님으로 키가 팔 척이요 담력이 뛰어났었다. 일찍이 길을 가다가 지리산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옆에 소위 천왕봉 음사란 것이 있었다. 전부터 괴이한 영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지나는 사람이 만약에 경건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몇 걸음을 못 가서 사람과 말이 모두 함께 쓰러져 죽는다고 하니 행객들이 무서워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천연이 괴망한 것이라 하여 팔을 휘두르며 지나겠는데 별안간 타고 있었던 말이 땅에 넘어졌고 자기도 함께 굴러떨어졌다. 천연은 매우 성이 나서 곧 죽은 말을 가져다 사당 뜰 가운데서 도살하여 피로써 사당 벽을 뿌려서 더럽히고 다시 불을 질러 태우고 가버렸는데 그 뒤로는 신의 괴이한 짓이 드디어 없어졌고 상인이나 길손들이 편하게 지나게 되었다. 천연은 일찍부터 기고봉(奇高峯)을 찾아 주역을 배워서 자못 그

뜻을 통달하였다. 퇴계와 고봉과의 사이에 성리(性理)를 논변하는 서신을 가지고 왕래하였고 그간의 논변하는 내용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선조 41년에 기옹(崎翁) 정홍명(鄭弘溟)이 일이 있어서 신천(信川)에 갔었다. 그때 천연이 소식을 듣고 소를 타고 왔는데 나이가 80 넘었다고 한다.

 

[신선 너덜]

중산리 매표소에서 옆길로 접어들어 산 중허리를 돌아가면 시야가 트이면서 넓은 암석지대가 나타난다. 아래 위쪽으로 길게 펼쳐진 이 암석은 오랜 옛날 지리산 상봉 쪽에서 흘러내린 산사태에 밀려온 바윗돌들이 흙은 씻겨 나가고 그대로 남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크고 작은 바위들이 조화롭게 흩어져있어서 영기(靈氣)를 느끼게 한다. 많은 무속인들이 드나들어 바위 아래마다 촛불을 켰던 곳이다. 매년 10월에 산청군 지리산 평화제의 산신제도 이곳에서 모신다. 전설에는 천태산 마고선녀가 장독에 모래를 깔고 싶어서 치마에 모래를 싸 가지고 가다가 해진 치마구멍으로 모래가 흘렀는데, 그 모래더미가 굳어서 이 신선너덜이 되었다고 한다.

 

[삼장사]

대원사 계곡 입구에 탑동(塔洞)이라 부르던 삼장사지(三壯寺址)가 있다. 들 가운데 있는 이 탑은 신라시대 석탑으로서 부재(部材)만 흩어져 있던 것을 1989년 당국에서 복원하였다. 삼장사가 번창했던 시절에는 스님이 수백 명이고 신도와 과객까지 합쳐 천 명이 넘었다. 주지 스님이 양식 걱정을 하면서 고심하던 어느 날 풍골이 뛰어난 도승 한 분이 찾아와서 주지 스님 보고 "무슨 걱정이 있느냐"라고 묻기에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더니, "그렇다면 절 앞에 돌무더기 세 개를 모으면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도승이 가고 난 뒤에 살펴보니 절 앞 길가에는 돌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주지는 곧 공사를 착수하여 수백 명이 달려들어 돌무더기 모아서 사흘 만에 일을 마치게 되었다. 일이 끝나자마자 뜻밖에도 큰불이 나절은 전부 소실되고 말았다. 절이 불타서 없어졌으니 찾아올 손님이 없어지고 말았는데 지금도 평촌 앞들에는 돌무더기만 남아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삼장사에 묵었던 한 손님이 어느 날 밤 죽었다. 누구인지도 모르고 알릴 곳도 없고 하여 절에서 갖다 묻어야 하겠기에 주지 스님이 절 머슴을 시켜서 "산에 갖다 묻으라."라고 하였다. 때마침 겨울철인데 눈이 하얗게 산야를 덮고 있었다. 머슴이 막상 시체를 지고 나서 보니 난감하여 갈 곳을 모르다가 아무 데나 묻어야 하겠기에 양지쪽을 찾아 나서, 지금의 석남리 괴음정 뒷산에 눈이 녹아 있는 곳에 시체를 묻고 돌아갔다. 그 후 며칠 뒤에 어떤 지관(地官)이 명산을 찾아다니다가 이곳을 지나면서 명당이 있겠다. 싶어서 그곳에 올라와 보니 당혈에 누군가가 묘를 써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 혈은 시체를 엎드려서 묻어야만 하는 것인데 그것까지야 어찌 알았겠느냐 싶어서 묘를 파보았다. 얇게 묻은 묘라서 쉽게 파볼 수 있었는데 보니까 시체가 거적에 쌓여서 엎드려 묻혀 있었다. 절 머슴이 하기 싫은 일을 하다 보니까 그냥 거적에 싼 채로 아래위 구분 없이 묻은 것이 엎어졌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는 지관이 "좋은 자리는 임자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떠났는데 그 후손은 합천 갑골에 사는 이 씨로서 발복을 하여 잘살고 있다한다.

 

[덕산사 (내원사)]

덕산사(구.내원사)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큰 명당(明堂)이라고 전해온다.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약 12km 내려오면 문득 산줄기는 멈추고 좌우에서 흘러온 계곡이 합해지면서 명승의 터전을 이루고 있다. 명당에 큰 절이 있는지라, 각 지방에서 찾아오는 탐방객들이 줄을 이어 혼잡을 이루었다고 한다. 절 안 밖에서 분비는 인파의 소란스러움을 절에서 감당하자니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고 특히나 수도승에게는 큰 방해가 되었다. 이에 주지 스님은 "어떻게 하면 소란을 막을 수 있으며 또한 외부의 사람을 적게 오도록 할 수 있을까"하고 여러 가지 궁리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낯선 늙은 스님이 이 절에 찾아와 주지 스님과 이야기하던 중에 주지 스님이 이 문제를 들어 걱정하였다. 그랬더니 그 노승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기를 "그런 일은 걱정할 것이 못 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주지 스님이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가?"하고 재차 물으니 그때 노승은 앞에 보이는 남쪽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말하길 "그 봉우리 밑까지 길을 내고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다리를 놓으면 해결될 것"이라고 하고 홀연히 떠났다. 주지 스님은 노승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수도승들이 총동원되어 개울에 통나무로 다리를 놓고 봉우리 밑까지 길을 내고 난 다음 모두 모여서 쉬고 있는데 돌연히 고양이 울음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소리를 듣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무슨 징조나"고 수군거렸다. 그 후 풍수설에서 해명하기를 앞에 있는 봉우리는 고양이 혈이고 절 뒤 봉우리는 쥐 혈인데, 여기 길을 내고 다리를 놓으니, 고양이가 쥐 혈에 찾아가서 쥐를 잡아먹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에 그렇게 많이 왕래하던 사람들도 점차로 줄어들어 스님들은 조용한 가운데 수도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뜻밖에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서 절은 전부 불타버리고 말았다.

덕산사가 불탄 연대는 500여 년 전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때 절에는 삼장사라고 하여 세분의 장사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절이 불타고 있을 때 이들 장사 스님이 세 곳 개울에서 커다란 나무통으로 물을 길어 쏟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왼쪽에서 길어 쏟는 물은 오른편 개울에 떨어지고 오른편에서 쏟는 물은 왼편 개울에 떨어지며 앞에서 쏟는 물은 뒷산 봉우리에 떨어져 결국은 불길을 잡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화재를 인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천재라 하였고 먼저 말한 풍수설에 따라 풀이했다. 그리고 그 당시 이 절에는 개울 가까이에 장군수(將軍水)라고 하는 약수가 있었다. 이 약수를 마신 많은 스님 중에서 세 사람이 장사가 되어 상상도 할 수없는 괴이한 힘을 얻게 되었는데, 절이 타서 없어지고 대중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진 후에 큰 바위를 들어 덮어두고 떠났다 한다. 이 바위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지리산 세 탑]

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지리산에 세 탑이 있는데, 대원사 탑이 동탑, 법계사 탑이 중앙탑, 화엄사 삼층탑이 서탑이라고 한다. 기이하게도 연 2회씩 세 탑에서 나온 상서로운 빚이 허공에서 만나 오색 무지개 빛을 휘황하게 발산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 세 탑의 사리가 모두 부처 한 몸에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탑에 서광이 비치고 항내가 경내를 진동시켰다고 하며 몸과 마음이 맑은 사람은 연못에 비친 탑 그림자 속에서 탑 안의 사리를 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