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勿禮里入坊考證>

法勿禮里는 寶巖山 아래 있는데 중간에 시내가 있고 마을은 東西로 나뉘어 있다. 이곳은 吏部典書 허옹(邕)이 살던 곳이다. 邕은 高麗末 時政이 장차 어지러움을 보고는 朝廷에서 용납될 수 없음을 알았으니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비로소 丹溪의 시내위에 자리를 잡았다. 이에 집을 지어놓고 絶句詩를 읊어 이르기를,

“世間耳目事章章 一有眞言謂發狂 卷却談王三寸舌 丹溪湥處置茅堂

(세간이목사장장 일유진언위발광 권각담왕삼촌설 단계돌처치모당)

世間의 耳目들은 일마다 두려우니, 한번 진실한 말하면 미쳤다고 한다네.

王道를 애기하던 세치 혀 다물고는, 단계 물흐르는 자리에 초당을 지었네.“라고 하였다.

그 후 法勿禮里 寶巖山 아래로 이주했으니 이는 公이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자 함

이다. 이에 革命의 때를 당하여 새 왕조를 섬기지 않고 志節을 숭상함이 어떠했겠는가!

許邕의 아들 少遊는 掌令이 되어 直諫하다가 조정에 미움을 사 開城少尹으로 좌천되었다. 洪武 癸亥年(1383)에 母親喪을 당하자 3년 동안 侍墓하면서 喪服을 벗지 않았고 항상 枕席에 엎드려 주야로 號哭하였다. 당시 倭寇가 쳐들어왔다가 또한 그 孝誠에 감동하여 서로 경계하면서 감히 핍박하지 않기를 柳下惠의 무덤같이 하였다. 조선에 와서 그 정려를 내렸는데 勝覽에는 이른바 許季道라 되어있다. 이는 곧 少遊가 改名한 이름인데 당시 기록하는 사람이 이를

살피지 못한 것이다. 아들은 우(喁)로 中郎將이고 손자는 成孫으로 生員이다.

典書 張綱은 許典書의 사위다. 이곳에서 살다가 딸 하나를 얻어 시집보내니 商山 金後이다. 호는 丹丘齋요 官은 直提學에 이르렀으나 시류에서 勇退함으로서 禍를 면하였으며 그 뜻을 한 수의 絶句에 부쳤다.

公의 벼슬이 그 德에 미치지 못했고 壽도 짧아 겨우 33세에 歿하였다. 公의 아들은 張인데 나이 겨우 20에 登科하여 24세에 歿하니 하늘이 주었다가 빼앗은 소이를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아들은 3兄弟로 첫째 克用은 登第하여 벼슬이 司諫에 이르고 둘째 利用은 登第하여 持平이고, 셋째 貞用은 登第하여 承文院博士이다. 貞用의 아들은 둘인데 光礪, 光範이다. 모두 司馬에 오르고 光礪의 아들 達生은 벼슬이 持平이며, 光範의 아들 守敦은 호가 遠復齊로 兵曹正郎이다. 守敦은 나면서부터 미남으로 일찍이 翰林으로 있을 때 임금께서 항상 美翰林이라고 칭찬하였다. 임금의 총애가 이와 같았는데도 승진 발탁이 못된 것은 결국 하늘의 뜻이다. 아우 益敦은 進士로 自號 治田堂이다. 詩를 지어 읊기를,

“胸懷何淡淨 卜築更幽湥 白石長年科 玄琴太古音

園中侵藥畝 江上洗塵襟 眞趣渾如此 丹墀肯獻箴

(흉회하담정 복축경유돌 백석장년과 현금태고음

원중침약무 강상세진금 진취혼여차 단지긍헌잠)

마음에 품은 생각 어찌 그리 淡白 한가, 그윽한 계곡에 다시 집을 지었다네.

白石은 長壽할 식량이요, 玄琴은 太古의 소리로다.

정원에서 약초밭 김을 매고, 江上에서 먼지 옷깃 씻는다네.

참된 흥취 물 흐르는 것과 같으니, 무슨 일로 대궐에 獻策하라!“ 라고 하였다.

遠復齊의 아들은 넷인데 澂,沖,湛,濂이고, 治田堂의 아들 다섯은 氵賀,灠,潚,滾,浚이다. 沖은 10세전에 글재주가 크게 뛰어나더니 14세에 漢城試에서 鼎字賦로 壯元하고 또 密陽院樓에 4韻을 題하였다. 湛역시 文章으로 이름이 나고 두 번이나 文科 壯元을 하였으나 모두 忌諱사항에 저축되어 물러나고 말았다. 임종시 막내 아우인이 濂이 울면서 銘旌을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하고 청하였더니 혼절했다가 다시 깨어나 소리 내어 1句를 읊기를,

“靑年壯志驚神鬼 白首虛名愧古今 (청년장지경신귀 백수허명괴고금)

젊을 때 큰 포부 귀신도 놀랬건만, 늙어서 헛된 이름 고금에 부끄럽다.” 하고는 逝去하니 호는 汲古齊이고 文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濂은 文科에 올라 翰林學士로 있다가 外職인 韓山郡守를 지냈다. 일찍이 물가에 집을 지어

挹虛亭이라 편액하고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호를 三休堂이라 하였다. 氵賀는 일찍이 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곧 科擧를 포기하고 대청의 섬돌아래 세 그루의 梅花를 손수 심고 三梅堂이라 하였다. 공은 소시에 矗石樓 연회에서 시를 읊었는데,

“角聲三動小車來 朱戶靑窓次第開 粉面低睂聯席坐 珍羞厭口八盤堆

歌警谷鳥黃莊葉 鼓起沙鷗白點苔 盡日偷閒猶未足 更看明月照樓臺

(각성삼동소거래 주호청창차제개 분면저미연석좌 진수염구팔반퇴

가경곡조황장엽 고기사구백점태 진일투한유미족 경간명월조루대)

뿔피리 세 번 울려 작은 수레 타고오니, 붉은 문 푸른 창이 차례로 열리구나.

화장한 여인들 눈썹 깔고 자리 연해 앉았고, 진귀한 음식 배불리 먹고도 쟁반에 쌓였구나.

노래 소리에 꾀꼬리도 놀라 잎 속으로 숨어들고, 북소리에 갈매기들은 모래밭에 점점이 앉아있네. 하루 종일 놀아도 오히려 부족하여, 다시 바라보니 명월이 축석누대 비추는구나.“

라고 하였다.

濂은 일찍이 奇才를 타고 났으며 특히 詩에 능했으니 擇木知幽鳥라는 詩로 及第하였다. 浚은

은 進士가 되었으나 大科를 포기하고 호를 三足齊라 지어 하는 말이 "書는 姓名을 기록하면 足하고, 名은 進士에 들면 足하며, 食은 죽을 이을 정도면 足하다"고 하였다. 晩年에 新安江위를 노닐면서 "江山을 모두 後人에게 부치노라"라는 詩를 지어 읊고 얼마 못되어 別世하였으니 사람들이 詩로써 조짐을 보인 것이라 하였다. 一家의 형제 9인중 8文章이라 칭하는데 혹은 불행하여 短命하고 혹은 재능이 있어도 낙방하고 혹은 登第하였으나 顯達하지 못했으니 “文章은 壽命과 榮達을 싫어한다.”는 속담이 참으로 빈 말이 아니다. 三休堂든 아들이 4형제인데 勉之, 勖之, 勵之, 養力之이니 모두 일찍 죽었다. 養力之는 지조가 질박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읊은 詩에 이르기를,

“爲樂都緣欲樂心 樂心何事反勞心 勞盡心來成一樂 不如無樂只安心

(위락도연욕락심 락심하사반로심 로진심래성일락 불여무락지안심)

즐거움은 마음이 즐거워야 하는데, 즐거운 마음 무엇 때문에 근심일까?

마음 고생 다한 다음 즐거움이 이루어지니, 즐거움 없는 편안한 마음만 못하다네.“

라고 하였다.

三足齊의 아들은 3형제인데 景訥, 景訒, 景謹이다.

景訥은 일찍이 文才가 있어 연이어 鄕試에 세 번이나 합격하였으나 會試에는 실패하고 돌아오는 즉시 발분하여 붓을 던지고 癸未(1583) 武科에 登第 벼슬이 務安縣監에 이르렀다. 宣祖때 宣傳官으로 있으면서 임금의 총애로 누차 상을 받았는데 하사받은 諺解小學은 그 자손들이 상자 안에 寶藏하고 있다. 아들은 하나인데 이름이 應虎한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하였고 겨우 10세에 季父인 大瑕齋를 따라 嚴惠寺에 놀러 가서 지은 시가 있어 이르기를,

“曉到嚴惠寺 寒鐘第一敲 餘聲渡江水 眠鶴起松梢

(효도엄혜사 한종제일고 여성도강수 면학기송초)

새벽에 도착하니, 처량한 종소리 제일 먼저 올린다.

소리 남아 강물을 건너가니, 졸던 학이 소나무 가지에서 일어난다.“라고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하였으며 傳誦하였으며 癸卯(1603) 武科에 登第하여 벼슬이 僉正에 이르렀다.

아들은 複文으로 庚寅年에 낳으니 大瑕齋가 기뻐하면서 僉正을 불러 이르기를 "항상 네가 武科로 나간것이 恨이었는데 이번에 네가 生男을 하니 天幸으로 우리 가문의 경사로다. 공자와 석가가 친히 안고 와서 庚寅年에 낳게 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느냐. 庚寅은 屈原이 태어난 해인데다가 더욱이 庚자는 호랑이니라. 周易에 이르기를 “豹虎는 문채가 화려하다.”하였고 黃山谷 詩에 가로대 “謝公의 문장은 豹虎문채 같으니, 지금 어린 손자 몸에 찬연히 박혀있네."라고 했다. 우리 先世의 호표같은 문장을 장차 네 아들이 復舊하여 반듯이 문채가 찬연할 것이다. 그 이름을 複文이라 하고 字를 克彬이라 하라" 하니 僉正공은 季父의 가르침대로 기쁘게 따랐다. 克彬이 장성하면서 매우 총명하여 한번 듣고 본 것은 그 때마다 다 암송하고 때때로 입을 열어 시를 읊으면 많은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僉正공이 항상 叔父의 가르침대로 勤勉하니 克彬도 또한 이를 본받아 스스로 학과에 힘써 先世의 業미인 文을 거의 回復할 것 같았다. 그러나 세번 科擧에 응시하여 끝내 한 번도 성취하지 못하고 나이 겨우 40에 卒하여 선세의 업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그 天命이야 어찌 하겠는가?

景訒은 일찍이 文藝를 닦아 누차 과거에 응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늦게야 붓을 던지고 癸卯(1603) 武科에 응시 登第하였다. 공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困窮과 榮達은 모두 天命에 달렸으니 文武科에 등제하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나의 아우 景謹이 일찍이 꿈을 꾸고서 이를 기록해 두었다가 나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조카 應虎와 함께 靑黑色 호랑이 한 마리를 제압하여 그 등에 타고 叔姪이 나란히 큰 골짜기에 들어가 큰 波濤위를 내달리며 의기양양하게 좋아하더란다. 내 아우가 쳐다보고 처음에는 놀랐다가 나중에 기뻐하면서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碧桃紅杏이 머리위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함으로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지금 우리 叔姪이 나란히 같이 虎榜에 합격한 것은 나의 아우가 20년 전 꿈에서 그 징조를 보았던 것이다. 謝良佐가 이른바 몽매간의 일은 바로 성취하지 못하고 초조하게 바라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런 경우를 이른 것인가? 그러나 내 어찌 이로써 榮達이라하여 權貴의 門에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결국은 名利를 쫓는 무리로 전락하겠는가? 이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오두막에서 老年을 한가하게 보내는 것이 나의 初志를 굽히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들은 셋인데 應奎, 應斗, 應翼이다. 應奎는 언변이 좋고 應斗는 詩賦를 잘 하였다.

 

景謹은 어릴 때부터 君子의 學問을 배워 매사에 감히 자신하지 않았다. 일찍이 覺齋 河先生이 門下에서 禮義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으며 南冥 曺先生의 門下에 미치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였다. 그 학문은 經史를 근본으로 하고 古今을 證據하여 論議가 英發하고 風貌가 늠름하여 사람들이 모두 삼가하고 두려워하였다. 조정에서 공의 風儀를 듣고 持平벼슬을 제수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異議를 제기하는 자가 있어 이루지 못하였다. 일찍이 自號를 大瑕齋라 하였다.

진주목사 崔岦을 방문하고 시를 지어 贈呈하였는데 이르기를,

“진주목사 松川은 글이 가장 특출하니, 두 편 詩는 古人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吏民들은 문장이 귀한 줄 모르고, 오직 베푼 은택만을 애기하네.“라고 하였다.

崔牧使가 이 詩를 보고 謝禮하였다. 임진년에 공이 왜란을 피하여 星州에 갔다가 省墓차 三嘉에서 丹城오는 사이 길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賊을 만나 屈하지 않고 殉死하였다.

東坊에 터가 하나 있는데 노래하고 춤추는 누대의 돌계단이 있다.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 府院君이 이 마음에 살았는데 부유하기가 王侯와 같아 그 부인 蔡氏가 매양 가마를 타고 나와 上下 山坂을 누비며 사냥하고 돌아다녔으니 음란한 탕아와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럼으로 지금까지 蔡氏의 姓만 전하고 主君의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집안 다스림이 이와 같았으니 그 성명이 전하지 않음은 당연하다.

제 3坊 岐內는 山陰縣監 柳東成이 살던 곳인데 進士 柳夢禎이 孝子라고 이 坊에 살았다고 하나 모두 전하지 못한다. 또 茂松尹氏가 있었는데 그 先은 文貞公 澤이고 六世孫 左議政 江이 처음으로 丹溪에 살았다. 그 아들 汴은 判中樞이고 그 아들 子榮은 문과로 장원하고 또 重試에 장원하여 또 發英試에도 합격하였다. 그 후 자손들은 서울로 가고 子榮의 형의 아들 濂은 생원이고, 생원의 아들 浚은 진사이며, 진사의 아들은 彦洙인데 또한 진사다. 姜許孫의 사위가 되어 三嘉의 丘坪으로 이거하였다. 아들 佑賢은 禮賓寺直長이고 그 아들 沂은 金慶山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 坊에서 살았는데 喪妻하고 後妻는 아들이 둘인데 景溟은 登武科하고 景洛은 軍器寺奉事다.

제 4坊은 內法勿禮이니 시내 위 골짜기에 암굴이 있고 폭포가 있어 물이 날고 맑아 옛날부터

漱玉泉이라 稱하였다. 10년 전부터 沙鐵이 많이 나와 그것을 캐어내는 바람에 淸流가 혼탁하여 그 害가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미쳤으나 주민들이 이를 금하지 못했다.

제 5坊은 곧 慕禮다. 奉事 尹京洛이 살만한 곳이라고 터를 잡아 이사 온 곳으로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그 자손이다. 그 위 5里 거리에 栗谷寺가 있다.

제 8坊은 大老里로 옛날에 대장부들이 살던 곳인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그 뒤 농사를 짓는 백성들이 밭 갈고 논을 갈면서 간혹 金銀寶貨를 주었다고 하니 人才가 성했던 마을이었던 모양이다. 또한 孝子로 旌表가 있는 사람, 烈女, 貞節의 旌閭를 받은 사람이 각 하나씩이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대로 높은 벼슬아치들이 살던 마을이 틀림없는 것 같다.

<단성 사직제(社稷祭)>
농경문화의 전통은 수천년이상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일년 농사의 풍년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기위해 땅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에게 제를 올리는 사직제가 있다.
산청 단성 사직단(단성면 내원마을 소재)祭는 이 전통을 지역 향교에서 주관하고 지역농협조합에서 후원하여 매년 봄과 가을에 봉행한다. 올해 가을에도 9월 21일(음8월 첫戊일) 단성향교 유림들과 농협직원,마을 주민들 30여명이 이른 아침에 모여 지냈다.
산청군 단성면 내원마을에 소재한 단성 사직단(社稷壇)은 제단 축조 방식이 잘 보존 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경상남도 기념물255호)
조선이후 서울 사직단을 비롯한 전국의 사직단에서 공식적으로 지내던 사직제가, 일제강점기에 민족문화말살 정책으로 중단되었다.  단성 사직단에서는 일제시대에도 지역 주민과 유림들이 일제의 눈을 피해 자발적으로 사직제를 지냈으며, 현재까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타지역에서 보기 힘든 산청 단성의 귀중한 문화자산이다. 면단위(산청 단성면)에서 이런 전통을 끊기지 않고 내려오는게 소중하다. 오랫동안 지켜오는 전통은 현대의 빠른 변화에서도 유지해 나가는 힘이있다. 단성사직단제가 그 예인 것이다.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_ 진주정씨

진주정씨(晋州鄭氏)는 다른 말로 진양정씨(晉陽鄭氏)라고도 한다. 진양이 1995년 진주시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진주정씨로 명명되고 있다. 진주정씨는 신라 건국 6부족의 하나인 진지부의 지백호(智伯虎)를 원시조로 한다. 하지만, 지백호 이후의 계대가 밝혀진 바가 없어 이를 증명할 길은 없다.

진주정씨에는 뿌리가 다른 여덟 계통의 정씨가 있다. 이를 진주8정(晋州八鄭)이라고 한다. 이들은 동성동본이면서도 세계를 달리하는 여러 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를 비롯한 문헌에 따르면, 진주정씨는 12파가 있다고 전하나, 정확한 소목은 밝힐 수 없고 현존하는 계파는 8계통이라고 볼 수 있다. 그중 4개 파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예(鄭藝), 정자우(鄭子友), 정장(鄭莊), 정헌(鄭櫶)을 시조로 하는 4계통이 그것이다.

 

충장공파(忠莊公派)는 고려통합벽상삼한공신(高麗統合壁上三韓功臣)으로 광록대부(光祿大夫)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정예를 시조로 한다. 그 후 계대로 전해 내려오지 않다가 제학공(提學公) 정시양(鄭時陽)에서부터 계대가 확실해 정시양을 기세조로 삼고 있다. 정시양은 고려 문종 때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의 시조는 진주호장(晉州戶長)을 지낸 정자우이다. 그의 6세손으로 고려 현종 때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에 봉해진 정신열(鄭臣烈)을 중조(中祖)로 하는 파(派)와 7세손 정중공(鄭仲恭)을 중조로 하는 파, 8세손인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정보경(鄭普卿)을 중조로 하는 파로 나누어진다.

공대공파(恭戴公派)의 시조는 정장이다. 정장은 고려 말엽에 통정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를 지냈다. 그의 4세손인 정척(鄭陟)은 조선 태종 때 판윤(判尹)을 지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파도 있다.

정헌계(鄭櫶系)의 시조 정헌은 고려 말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둘째 아들 정택(鄭澤)은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어사공파(御史公派)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계통으로 이뤄진 진주정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1명,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59명을 배출했으며, 정척(鄭陟)·정성근(鄭誠謹) 등 2명의 청백리를 배출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총 7만4777가구에 23만85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진주정씨의 갈래와 내력
첫째, 진주정씨 충장공파는 고려 통합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으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영절공 정예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 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정시양을 기세조로 받들고 있다.
정시양의 7세손 정수(鄭需)는 판도좌랑과 좌사간을 역임하고 진양부원군에 봉해졌고, 이로써 충장공파의 가세가 크게 일어났다. 그의 후손 정을보(鄭乙輔)는 정당문학과 도감제조를 역임했으며, 후에 청천군에 봉해지고, 찬성사에 올랐다(공민왕).
숭정대부로 찬성사를 역임했던 정신중(鄭臣重)의 아들 정이오(鄭以吾)는 조선 태종 때의 명신으로 찬성과 대제학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인 정분(鄭?)은 세종과 문종 조에 걸쳐 조정의 중신으로 많은 치적을 남겼고,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나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의 반대파로 몰려 사사(賜死)되었다.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皇甫仁), 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그도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고신(告身)을 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이후 대신과 대간의 빈번한 청죄(請罪)가 계속되었지만, 1년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 사사되었다.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기국(器局)이 있었다. 문신이지만 토목에 조예가 깊어, 세종 말에서 단종 초에 걸쳐 궁궐 조성·축성, 현릉(顯陵, 문종묘) 조성 등에 공헌했다. 그의 사후 영조 때 가서야 김종서, 황보인과 함께 복권되었다(영조 22). 정조 때에는 장흥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고, 장릉(莊陵) 충신단에도 배식(配食)되었다. 순조 때에는 충신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정문을 세웠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진주정씨 충장공파인 정신중, 아들 정이오, 손자 정분 등 3대 묘가 있는 진주시 상대동 고분군에 있으며, 충장공 정분이 배향된 전남 장흥의 충렬사가 있다.

둘째, 은열공파는 고려조에서 호장을 지낸 정자우의 후손이다. 그의 6세손 정신열이 고려 현종 때 천거되어 여러 직을 거친 후 병부상서에 올라 거란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올라 진양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인 선주지사 정임덕(鄭任德)의 아들 정유(鄭愈)와 정손(鄭孫)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부사가 되었던 정천익(鄭千益)은 당시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왔다가 사위인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씨를 재배하여 물레와 씨아를 창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은열공파 정신렬을 제향한 진주 촉석루 내 청계서원이 있다.

셋째, 통정대부로 첨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던 정장을 파조로 하는 공대공파에서는 세종조의 명신인 정척이 뛰어났다. 정척은 교서관 정자를 거쳐 봉상시 주부와 감찰을 지내고 판한성부사. 수문전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세조 때에는 양성지와 함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편찬했다.

정척의 아들 정성근은 성종 때 대마도에 사신으로 갔을 때 대마도주가 문 밖에 나와 왕명을 받지 않자, 두번 세번 독촉하여 왕명을 받도록 했다고 한다. 그는 효성이 지극해 연산군의 단상법(短喪法)을 어기고 3년 상을 치렀고, 성종이 승하하였을 때에도 3년 상을 행하니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려 죽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그러자 그의 아들인 승문원 박사 정주신(鄭舟臣)은 단식으로 목숨을 끊었고, 아우 정매신(鄭梅臣)과 아들 정원린(鄭元麟), 정원기(鄭元麒), 정매신의 손자 정효성(鄭孝成)이 모두 효행이 뛰어나 4대에 걸쳐 6명의 정문이 세워졌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되자, 전남 광양군으로 피란했다가 정착한 정대유(鄭大有)와 그의 아들 5형제의 후손들이 광양지방에 집중 세거하고 있다. 
경기 하남 초이동에는 진주정씨 공대공파 정척의 묘역이 있다.

넷째, 문하시중평장사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던 정헌의 계통에서는 그의 손자 정온(鄭溫)이 청맹(靑盲)으로 유명했다. 그는 대사간을 역임하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눈 뜬 장님을 가장하고 지리산 청학동에 숨어 살았다.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가 수차례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매서운 절개를 지켰다. 태종이 사람을 보내서 칼로 눈을 찌르는 흉내를 내어 보았으나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온의 아우로 고려 말에 감찰어사를 지낸 정택의 10세손인 정경세(鄭經世)는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성리학자인 사계 김장생과 함께 우리나라 예학(禮學)의 주축을 이뤘다. 시문과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우복집(愚伏集)’ ‘상례참고(喪體參考)’ ‘주문작해(朱文酌解)’ 등이 있다.
진주시 사곡에는 우공공파 시조 정온이 귀향하여 조용히 지내고자 지은 우곡정이 있다.

다섯째, 정자우의 후손이며, 고려 때 첨정(僉正)을 지낸 정중공을 파조로 하는 계통에서는 15세손 정기룡이 유명하다. 그는 초명(初名)이 정무수(鄭茂壽)였으나, 나중에 정기룡(鄭起龍)으로 개명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과 금산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곤양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방어했다. 상주판관으로 상주성을 탈환한 후 성주·합천·초계·의령·고령 등지의 여러 성을 탈환하는 데 이름을 떨쳤다.

이외에도 정신(鄭侁)을 시조로 하는 지후공파(祗侯公派), 정안교(鄭安校)를 시조로 하는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 등이 있다.

진주정씨의 인물들

▲충장공파에서는 고려개국공신으로 문하시중에 오른 시조 정예가 있으며, ‘고려사’를 편찬한 정이오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을보는 공민왕 때 찬성사가 되었으며, 문영공(文英公) 정수는 대제학을 지냈고, 문영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정수규는 정당문학을, 정천귀는 대제학을 지냈으며, 충장공 정분은 정이오의 아들로 단종 때 우의정에 올랐으나, 세조의 계유정난으로 죽음을 맞았다.

▲은열공파에서는 시조 정자우가 고려 때 호장을 지냈으며, 6세손인 정신열은 병부상서에 올라 거란침공을 격퇴하였다. 공민왕 때 정천익은 사위인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오자 이를 시배(始培)하여 물레와 씨아를 창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자우의 후손으로 첨정을 지낸 정중공은 첨정공파의 시조가 되었으며, 정기용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공대공파에서는 시조 정장이 고려 말에 통정첨지를 지냈으며, 4세손 정척은 조선 태종 때 판윤을 지냈다.

▲어사공파에서는 시조 정헌이 고려 말에 평장사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정온(우곡)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냈고, 우곡공파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손자 정택은 고려 때 감찰어사를 지내, 어사공파를 이었다. 정택의 10세손 정경세는 조선조 대제학을 지내고 김장생과 함께 조선 예학파를 대표한다.

그외 지후공파의 시조 정선은 고려 때 지후에 올랐으며, 내부사공파의 시조 정안교는 고려 때 판내부사를 지냈다.

진주정씨의 현대인물로는 정일형(유엔총회 한국대표, 국회의원, 외무장관, 신민당부총재) 박사와 그의 아들 정대철(국회의원)이 있으며, 그외 국회의원으로 정세환 정헌주 정준 정상용 정균환 정동호 정상열 정갑주 정재완 정순덕 등이 있고, 서울시장을 역임한 정상천 변호사도 진주정씨이다. 또한 법조계에서는 정기승(대법판사), 정창운(검찰총장)과 변호사로 정덕기, 정창훈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교육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원식 총리가 있으며, 정정환(부산대 대학원장), 정운오(미 일리노이주립대 교수), 정재환(법학박사, 동아대 총장), 정수봉(법학박사, 동국대 총장), 정재각(문학박사, 동국대 총장), 정동규(약학박사, 숙명여대 약대 학장), 정요한(이학박사, 조선대 교수)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정주영(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정재구(제일제당 사장) 등이 있다.

김성회 /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https://n.news.naver.com/article/022/0002477854

<北洞入坊考證>

北洞里는 屯鐵山 아래 빙 둘러 있는데 주위가 10里이고 중국 巴楚의 明月협곡과 같으므로 그 위에 月明寺가 있다. 골짜기는 맑은 시내를 끼고 있는데 시내 위, 중간, 아래, 左右에 다섯 마

을이 있다. 제 1坊은 곧 시내 아래인데 羅氏와 鄭氏가 살고 있다. 鄭禮明이란 사람은 벼슬이 淸州牧使이고 그 아들 仲孫은 또 武科에 급제하여 內禁衛를 지냈다. 비록 벼슬이 崇班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 財産이 王公에 비할 만하여 凶年에 능히 9郡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으니 당시 사람들이 입이 닳도록 칭송했다. 아들은 없고 딸만 있었는데 正武公의 아들 李處仁에게 시집보내어 그 집안을 전했다.

羅氏는 判書 廷老가 이 사람이다. 그 아들 有文은 燕山朝에 短喪法이 엄하던 시절 母親이 죽었는데 홀로 執喪을 禮대로 행하다가 슬픔으로 몸을 훼손하여 병이 들었다. 그 아내와 永訣하며 말하기를 “3년 동안 어머니 祭祀하기를 내가 살아있을 때와 같게 하라.”고 하니 아내가 그 말을 따라 비록 風雪이 몰아쳐도 반드시 墓祭를 친히 드리면서 폐하지 않았다. 이 일이 朝庭에 알려지자 有文과 아내 李氏에게 모두 旌閭를 내렸다. 天道가 무심하여 晉나라 鄧伯道처럼 자식이 없었으니 羅氏의 世傳家業은 모두 判書의 사위인 姜儉에게 돌아갔다. 儉은 晉陽人인

데 장원급제하여 버슬이 郡守에 이르렀다. 俗傳하기를 儉은 少時에 月明寺에서 讀書했는데 꿈에 한 僧侶가 간곡히 고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미 땅속 괴물이 된지 오래 되었으니 어찌 배가 고프지 않겠는가! 그대가 만약 나로 하여금 다시 天日을 보게 하고 중들의 供養을 먹게 해준다면 원하는 바를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儉이 즉시 家僮과 寺僧을 데리고 뜰 가운데를 석 자나 팠지만 아무 것도 없으므로 허망한 꿈이라 여겼다. 그날 밤 또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만약 다시 한 자만 더 파면 효험을 볼 것이다.”라고 하므로 그 말대로 다시 파니 과연 七尺 石佛이 있었다. 諸僧이 합장하고 賀禮하며 말하기를 “선비께서는 필시 이제부터 陞進할 것입니다.” 라고 하더니 5-6년이 못되어 과연 登科하였다. 儉이 일찍이 스스로 얘기한 것이 지금까지 전한다.

제 2坊은 곧 시내 중간인데 이곳은 正武公의 손자 義淳이 살았다. 그 아들 繼裕는 5명을 낳았으니 장남은 昱(욱)이고 다음은 昌(창)이며 다음은 曇(담)이고 다음은 暹(섬)이고 다음은 晁(조)이다. 昱은 능히 儒者로 처신했고 昌과 晁는 아울러 文科에 급제했다. 公이 세상을 떠나자 公의 아들 三陟府使 昌이 公의 墓碣銘을 지었는데 5代의 일을 매우 상세하게 적었다. 그러나 유독 神德王后와 慶順公主에 관해서는 그 글이 소략하여 大體를 볼 수 없으니 무엇 때문인가? 公이 알면서도 상세히 적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몰라서 상세히 적지 않은 것인가? 살펴보건대, 洪武25년(1392)에 景武公에게 鐵券을 하사했으니 이에 말하기를 “卿의 어머니를 惠寜翁主에 봉하고 卿의 아내를 慶順宮主라 명했으니 君親의 思念을 더욱 돈독히 하고 장인

과 사위의 恩義를 소홀히 말라.“고 하였다. 그 君親의 은덕과 의리가 지극하여 마땅히 沁水(東漢 明帝의 딸인 沁水公主의 園林이 있던 곳으로 여기서는 慶順公主의 田庄을 비유한 듯함)를 오래 보전하고 蘭陵(梁나라 武帝의 어머니인 張后의 陵이 있는 곳으로 여기서는 神德王后의 陵을 비유한 듯함)을 길이 수호하여 무궁토록 慶事를 전할 것 같았다. 그러나 數世도 미치지 못해 800리 밖으로 유배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공주를 시집보낸 것은 신덕왕후 康氏에 의해서인데 신덕왕후의 릉은 太宗朝에 헐어버렸고 그 자손들의 유배도 또한 太宗朝에 있었던 일이다. 그 후 世宗朝에 芳碩을 昭悼公에 추증했고 明宗朝에 이르러 신덕왕후의 릉을 복원하려 했지만 릉의 소재를 알지 못해 안치하지 못했다. 公 또한 5世孫으로 부름을 받고 御前에 나가 아뢰었는데 그 말이 ”신의 祖父는 800리 밖으로 유배되었으니 朝廷의 명령을 받지도 않고 어찌 감히 사사로이 展謁하여 그 墓를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公은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알면서도 상세히 적지 않았다는 것은 타당한가? 碑石에 뚜렷이 새기는 것은 장차 자손에게 보이려는 것이니 어찌 상세히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孔子께서 魯나라 諸侯의 일을 諱隱한 것처럼 그렇게 한 것이라면 公의 墓碣銘은 부실하게 기록하여 그 사실을 분명히 밝히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으니 先朝를 추념하고 後孫을 생각하는 계책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昱의 아들 중에 장남은 惟謙이니 惟謙은 자녀의 도리를 다하고 學問하는 일에 근면했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惟謙의 아들 垠 또한 강개한 기질에 讀書를 즐겨하면서 出世하여 집안은 일으키려 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惟謹의 아들 垤은 節義를 지켜 安貧면서 자손을 많이 두었다.

제 3坊은 곤 시내 오른쪽이니 이곳은 武科 급제한 從仕郎 李處仁의 터인데 壯元한 李智亨의 아들 生員 翕(흡)이 處仁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에 살았다. 參判 朴聰의 4世孫인 寅亮은 곧 翕의 孫壻인데 寅亮은 평생 儒業을 행하고 一身을 삼가하며 博學했으나 끝내 科擧에 합격하지 못했다. 公의 父親 蓁(진)도 누차 科擧에 실패했고 아들 楣(미)도 또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여 朴氏 3代가 세 번이나 落榜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資憲大夫 領中樞 剛莊公 河漢의 손자인 恒이 李義淳의 딸에게 장가들어 또한 이 마을에 살았다. 그 손자 汝灌은 武科에 급제하여 訓鍊院 僉正이 되었다.

 

제 4坊은 바로 시내 왼쪽인데 이곳은 光陽縣監 姜行의 거주지이다. 그 아들 文會는 典籍이고 그 손자 顯은 判書이나 바로 惠平公이다. 公은 弱冠時 또래 몇 명과 더불어 鄕校에서 讀書하다가 凉亭에 술이 익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네 사람이 밤중에 항아리 있는 곳에 들어가 술 항아리를 짊어지고는 달아나 江樓위에 이르러 한껏 마시고 놀다가 돌아갔다. 이에 각기 七言詩 1句로 그 일을 읊었으니 그 詩에 이르기를,

“晉代疎光畢吏部 風流千載付吾儕 偸來夜半無人縛 大醉還山月欲低”

(진대소광필리부 풍류천재부오제 투래야반무인박 대취환산월욕저)

 

晉나라 괴짜 술꾼 필리부 그 풍류로 천년 흘러 우리에게 전해졌네.

한밤중에 훔쳐와도 잡아 묶는 사람 없어, 大醉하여 돌아오니 달이 이미 지려하네.“

라고 하였다. 그 末句가 바로 判書가 읊은 것이니 사람들이 그 大成할 것을 알았다.

(* 畢吏部 : 晉나라 吏部郞을 지낸 畢卓,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무척 좋아했는데 한번은 이웃집에 술이 익자 밤중에 몰래 들어가 술항아리 곁에서 훔쳐 마시다가 주인에게 들켜 밤새도록 묶여 있었다고 함.)

이 마을에 또 八莒君 都有德의 11世孫인 著作郞 希齡의 거쳐가 있다. 希齡은 咸陽人으로 少時부터 文章을 닦아서 붓을 잡으면 즉시 써내려가 사람들이 모두 傳誦했는데 불행히도 短命했다. 著作郞의 아들 敬孝는 字가 一源인데 어려서 孤兒가 되었지만 일찍 성숙했으니 外祖母 梁氏가 유달리 사랑했다. 梁氏는 進士 應鯤의 딸로 參奉 起門의 아내이니 儒家에서 생장하여 見聞이 넓고 詩禮에 익숙했다. 항상 무릎 위에 앉혀놓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으로 글을 가르

치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鳳毛처럼 유달리 특출하여 능히 제 아비를 이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성하여 文詞에 크게 힘을 쏟더니 詩에 더욱 뛰어나 神技에 가까운 글귀를 연달아 지었으므로 諸人들이 모두 따를 수가 없었다. 누차 科場에서 이름을 날려 벼슬길에 오르는 일을 단숨에 기대했으나 나갈 때마다 실패하고 또 액운이 겹치자 드디어 세상에 뜻을 끊고는 인하여 病隱이라 自號했다. 당시 金大瑕子 李梧月堂 吳德溪 諸賢 모두 절친한 벗으로 서로 더불어 推重했다. 德溪가 일찍이 말하기를 “先親께서 一源의 先大人과 더불어 왕래함이 一家와 같았으므로 나도 일원과 더불어 또한 兄弟의 情義가 있다.”고 하였다. (1521년생 吳德溪는 1556년생 病隱보다 나이가 35세 많고, 병은의 부친인 1539년생 著作郞 보다도 18세가 많으니 아마 착오가 있는 듯 함) 病隱은 二子를 두었으니 장남 聖欽은 先世의 풍골을 지녀 武藝를 좋아했다. 차남 聖兪는 字가 鄰哉인데 모습이 古風스럽고 마음이 활달하며 言辭가 유창하고 理致에 통달했으며 易數에 조예가 깊어 隱遁을 핑계 삼아 세상을 觀照했다. 내가 일찍이 淵源의 유래를 물으니 말하기를 “道는 하늘에 있고 理는 사람에게 구비되어 있으니 우러러 바라보고 굽어 살피면서 그 이치를 탐구하면 무슨 疑惑이 있겠는가! 河圖가 伏羲氏에게 나타나고 洪範九疇가 禹임금에게 내려짐으로부터 天地萬物의 변화가 모두 명확히 드러나 남김이 없다. 그러므로 理가 있으면 氣가 있고 氣가 있으면 數가 있으니 數와 理는 애초에 서로 격리된 것이 아니다. 理를 따라서 數를 궁구하면 사물의 情狀이 運籌하는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매양 宋니라 邵康節이지은 皇極經世書를 보면 開闢이래로부터 그 年數를 헤아려 1元에서 12會가 경과하고 1會에서 30運이 경과하며 1運에서 12世가 경과하면서, 窮하면 變하고 變하면 生하며 生해서는 다함이 없다.” 라고 하였다.

내가 그 학문을 보건데 河圖 洛書를 근본까지 추구하고 털끝처럼 미세한 부분까지 파고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환히 疑惑이 없게 하였다. 오직 그가 易을 크게 완미고 象數設을 헤아려 밝힌 것은 모두 孝悌의 도리였다.

내가 알기로는 都君이 일상으로 가까이 하는 바는 易書이고 즐겨 완상하는 바는 爻辭이다. 이치를 함양하고 孝悌의 도리를 발휘하여 이로써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이로써 몸을 닦았으니 집안을 다스리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에게 우애롭게 하면서 妙理를 탐구하고 變化를 관찰하는 것이 바로 그의 학문이다. 日月의 度數를 헤아려 그 차고 기움 만을 고찰하거나 星辰의 運行을 헤아려 그 자리와 머무는 곳만을 살핀다면 어찌 족히 都君을 얘기할 만하겠는가! 나는 都君이 이런 학문을 가지고 있는데도 아는 사람이 적은 것이 슬프기 때문에 갖추어 기록한다.

제 6坊은 곧 葛田이니 故 兪政丞의 터이다. 그 자손 중에 쇠미하여 賤人이 된 兪薰이란 자는 나이 90인데 항상 말하기를 “우리 先世에 兪政丞이 이곳에 살다가 이곳에 묻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름을 물으면 알지 못하므로 政丞의 이름이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제 7坊은 곧 加坪이니 들판 서쪽은 安州判官 孫暝의 손자인 敬宗의 거주지이다. 敬宗은 武科에 급제하여 軍器寺 判官을 지냈고 아들 厦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그 스승을 위해 心喪 3년을 입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칭송했다.

들판 동쪽은 예부터 칭하기를 三嘉縣監 柳某의 거주지라 하였다. 정자 터가 新安驛 상류 바위 위에 있는데 모두 柳三嘉의 江舍 터라고 이른다. 그 墓도 또한 加坪에 있었는데 鄭業龍이란 자가 碣石을 뽑아버리고 그 父親을 墓 앞에다 葬事했으니 사람들이 그 姓만 알고 그 이름을 모르게 되었다. 유식한 사람이 이 마을에 살았다면 業龍은 필시 罪를 받았을 것이고, 柳氏

이름도 後世에 전해졌을 것이다.

加坪의 상류는 바로 水月洞이다. 그 위에 落水巖이 있으니 고을의 士友들이 항상 노니는 곳이다. 都病隱이 일찍이 詩를 지어 읊기를,

“仙人去後石臺空 白日雷鳴翠峽中 靑蓮若見流觴處 應道廬山在下風

(선인거후석대공 백일뇌명취협중 청련약견유상처 응도여산재하풍)

仙人들이 떠난 뒤 石臺만 남았으니, 대낮에 우레소리 푸른 峽谷 진동한다.

李太白이 만약 이곳 流觴曲水를 보았다면, 廬山 풍류 하찮다고 응당 말했으리.“

라고 하였다.

제 8坊은 新安驛이니 縣의 북쪽 10리 新安院과 松界院 중간에 있다. 松界院은 바로 松界部曲의 자리인데 거주하는 사람은 없고 풀만 무성하다. 洞口의 新安江上에 周氏 李氏 羅有文의 旌閭가 있다. 周氏는 곧 復信의 딸이자 姜隱의 妻인데 혹자들이 말하기를 “그 貞節은 梁應鯤이 촉발시켰다.”고 한다.

<상량문(上梁文)>

우리 전통문화에서 집을 지을 때 행하는 의식인 상량식이 있다. 집은 삶의 근거지이고 많은 돈과 노력이 드는 것이므로 혼례식, 장례식 등과 함께 그 의식은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다. 공사를 하기 위해 터를 닦기 시작할 때 산천과 사당에 고하는 ‘고유제’를 지내고 집의 골조를 완성하였을 때는 ‘상량식’을 거행한다.

상량은 건물 골격이 완성되는 들보(종도리)를 올리는 과정으로 가신(家神)인 성주가 탄생하는 순간이며, 건축 과정에서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들보를 올리며 상량식을 거행할 때, 상서로운 기운과 경사, 그리고 신령에 대한 경의를 담은 표현을 상량문에 담았다. 그 상량문은 종이나 비단 같은 천에 적어, 종도리나 종도리를 받치는 부재인 장여에 홈을 파고 넣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오래된 건축물에는 상량문이 남아있고 전해져왔다.

그 상량문에 대해 알아본다.

 

상량문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다. 서두에 그 집을 짓게 된 연유와 집주인의 인품, 공사 참여자, 상량 일시 등을 적는다. 다음은 동, 서, 남, 북, 상, 하 여섯 방향에 따라 축시(祝詩) 여섯 수를 짓는다. 이어 상량 후 좋은 일이 이 집을 통해 많이 일어나기를 기원하는 글귀로 마무리한다.

서문에 이어지는 축시는 맨 먼저 ‘아랑위포량동(兒郞偉抛樑東)’이란 정형화된 문구로 시작한다. ‘아랑위포량동’ 이어 동, 서, 남, 북, 상, 하 여섯 수의 축시가 이어진다.

 

{현종 8년(1667), 종묘 영녕전 개수(改修)된 상량문의 축시를 보면, 

“아랑위포량동(兒郞偉抛樑東) / 맑은 봄날 낙산에 아침 햇살 붉구나 / 모든 영령이 수놓은 문, 길이 보호하니 / 만년(萬年)토록 좋은 기운 성대히 머무르리라”

“아랑위포량서(西) / 금원에 서리와 이슬 내려 밤이 서늘하네 / 제관이 제사 지내려고 벽돌 사당 길 가니 / 악기에 맞추어 일제히 일무를 추네”

“아랑위포량남(南) / 전각에 부는 훈풍 나무들이 머금네 / 맑은 그늘 펼쳐 온 나라에 나누어 주고 / 당시 남기신 교화 지금까지 이르렀지”

“아랑위포량북(北) / 별들이 흩어져 북극성 둘러싸네 / 변함없이 남쪽을 바라보는 군왕의 병풍 / 천년(千年)토록 사당을 공경히 우러러보리라”

“아랑위포량상(上) / 상서로운 구름 아득히 의장(儀仗)을 가리네 / 참된 저세상 제향이 멀다 마라 / 뵙는 듯 지극정성에 신령이 흠향하리라”

“아랑위포량하(下) / 도성의 연무가 수많은 기와를 감쌌구나 / 성은으로 물산이 풍부하고 백성이 평안하니 / 환호와 기쁜 기색은 조야가 모두 같네!”

 

여기서 ‘아랑위’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어영차’의 의성어라는 설이다. 그 다음 이어지는 던질 포, 들보 량, 동녘 동과 어우러져 ‘어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라고 해석한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 고사에 따르면, 육조시대 이래 건축물의 골격이 완성된 뒤에 길일을 잡아 들보를 올리며 상량식을 거행하는데, 이때 친지들이 음식을 싸 와서 축하하고 목수를 대접한다. 그러면, 목수의 우두머리인 도목수가 들보 위에 걸터앉아 만두와 떡 등 제물을 사방과 위아래로 던지며 상량문을 읽는다. 이때는 ‘아랑위’는 의성어가 아니라 젊은이를 일컫는 ‘아랑’의 복수형으로 도목수가 장인들을 부를 때 통상적으로 쓰는 말이다. ‘아랑위포량동’은 ‘여보게, 들보 동쪽으로 떡을 던지세’의 뜻이 된다.

또, 아랑위포량동, 서, 남, 북, 상, 하로 이어지는 시구에는 각 방향에 해당하는 사물을 노래한다. ‘낙산’은 영녕전의 동쪽에 있고, ‘금원’은 궁궐의 후원으로 서쪽에, ‘나무들’은 남쪽에, ‘북극성’은 북쪽에, ‘구름’은 위에, ‘도성’은 임금이 다스리는 아래에 있다.

 

축시 뒤에는 ‘복원상량지후(伏願上梁之後: 삼가 바라옵건대 상량 후에는)’라는 말을 시작으로 기원하는 문구로 끝을 맺는다. 영녕전 상량문에는 “삼가 바라옵건대 상량한 후에는 국운이 장구하고 하늘의 아름다움이 더욱 이르리라. 효손에 경사가 생기리니 만년 장수하길 돕고 선왕을 잊을 수 없으니, 멀고 오랜 세월 동안 혈식(血食: 종묘 제사 때 쓰는 생고기, 즉 희생)을 받으리라”라고 했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글 발췌)

 

일반적으로 큰 집이 아닌 경우에는 짧은 문장의 상량문을 종도리 바닥에 종서(縱書)로 쓴다. 종도리 아래에 부재인 장여가 있으면 장여에 가려 글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장여 바닥이나 종도리․장여 측면에 쓰기도 한다. 순서는 집의 중심인 안방 쪽에서 시작해 건넌방 쪽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재액방지 문자로는 용(龍)과 거북(龜)이 가장 많이 쓰이고, 호랑이(虎), 봉(鳳), 기린(麒麟)도 쓰인다. 용은 용용용(龍龍龍), 용반(龍盤), 해룡(海龍), 활룡해룡(活龍 海龍), 구룡(龜龍)으로 적기도 한다. ‘구(龜)’도 구구구(龜龜龜), 낙구(洛龜), 수구(水龜), 산구(山龜), 하구(河龜)로 적기도 한다. 때로 상형문자나 그림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상량문에 ‘용’과 ‘거북’을 적는 이유는 용과 거북이 물의 신(水神)이므로 화재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물이 아닌 해(海), 수(水), 하(河), 묘(淼) 등의 문자도 화재를 방지하려는 의도로 쓰인다. 거북은 수신으로서 화재 방지의 의미가 있지만 장수 동물이나 길상 동물로도 인식된다. 호랑이는 벽사(辟邪)의 의미, 기린(麒麟)․봉(鳳)은 길상 동물을 의미한다.

상량문에는 종도리를 올린 시간인 상량시(上樑時)인 년,월,일,시를 적는다. 건물이 마치 사람의 탄생처럼 탄생일인 사주(四柱)가 정해진다는 의미이다.

연도는 ‘광무칠년갑진(光武七年甲辰)’처럼 연도와 간지를 표기한 방식이 일반적이다. ‘세재(歲在)’ 또는 ‘태세(太歲)’라고 적고 간지 또는 연도를 적기도 하며, 청나라 연호인 ‘동치(同治)’, ‘광서(光緖)’, ‘함풍(咸豐)’, ‘가경(嘉慶)’과 명나라 연호인 ‘숭정(崇禎)’을 적는다. 대한제국기에 지어진 민가 상량문에는 ‘광무(光武)’ 또는 단기(檀紀)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서원과 같은 유교 건물인 경우 공부자탄강(孔夫子誕降), 사찰 건물은 불기(佛紀)나 세존응화(世尊應化)로 각각 쓰는 등 건물 성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최근에 지어진 가옥은 서기(西紀)를 많이 사용한다. ‘시(時)’를 적을 때 고자(古字)인 ‘시(峕)’를 사용하기도 한다.

상량문에 ‘자좌오향(子坐午向)’처럼 건물의 좌와 향을 적기도 하고, 가주(가주)의 이름이나 생년을 적기도 한다.

짧은 기원문(祈願文)을 적는데 ‘응천상지삼광 비인간지오복(應天上之三光 備人間之五福)’이 가장 많이 쓰인다. ‘하늘의 삼광(三光)인 해․달․별은 감응하시어 인간의 오복을 내려주소서.’라는 뜻이다. 이 밖에 부귀영화 자손창성(富貴榮華子孫昌盛), 부모천년수 자손만세영(父母千年壽子孫萬世榮)도 가끔 쓰인다. 쓰는 방식은 기원문의 글자가 많아서 대개 두 줄로 쓰며, 다른 글자보다 작은 글씨로 쓴다. 이 밖에 목수의 이름을 적기도 하고 오행(五行)을 적기도 한다.

 

전통 건축물의 마지막 공정에 해당하는 상량식에서 상량은 단순히 건축물의 완성을 알리는 의식을 넘어서, 그 건축물이 지닌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알리고, 건축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노고를 기리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건축물이 안전하고 풍요로운 기운을 불러일으키기를 기원하는 전통이다. 상량문은 건축물의 목적, 설립 연도,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등은 후대에 그 건축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여, 우리 문화와 역사를 보존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현대에는 전통 의식과 절차가 없어지고 또 달라진다. 성인식, 혼례식, 장례식 등의 중요한 의식도 전통과 많이 변하고 있다. 시대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 없는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는 미래 또한 없는 것이 상식이다. 옛 것을 알고 창의적으로 변화 하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정신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도 적용 가능하며 오늘날 살아가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元堂里 八坊 考證>

元堂里의 제 1坊 2坊은 元堂里 동쪽과 서쪽에 있는데 그 가운데는 개울 하나가 있다. 그 서쪽 마을은 바로 蔚山郡守 金滕의 거주지로 그 아들 潤生은 生員이고 그 손자 龜老는 忠順衛이니 縣에 거주할 때부터 富豪라 칭하였다. 그 손자 用貞 또한 生員인데 用貞이 일찍이 喪妻하여 그 묏자리를 東方谷에서 잡더니 古塚을 파고서 壙穴을 뚫었다. 이날 밤 鬼火가 공중에 연이어 왕래하다가 東方谷에서 길을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가니 이웃의 유식한 이가 그 불길함을 알아차렸다. 이에 한 달도 못되어 用貞이 죽었고 그 장남 崇은 자식이 없었으며 차남 岑도 그 손자에 이르러 또한 後嗣가 끊어졌다. 後人들이 마땅히 본보기로 삼아야 할 일이기 때문에 괴이한 일을 기록한다.

圃隱 文忠公의 5世孫인 鄭浣은 金潤生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거주했는데 생원이다. 그 아들 光胤또한 登科하여 藝文館 檢閱에 천거되었으니 名聲이 혁혁했다. 그 후 자손들이 모두 명성을 잃지 않고 朝廷에서 벼슬했으니 지금의 右相 維誠은 바로 檢閱의 5세손이다.

東萊府使 李圖男은 곧 忠順衛 金龜老의 사위인데 그 아들 光前이 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癸卯年(1543) 생원시에 장원하고 丙午年(1546)에 登科하여 承文正字를 지냈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아들 天慶은 號가 日新堂인데 일찍이 南冥 曺先生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誠意가 鐵門關” 이라는 가르침을 얻어 체득한 바가 있다. 평생토록 반드시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한 뒤 衣冠을 갖추고 家廟에 참배하고는 걸상에 단정히 앉아 하루 종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鄕人들이 廟堂에서 享祀할 만한 분이라 하면서 말할 때마다 반드시 “日新堂 日新堂”이라했다. 二子를 두었는데 장남 瑚는 기개가 있었고 季子 瑛은 풍채가 깔끔하고 학문을 겸비했으며 그 淵源은 家庭에서 나왔으니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그 동쪽 마을은 바로 淸州牧使 姜麟이 거주하던 곳인데 興安君의 4世孫 成均博士 李晁가 곧 公의 孫壻였으니 李氏의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晁가 三男을 낳았으니, 장남 惟誠이고 차남은 惟訥이며 계남은 惟說이다. 惟誠은 장원급제 하였고 惟說은 생원이 되었지만 惟訥은 누차 鄕試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모자란다고 하였다.

그러나 惟訥만이 유독 아들과 손자로 이어 능히 집안을 일으켜 世業을 전했으니 사람들이 비로소 公의 隱德이 있어 福祿이 다하지 않음을 알았다. 惟誠의 아들 瑴또한 生員이 되어 參奉에 천거 되었다.

惟誠은 벼슬이 榮川郡守에 이르렀으니 晩年에 都山의 鷹巖상류 碧溪근처 동네로 이주하여 梧月堂이라 自號했다. 물을 끌어와 못을 만들고 못 위에 정자를 지어 天雲亭이라 편액하고는 시를 지어 읊기를 “留得天雲許盪懷(유득천운허탕회: 천운을 머물게 하여 회포를 씻어내리)”라고 하였다.

權太師의 20世孫인 逵는 鄭圃隱 文忠公의 5世孫인 浣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 마을에 살았다. 뜰에다 손수 雙槐를 심어놓고 그 堂에 安分이라 편액 했으며 四子를 낳아 文顯 文著 文任 文彦이라 이름을 지었다. 君子로다. 이 사람이여!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본연의 모습대로 處身하며 벼슬도 원치 않고 많은 재물도 바라지 않으면서 오직 文이 많은 것만을 부자로 여긴 이로다. 아! 性情을 가다듬고 自足함을 아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公은 반드시 文學으로써 그 자손에게 남겨주려 하면서 그 德을 쌓고 학문을 축적했으니 아들 하나 손자 하나가 마침내 전후로 文科에 급제하여 드디어 雙槐亭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公이 전일에 德을 닦아 뒤에 보답을 받음이 마치 맞추듯 일치하니, 이는 송(宋) 진종(眞宗) 때의 진국공(晉國公) 왕호(王祜)가 집 정원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三槐亭을 지어 후대에 삼정승이 나오기를 믿었다는 것과 비교해 보건대 어떠한가!

公이 세상을 떠나자 公의 아들 文任이 公의 墓碣銘을 지었는데 한 자 한 자가 모두 엄정하고 슬픔이 극진하여 追遠永慕의 정성이 言表에 드러나 있으니 참으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하겠다. 남의 자식된 이들이 이 墓碣銘을 본다면 누군들 눈물을 흘리면서 효성스런 마음이 한없이 생겨나지 않겠는가! 하물며 자손에게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 에 말하기를 “孝子不匱永錫爾類(효자불괘영석이류 ; 효자는 다함이 없으니, 길이 닮은 이를 내린다.)”고 하였다. 이에 나는 權氏의 자손 중에 그 장차 父母에게 효도할 이가 면면히 이어질 것을 알겠으니 父親을 위해 손가락을 자른 이로서 어찌 유독 權洚(권홍)한 사람만을 꼽겠는가! 洚은 文彦의 아들이다. 文彦이 죽을 적에 洚의 나이 겨우 弱冠이었는데 父親을 위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다시 소생하게 했으니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킴은 이와 같다. 洚의 아우 渫(접)은 癸卯年 (1603) 武科에 합격했고 그 형 澤(택)의 아내 姜氏는 丁酉年 倭亂에 절개를 지켜 드디어 그 門에 旌表했다. 文顯 文著 文任 文彦은 모두 家庭의 훈도를 받아 생장했으니 그 見聞이 전부 출중하여 難兄難弟라 하였다. 그러나 유독 文顯의 自挽詩는 陶淵明의 自挽詩와는 달랐다. 淵明은 평생 술을 넉넉히 마시지 못한 것을 한탄했지만 公은 男子가 풀처럼 시드는 것을 한탄했으니 公이 평생토록 기약한 바는 淵明보다 한 단계 높았던 것이다. 선비에게는 不朽한 것이 세 가지(入德, 入功, 立言) 있는데 公이 이르기를, “忍將男子志甘與草同枯 (인장남자지감여초동고 : 차마 어찌 남자의 뜻을 품고, 풀과 같이 시들겠는가!”라고 한 一句 또한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公의 아들 濟는 登科하여 工曹佐郎이 되었는데 이는 참으로 公의 遺澤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觀相家로 성이 王氏인 자가 일찍이 여관에서 佐郞公을 보고 말하기를 “公의 相은 龍의 형태인데 얼굴과 등에 환히 빛나는 것은 모두 虎彪의 무늬로서 그 文彩가 찬연하다. 이는

필시 公의 부친께서 文章에 능했지만 及第하지 못하여 그 아들에게 文彩로 남은 것이다. 부친의 뜻과 사업을 잘 계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公의 뜻이 비록 앞에는 좌절되었지만 뒤에는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草木처럼 썩어버리겠는가! 선비 文學을 많이 닦아 그 德을 쌓은 이는 반드시 後代에 넉넉해진다. 나는 이에 公의 不朽함이 命數의 窮通에 있지 않고 文學을 많이 닦아 그 德을 쌓음에 있는 줄을 알겠다. 드디어 이를 두루 갖추어 기록한다.

제 3-4坊은 곧 文乙 部曲의 上下마을이다. 윗마을에 사는 이들은 土着人이 많은데 住民들이 부지런하여 자못 농사를 잘 짓고 있다. 아랫마을에는 部曲의 티만 남아있고 거주하는 사람은 없다.

제 5坊은 이름이 立石인데 溪上에 서 있는 돌이 있으므로 인하여 이름했다. 大丈夫 가운데 그 고요함을 사랑한 이들이 간혹 집을 짓고 거처했으나 오래 살지는 못했으니 기록하지 않는다.

제 6坊은 沙月이니 이곳은 丹城과 晉州의 접경으로 名區라 부르는 곳이다. 앞에는 시내가 있고 뒤에는 산이 있는데 산 이름은 尼丘山이고 그 위에 消怪寺가 있다. 두 姓氏가 一區를 전승하여 世居하니 黃氏와 李氏이다. 黃氏는 故 判書 孟獻의 曾孫인 棹가 生員으로 난리에 죽었고 俶은 시골에 숨어 집안에서 늙었다.

李氏는 故 興安君 5世孫으로 이름이 賀生이니 壬戌人이다. 그 담장 안의 정자 앞에 거북처럼 엎드려 있는 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 오래된 梅花 한그루가 있어 매우 기이하다. 賀生은 날 때부터 孤兒였는데 장성하자 父親喪에 服을 입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忌日이 되면 30日 전부터 흰 옷을 입고 맨 밥을 먹었으며 30日 뒤까지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70살이 되도록 이를 게을리 아니하다가 일생을 마쳤으니 “君子는 종신토록 喪을 입는다.”는 말이 이를 이른 것이다. 丁酉年 倭亂에 사방을 떠돌다가 父親 忌日이 되어 저녁 무렵 星州 多基村에 들어

가니 主人의 영접함이 매우 극진했다. 賀生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禮儀가 이리 근면합니까?”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내가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이제 그대의 모습을 보니 쓸쓸하고 애잔하여 마치 간절히 누구를 思慕하는 듯합니다. 무슨 일입니까?”라고 하였다. 賀生이 “원컨대 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꿈에 大人 한분이 이곳에 찾아와 나에게 이르기를 ”나는 丹城 사람인데 내일이 내가 죽은 날이다. 나의 아들 賀生이 오늘 저녁 필시 이곳에 와서 내일 나에게 제사를 지낼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公이 이 말을 듣고 痛哭하기를 喪을 당한 사람처럼 哀痛하게 하니 主人 또한 마주보며 눈물을 흘리다가 그 집안에 있는 음식을 모두 내어 祭需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아! 精誠은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

제 7坊은 墨谷이니 故 淸州牧使 姜沆이 살던 곳이다. 出仕한 뒤에는 그 世業을 兄의 아들 汝檣 에게 주고 晉州 元堂里로 이주했다. 또 梁山亭舍 자리가 남아있는데 완연히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제 8坊은 바로 培養山이니 곧 周氏와 文氏의 거주지이다. 周氏는 토착 성씨인데 世侯와 璟은 모두 判書였으며 璟은 孝行으로 旌閭를 받았다. 文氏 또한 토착 성씨로 이 마을에 살면서 顯達한 이가 20명이다. 그 중 判書가 2명, 提學이 2명, 學士가 2명, 獻納이 1명, 學諭가 1명, 及第한 이가 3명, 郡守 縣令이 4명, 監察이 1명, 奉正이 1명, 進士가 3명인데 그 중 한 분이 江城君 益漸이다. 한 마을의 人才가 성대함으로 말하자면 당연히 그 마을 이름을 調元里라 해야 하는데도 主上이 특명하여 孝子里라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孝라는 것은 百行의 근원으로 忠臣을 구할 적에 반드시 孝子가문에서 택한다. 江城君의 實蹟은 退溪先生이 지은 碑閣記에 적혀 있다.

그 후 이 마을에 거주한 李氏는 그 先系가 江陽人이니 尙書左僕射 景芬의 8代孫인 參軍 李通이 급제한 文承魯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 후 거주하는 자손들이 비록 富貴를 누리지는 못했으나 대대로 文學하는 선비가 이어졌다. 李源은 自號가 淸香堂이니 행실이 더욱 드러나 退溪 南冥 두 선생의 문에 종유했다. 江城君의 行義와 功德을 一國에 선양하여 아이나 하인들도 모르는 이가 없게 한 것은 모두 源에게서 나왔다. 曺先生은 교분이 매우 친밀하여 서로 더불어 “陽春曲” “白雪曲”같이 빼어난 詩를 唱和했고 또 淸香堂 八詠을 지었다. 源의 아들 光坤은 호가 松堂이니 가업을 계승했다. 源의 아우는 潛이고 潛의 아들 光友는 호가 竹閣이니 천품이 활달하고 인물이 장대하여 長子의 風度가 있었다. 아들이 없어 아우의 아들 瑜로서 그 제사를 받들게 했는데 瑜는 孝友하고 정직했으며 그 형 琛 또한 孝友하고 근엄했으니 그 家風과 遺訓이 他族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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