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등 팔방고증(新燈 八坊考證)>
新燈里의 제1坊은 新羅때 赤村縣인데 高麗에 이르러 丹溪라 개명했다. 시내 동쪽은 곧 都坪이니 이곳이 바로 丹溪縣의 옛 자리로 지금은 民田이 되어 곡식이 무성하다. 냇물은 黃梅山화에서 발원하여 그 아래로 흐르니 또한 이름을 丹溪라 한다. 시내 가운데 우뚝한 바위가 있어 妓巖이라 하는데 그 위에는 구멍이 벌집처럼 나 있으니 이는 日傘을 꽂는 구멍이다. 이곳이 縣이었던 당시 使臣으로 오는 이들이 항상 기생과 더불어 日傘을 꽂아 햇볕을 가리고 바위위에 놀면서 歌舞를 즐겼으니 이로 인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제 2坊은 곧 陽前이니 故 正言 李昌年이 살던 곳이다. 그 아들 安忠은 文科에 급제하고 또 發英試에 합격하여 벼슬이 正言에 이르렀다. 그 아들 愼孝는 監司이고 아들 祿崇은 宗簿寺正이며 아들 彭壽는 縣監으로 1男 1女를 두었는데 사위가 바로 柳夢祥이다. 夢祥의 高祖 伯逵는 工曹參議이고 曾祖 宏은 禮賓寺 少尹으로 許邕의 손자인 中郎將 㬂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線을 낳았는데 武科에 급제했다. 線은 司諫 金克用의 딸에게 장가들어 秀榮을 낳았는데 生員으로 곧 夢祥의 부친이다. 夢祥은 자식이 없어 伯逵의 曾孫 鳳山郡守 懿의 손자인 沃을 後嗣로 삼았다. 沃은 兵馬節度使 鄭世弼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元春 亨春 重春 有春이다. 有春은 武科에 급제하여 세 고을을 다스렸고 또 元從功臣으로 參判에 추증되었다. 柳氏의 여러 자손들은 모두 丹溪서쪽에 거주하니 곧 제3 坊이다.
縣의 창고가 있는데 창고 담장 밖에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으니 곧 淸心亭이다. 정자는 단계를 굽어보고 있으며 시내 위에는 또 望仙橋가 있다. 이 마을에는 또 判中樞 尹汴의 터가 있는데 權太師 18세손인 典獄署 奉事 金錫이 中樞의 外孫으로 인하여 거주하였다. 그 아들 時準은 參奉이고 손자 運은 尙衣院 別提인데 이가 4남을 낳았으니 世眞 世春 世仁 世倫이다. 世春은 別座이고 世仁은 軍器寺 判官이며 世倫은 生員이다. 世倫은 천품이 진실하고 操行이 엄정했으며 일찍 부친을 잃고 모친을 섬김에 지성을 다했으니 甘旨의 봉양과 定省의 근면함은 참으로 옛날의 孝子에 비하여도 뒤 짐이 없었다. 그 喪을 당해서는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거처하면서 비록 한추위 무더위에도 喪服을 벗지 않았고 태풍과 장마에도 省墓를 폐하지 않았으며 3년을 血泣하면서 한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미음만 계속 먹어 야윈 몸에 뼈만 앙상하더니 온갖 병이 겹쳐 寸步도 걸을 수 없게 되자 항상 여막 밖에 거적자리를 깔고 묘소를 바라보며 부복하여 종일토록 號哭하면서 執喪을 더욱 굳게 하여 조금도 해이함이 없었다. 再朞가 겨우 지나자 병이 더욱 깊어져 호흡이 가물거리고 목숨이 頃刻에 달리니 兄弟와 宗族및 이웃의 長老들이 모두 모여 눈물을 흘리며 肉汁을 권했다. 이에 말하기를 ‘禫服을 몸에 입고 있으니 차마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끝내 권유를 따르지 않다가 인하여 세상을 떠났으니 누가 感泣하지 않겠는가!
그 생전 봉양과 사후 장례의 정성을 보건대 한결같이 天性에서 나왔으니 무덤가 잣나무를 말라 죽게 한 孝誠과 피눈물을 흘린 古人의 정성도 거의 이보다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兄弟 4 이 한 마을에 살면서 형을 嚴父처럼 섬기고 아우를 사랑하여 재물을 사사로이 함이 없었으며 항상 단란하게 지내면서 서로 다투는 허물이 없었으니 友愛가 돈독했다. 나이 弱冠도 못되어 지향하는 바가 이미 정확하여 남명 조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고 덕계 오선생과 從遊했으니 善을 좋아하는 마음이 지극했다. 소시에 마을노인에게 반년 동안 修學했는데 그 사람이 죽음에 자식이 없자 즉시 찾아가 그 喪을 한결같이 禮制를 좇아 치렀으며 初喪부터 葬事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떠나지 않았고 또 상복을 지어 입었으니 그 初學의 은덕을 잊지 아니함은 사람 마음을 감동시켰다. 일찍이 성현들의 경전을 읽으면서 꼿꼿하게 端坐하여 밤새도록 정진했으니 그 행실의 돈독함과 학문의 노력 또한 古人에게 부끄러움이 없었다. 아! 부모에게 효도함이 이와 같고 형제에게 우애함이 이와 같으며 善을 좋아함이 이미 이와 같고 학문에 독실함이 또 이와 같으니 그 마음가짐과 일을 처리함이 참으로 一鄕의 善士에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살아서는 당대의 薦擧를 입지 못했고 죽어서는 후일의 旌表를 무릅쓰지 못했으니 이것이 바로 鄕人들이 그 사람을 追想하여 항시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므로 그 始末을 기록한다.
判官 世仁의 遺蹟은 吳正言이 지은 墓誌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判官은 二子를 두었으니 瀹과 濤이다. 瀹은 일찍 죽었고 아들 克亮을 두었으니 호걸스럽고 의리를 좋아하여 외조부 趙大笑軒의 기풍이 있었으며 英陵 參奉을 제수했다. 潗 濤 濬모두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潗은 壬子年 문과에 급제했고 濤와 濬은 癸丑年에 등과하여 형제 2인이 2년 사이 아울러 대과에 합격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그 후 潗은 寧海府使되었고 濤는 左承旨에 이르렀으며 濬은 光州牧使로 부임했으니 모두 벼슬이 德에 차지 못했다. 寧海府使는 黙翁, 승지는 東溪, 광주목사는 霜巖이라 自號했으니 상암의 實錄은 趙龍洲가 지은 墓碣文에 상세히 적혀있다. 영해부사의 아들 克鼎은 무과를 공부했는데 불행히 일찍 죽었다. 승지는 두 아들 克重 克斅를 두었는데 극효는 일찍 죽고 극중은 진사시에 합격했다. 부모를 섬김에 안색을 살펴 진심으로 봉양하여 승지가 매우 사랑했으나 승지보다 먼저 죽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광주목사는 세 아들 克履 克有 克謙을 두었는데 모두 儒行을 갖추어 당세에 이름이 났으며 극유는 太學에 올라 繕工監 參奉을 지냈다.
제 4坊은 晋山 柳玕의 5 世孫 副正 承潤의 거주지이다. 아들 莠는 從仕郎으로 司涓이고 그
아들 從平은 龍驤衛 副司直이며 그 아들 淵은 兵馬虞候이고 그 아들 萬禎은 長鬐縣監이다. 현감은 두 아들 宇와 宙를 두었는데 모두 忠順衛 禦侮將軍이다. 宙는 무인인데도 부모상을 치를 적에 한결같이 禮制를 따랐으니 사람들이 모두 칭송했다. 宇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報春은 임진란에 晉陽에서 전사했고 그 형 載春은 단아하고 화락한 사람이었으니 만년에 武陵으로 이주하여 자못 煙霞를 사랑하는 버릇이 있었다. 慶春의 아들 爟은 무과에 급제했는데 소시부터 雄健함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제5坊은 바로 水淸洞이니 생원 權克行의 거주지 이다. 극행의 자는 士中인데 그 조부 文著는 安分堂의 둘째 아들이다. 先世의 터전이 있었으므로 丹溪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 부친 深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 이주하여 三子 克行 克平 克明을 두었다. 극행은 소시부터 文名이 있었는데 丁酉年 난리 중에 大邱지방을 떠돌다가 方伯의 명으로 籌邊樓 上梁文을 지었다. 方伯은 바로 西平君 韓浚謙이었는데 크게 稱賞을 더하니 才名이 더욱 자자하였다. 그러나 등과하지 못하고 또 자식이 없었으니 이에 悲命賦를 지었다.
제6 坊은 바로 杜谷이니 權參議의 別莊이다. 鄭思迪 또한 이 마을에 거주했으니 무과에 급제했다.
제 7 坊은 島內이니 곧 柳池의 庶子 斗星의 거주지이다. 그 손자 得春 彦春은 모두 무과에 급제했다.
제 8 坊은 碧溪驛이니 碧溪의에 있어 이름을 붙였다.
丹溪의 淸心亭아래에 節婦門이 있는 節婦는 存齋 郭䞭의 딸로 柳文虎의 妻이다. 權東溪가 그 문에 적기를 ‘아버지와 아들 딸이 忠 孝 節에 殉死하니, 한집안의 三綱 지킴 萬古의 본보기로다.’ 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度子禮의 銘에 비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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