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금서 지역 전설,설화]
-. 설애대
산청에서 경호강 다리를 건너면 금서면이다. 면 소재지인 매촌에서 갈라지는 지방도 59호선이 농공단지를 지나고 나면 길이 굽어지는 오른쪽 언덕에 설애대(雪艾臺)라고 쓰인 바위가 서있다. 원래 이름은 병풍바위인데 바위에 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곳 신촌의 파평 윤씨 가문에서 창녕 조씨를 며느리로 맞은 집이 있었다. 시어머니가 병이 나서 구환을 하는 중에 쑥국을 원하는데 때는 겨울이라 눈이 하얗게 뒤덮인 산야에서 쑥을 구할 길이 없었다. 애를 태우던 며느리 조씨가 산과 들을 헤매다가 마침 이 곳 바위 밑에 이르니 눈이 녹은 곳에 쑥이 파릇파릇 돋아나 있었다. 그것을 캐어다가 쑥국을 끓여드려서 마침내 병이 낫게 되었고 인하여 훗날 효부비를 세우고 윤씨 집안에서 설애대라고 새겼다.
-. 문화 류씨와 호랑이 이야기
밤머리재가는 길에서 더 안쪽으로 가면 수철골과 안심골이다. 마을 뒤쪽에 안심사(安心寺)와 여러 절이 있었던 절골로서 6.25 전까지는 마을이 있었다. 여기서 줄곧 가면 정상부 수리덤이라는 바위덤을 올라서 왕등재로 통하게 되는데 그 전망이 아주 좋아서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수리덤 밑에는 열 평 정도의 동굴이 있는데 그리 오래되지 않은 때에 기이한 일이 있었다. 다섯 살 아이를 집에 혼자 남겨두고 부모가 일하러 간 사이에 혼자 놀던 아이가 해질녘에 집에서 10리나 떨어진 골짜기로 올라가는 것을 마침 소먹이는 동네 아이들이 보고 "어디를 가느냐"고 물어도 대답 없이 혼자 산길로 올라가더라는 것이다. 오후 늦게 모내기를 마친 부모가 집에 와보니 아이가 없어서 찾던 중에 소먹이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두워진 밤에 이웃 사람들도 같이 나서서 찾는데 지척을 분간 못할 산골에서 횃불을 들고 징을 두드리면서 아이를 부르고 찾아보았으나, 횃불도 다타서 도리없이 내일 밝을 때 찾기로 하고 되돌아왔다. 앞서 이 근처 마을에서는 호랑이에게 물려간 사람이 여럿이고 대낮에도 소먹이 간 송아지를 물고 간 일이 있는 터에 내려 오는 마을 사람들은 공포심이 대단하여 누구도 앞쪽과 뒤쪽에 서지 않으려고 하므로 아이의 부모가 앞뒤로 서서 하산하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부모는 재너머 삼장 유평에 용한 점쟁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날이 밝기도 전에 나서서 찾아가서 물어보니 "죽지는 않았고 곧 찾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갔던 길을 돌아오면서 아이가 있는 30m 지점을 통과하였으나 알 리가 없었다. 마을에서는 날이 밝자 총출동하였다. 그 중 엽총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총을 들고 찾아 나섰다. 수리덤 아래까지 사방으로 흩어져 찾던 중에 한 사람이 부들부들 떨면서 숲속에서 달려나와 "저 곳에 옷이 나무 가지에 걸려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가보려고 하지 않았다. 드디어 엽총으로 공포탄를 쏘았더니 꽝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아버지가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가 보니 풀을 뜯어 둘레를 치고 혼자서 울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이를 부동켜 안고 나오는데 털끝 하나 다친 데가 없이 온전했었다고 한다. 집에 데리고 와서 "누구와 같이 갔느냐"고 물으니 "할아버지와 같이 잤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와 아버지는 문화 류씨(柳氏)였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선비가 과거 보러 한양으로 가는데 해질 무렵 큰 산을 넘게 되었다. 가다가 보니 뜻밖에 큰 호랑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길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선비가 놀라서 "내가 과거 보러 가는 길인데 무엇 때문에 나를 해치러 하느냐'고 꾸짖으니 호랑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입만 벌리고 꾸벅꾸벅 애원하는 것 같이 보였다. 이에 선비가 이상해 여기고 입 속을 들여다보니 호랑이 목구멍에 여자의 비녀가 걸려 있었다. 선비는 알아차리고 옷소매를 걷어 입안에 팔을 넣어 비녀를 뽑아주었다. 호랑이는 금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여 고맙다는 표정을 짓고 사라졌는데, 그는 무사히 과거를 보고 돌아왔다. 그 선비의 성이 문화 류씨(柳氏)였고 전하는 말로는 그 일 이후로 문하 류씨는 호환(虎患)을 당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이 마을에 이야기가 전해온다.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신촌에 살았는데 하루는 부부가 일하러 나간 사이에 다섯 살 난 딸아이가 혼자서 집을 나가 버렸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갈 곳이라고는 산 밖에 없었는데,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으므로 일하고 돌아온 아이의 부모가 찾아 헤매는 통에 온 동리 사람들이 알게 되어, 여러 패로 나누어서 산을 뒤져보았으나 어두워 찾을 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돌아와서 밤을 뜬눈으로 지낸 부모와 동네 사람들이 또 다시 찾아 나섰는데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골짝을 헤메다가 10리쯤 떨어진 계곡 소나무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찾아 돌아와 보니,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다만 신발이 없어졌는데 그것은 뒷날 그곳 근처의 고깔바위 위에 벗어놓은 것을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씨의 처인 아이의 어머니 성이 문화 류씨였다고 한다.
-. 당너더렁
수철마을에서 1 km쯤 올라가면 널따란 큰 바위가 있고 그 남쪽에 “당너더렁”이라는 너덜이 있다. 옛날 이 너덜 가운데 당집(무속 신의 집)이 있었는데 무당들이 신굿을 하던 곳으로 왜정시에 철거되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성(城)재가 있는데 기록상의 독녀성(獨女城)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성재너머 마을 이름이 외고개(獨城)인 것으로도 입증될수있다. 이곳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성을 쌓을 때 마귀 할멈이 절골의 형제바위를 말바위에 싣고, 멍바위를 머리에 이고, 당너더렁을 치마에 싸고 성 쌓는데 가는 도중에 절골쯤 왔을 무렵에 이미 전쟁에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말에 실었던 형제바위 두 개를 절골에다 내려놓으니 양쪽 형제암이 되었다. 또 행여나 쓰일까하고 그 멍바위를 이고, 너드렁 돌을 치마에 싼 채로 수철 뒤에까지 왔는데 패전한 것을 보고 치마에 싼 돌을 그 자리에 버리니 당너더렁이 되었다. 그리고 머리에 인 돌을 내려놓고 참았던 소변을 그 바위에서 보았더니 그 자국이 지금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고 한다.
-. 구형왕릉
구형왕릉으로 알려지기 이전에도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일들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구가 이 능 돌을 헐고자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뇌성벽력이 일시에 일어나 왜구가 혼비백산하였다고 한다. 또 마을의 무지한 노파가 능 앞을 지나면서 혼잣말로 "왕손도 없고 향사도 영원히 끊어졌으니, 왕이 본래 덕이 없었는가 보다"고 하자 왕릉에서 바람이 일어서 노파를 언덕에 떨어져 죽게 한 일도 있었고, 어떤 사람이 능역에 조상의 시신을 암장(暗葬)했더니 그 조상이 꿈에 현몽하여 말하길, "왕이 나에게 내린 벌이 무겁다. 빨리 파내라"고 해서 급히 파보았더니 시신의 갈비뼈가 부러져 있었다한다.
깊은 산 속인데도 칡덩굴이 근처까지 뻗쳤다가 묘역에서는 저절로 돌려 뻗어나가며, 새들은 능 위를 날지 않고 능 위에서 쉬지 않으며, 낙엽조차도 바람에 날려 능 밖으로 쌓이는 것을 볼 수 있다.
-. 쌍효마을
신아리 쌍효 마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어린 쌍둥이를 둔 과부가 살고 있었다. 어려운 살림에 품팔이하다가 병이 들어 눕게 되었는데 점점 병이 더하여 사경에 이르게 되었다. 어린 쌍둥이는 철없이 병석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어 죽창문이 후딱 열리게 되었다. 그러니 어린아이가 본능적으로 문을 닫으려고 문틈을 집고 문을 잡아당기려 하자 또한 바람이 확 불어서 문이 쾅 닫히면서 그때 문틈에 아이의 손이 끼여서 피가 흐르게 되었다. 아이가 울면서 다친 손가락을 어머니 입에 대고 호호 불어 달라고 하니 아이 손가락에서 흐른 핏방울이 어머니 입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생명이 가물가물하던 아이 어머니가 갑자기 눈을 뜨고 정신이 돌아왔던 것이다. 그것은 사경을 헤맬 때 단지(斷指)를 해서 생명을 구한 옛 효자들의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한 사실로 어머니는 소생하게 되고 그 천진한 아이들의 효심은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하여 마을 이름을 쌍효라고 불렸다.
-. 민진사 인심
옛날 장동 마을에 민진사(閔進士)가 있었다. 살림이 유족하여 천석부명(千石富名)을 누렸는데 후덕하여 원근에 소문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어느 해 겨울에 언제나 끊이지 않는 과객들 중의 한사람이 찾아와서 머무르게 되었다. 다른 과객들처럼 행색이 초라하였으나 이야기가 조리 있고 학식도 제법이었다. 사랑채 아래윗방에 각각 앉아서 밀 창문 사이로 하여 밤늦도록 이야기가 이어가다가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주인은 따뜻한 방에 두터운 비단 이불을 덮고 과객은 윗방에서 얇은 무명이불을 덮고 눕게 되었다. 민진사는 마음속으로 "과객이 먹는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옷 또한 얇은데 이불마저 두껍지 못하니 얼마나 춥겠는가"하는 생각에 쉽게 잠이 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윗방의 과객을 향하여 아랫방 자기 옆으로 건너오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과객이 듣던 대로 후덕한 집인 줄은 알았지마는 차마 주인 옆에 가서 자기는 미안하여 극구 사양하였다. 두세 차례 주인이 재촉하므로 과객이 말하기를 “이(虱) 때문에 갈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과객의 옷에 기생하는 이가 주인에게 옮길까 염려되어서 옆으로 갈 수 없다고 한 것이었다. 그러니 주인이 말하기를 옷을 벗어 버리고 내 옆에 와서 자면 될 것 아니냐고 하여 부득이 옷을 벗고 맨몸으로 주인 옆에 가서 따뜻하게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날이 밝아오는데 주인이 과객을 깨워 일으켜서 자기의 명주 바지 저고리를 입히고는 더 밝기 전에 산너머 마을에 가서 아침밥을 얻어먹고 가라"고 하였다. 평생 입어보지 못한 명주옷을 두툼하게 얻어 입은 과객은 주인 민진사가 하라는 대로 일찍 그 집을 나서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러자 민진사가 내당을 향하여 하인을 불러서는 "옷을 한 벌 가져오라"고 했다. 전갈을 들은 민진사 부인이 새 옷 한 벌을 들고나오자, 민진사가 하는 말이 "엊저녁에 자고 간 과객이 옷을 훔쳐 입고 가 버렸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이 말하기를 ”어떻게 임자는 인심을 얻고 나는 인심을 잃으라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민진사가”그게 무슨 말이요?"하니. 부인이 “이왕 옷을 주었으면 아침밥이라도 따뜻하게 먹어서 보내야 안채 인심도 나무라지 않을 것 아닙니까”하여 내외간에 서로 보고 웃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상사바위
임천강을 따라 올라가면 자혜리에 이르고 오른쪽 개천을 따라 들어가면 방곡에 이르게 된다. 묵은 터 쌍재기슭의 개울에 상사바위가 있다. 바위 아래에는 깊은 소가 있었는데 옛날 양반집 처녀와 상민의 총각이 서로 사랑하다가 처녀 집 부모의 반대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총각이 바위에서 떨어져 죽어서 생긴 이름이다. 그런데 그 총각의 원혼이 뱀으로 변신하여 처녀를 휘감고 눈물을 받아먹다가 끝내 그 처녀도 죽어 뱀이 되어서 바위 주변에 뒤엉켜서 괴상한 일이 일어나므로 이를 달래기 위하여 무당을 불러서 굿을 했다고 전하며 주변 암반에 뱀이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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