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堂里 八坊 考證>
元堂里의 제 1坊 2坊은 元堂里 동쪽과 서쪽에 있는데 그 가운데는 개울 하나가 있다. 그 서쪽 마을은 바로 蔚山郡守 金滕의 거주지로 그 아들 潤生은 生員이고 그 손자 龜老는 忠順衛이니 縣에 거주할 때부터 富豪라 칭하였다. 그 손자 用貞 또한 生員인데 用貞이 일찍이 喪妻하여 그 묏자리를 東方谷에서 잡더니 古塚을 파고서 壙穴을 뚫었다. 이날 밤 鬼火가 공중에 연이어 왕래하다가 東方谷에서 길을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가니 이웃의 유식한 이가 그 불길함을 알아차렸다. 이에 한 달도 못되어 用貞이 죽었고 그 장남 崇은 자식이 없었으며 차남 岑도 그 손자에 이르러 또한 後嗣가 끊어졌다. 後人들이 마땅히 본보기로 삼아야 할 일이기 때문에 괴이한 일을 기록한다.
圃隱 文忠公의 5世孫인 鄭浣은 金潤生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거주했는데 생원이다. 그 아들 光胤또한 登科하여 藝文館 檢閱에 천거되었으니 名聲이 혁혁했다. 그 후 자손들이 모두 명성을 잃지 않고 朝廷에서 벼슬했으니 지금의 右相 維誠은 바로 檢閱의 5세손이다.
東萊府使 李圖男은 곧 忠順衛 金龜老의 사위인데 그 아들 光前이 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癸卯年(1543) 생원시에 장원하고 丙午年(1546)에 登科하여 承文正字를 지냈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아들 天慶은 號가 日新堂인데 일찍이 南冥 曺先生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誠意가 鐵門關” 이라는 가르침을 얻어 체득한 바가 있다. 평생토록 반드시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한 뒤 衣冠을 갖추고 家廟에 참배하고는 걸상에 단정히 앉아 하루 종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鄕人들이 廟堂에서 享祀할 만한 분이라 하면서 말할 때마다 반드시 “日新堂 日新堂”이라했다. 二子를 두었는데 장남 瑚는 기개가 있었고 季子 瑛은 풍채가 깔끔하고 학문을 겸비했으며 그 淵源은 家庭에서 나왔으니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그 동쪽 마을은 바로 淸州牧使 姜麟이 거주하던 곳인데 興安君의 4世孫 成均博士 李晁가 곧 公의 孫壻였으니 李氏의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晁가 三男을 낳았으니, 장남 惟誠이고 차남은 惟訥이며 계남은 惟說이다. 惟誠은 장원급제 하였고 惟說은 생원이 되었지만 惟訥은 누차 鄕試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모자란다고 하였다.
그러나 惟訥만이 유독 아들과 손자로 이어 능히 집안을 일으켜 世業을 전했으니 사람들이 비로소 公의 隱德이 있어 福祿이 다하지 않음을 알았다. 惟誠의 아들 瑴또한 生員이 되어 參奉에 천거 되었다.
惟誠은 벼슬이 榮川郡守에 이르렀으니 晩年에 都山의 鷹巖상류 碧溪근처 동네로 이주하여 梧月堂이라 自號했다. 물을 끌어와 못을 만들고 못 위에 정자를 지어 天雲亭이라 편액하고는 시를 지어 읊기를 “留得天雲許盪懷(유득천운허탕회: 천운을 머물게 하여 회포를 씻어내리)”라고 하였다.
權太師의 20世孫인 逵는 鄭圃隱 文忠公의 5世孫인 浣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 마을에 살았다. 뜰에다 손수 雙槐를 심어놓고 그 堂에 安分이라 편액 했으며 四子를 낳아 文顯 文著 文任 文彦이라 이름을 지었다. 君子로다. 이 사람이여!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본연의 모습대로 處身하며 벼슬도 원치 않고 많은 재물도 바라지 않으면서 오직 文이 많은 것만을 부자로 여긴 이로다. 아! 性情을 가다듬고 自足함을 아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公은 반드시 文學으로써 그 자손에게 남겨주려 하면서 그 德을 쌓고 학문을 축적했으니 아들 하나 손자 하나가 마침내 전후로 文科에 급제하여 드디어 雙槐亭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公이 전일에 德을 닦아 뒤에 보답을 받음이 마치 맞추듯 일치하니, 이는 송(宋) 진종(眞宗) 때의 진국공(晉國公) 왕호(王祜)가 집 정원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三槐亭을 지어 후대에 삼정승이 나오기를 믿었다는 것과 비교해 보건대 어떠한가!
公이 세상을 떠나자 公의 아들 文任이 公의 墓碣銘을 지었는데 한 자 한 자가 모두 엄정하고 슬픔이 극진하여 追遠永慕의 정성이 言表에 드러나 있으니 참으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하겠다. 남의 자식된 이들이 이 墓碣銘을 본다면 누군들 눈물을 흘리면서 효성스런 마음이 한없이 생겨나지 않겠는가! 하물며 자손에게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 에 말하기를 “孝子不匱永錫爾類(효자불괘영석이류 ; 효자는 다함이 없으니, 길이 닮은 이를 내린다.)”고 하였다. 이에 나는 權氏의 자손 중에 그 장차 父母에게 효도할 이가 면면히 이어질 것을 알겠으니 父親을 위해 손가락을 자른 이로서 어찌 유독 權洚(권홍)한 사람만을 꼽겠는가! 洚은 文彦의 아들이다. 文彦이 죽을 적에 洚의 나이 겨우 弱冠이었는데 父親을 위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다시 소생하게 했으니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킴은 이와 같다. 洚의 아우 渫(접)은 癸卯年 (1603) 武科에 합격했고 그 형 澤(택)의 아내 姜氏는 丁酉年 倭亂에 절개를 지켜 드디어 그 門에 旌表했다. 文顯 文著 文任 文彦은 모두 家庭의 훈도를 받아 생장했으니 그 見聞이 전부 출중하여 難兄難弟라 하였다. 그러나 유독 文顯의 自挽詩는 陶淵明의 自挽詩와는 달랐다. 淵明은 평생 술을 넉넉히 마시지 못한 것을 한탄했지만 公은 男子가 풀처럼 시드는 것을 한탄했으니 公이 평생토록 기약한 바는 淵明보다 한 단계 높았던 것이다. 선비에게는 不朽한 것이 세 가지(入德, 入功, 立言) 있는데 公이 이르기를, “忍將男子志甘與草同枯 (인장남자지감여초동고 : 차마 어찌 남자의 뜻을 품고, 풀과 같이 시들겠는가!”라고 한 一句 또한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公의 아들 濟는 登科하여 工曹佐郎이 되었는데 이는 참으로 公의 遺澤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觀相家로 성이 王氏인 자가 일찍이 여관에서 佐郞公을 보고 말하기를 “公의 相은 龍의 형태인데 얼굴과 등에 환히 빛나는 것은 모두 虎彪의 무늬로서 그 文彩가 찬연하다. 이는
필시 公의 부친께서 文章에 능했지만 及第하지 못하여 그 아들에게 文彩로 남은 것이다. 부친의 뜻과 사업을 잘 계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公의 뜻이 비록 앞에는 좌절되었지만 뒤에는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草木처럼 썩어버리겠는가! 선비 文學을 많이 닦아 그 德을 쌓은 이는 반드시 後代에 넉넉해진다. 나는 이에 公의 不朽함이 命數의 窮通에 있지 않고 文學을 많이 닦아 그 德을 쌓음에 있는 줄을 알겠다. 드디어 이를 두루 갖추어 기록한다.
제 3-4坊은 곧 文乙 部曲의 上下마을이다. 윗마을에 사는 이들은 土着人이 많은데 住民들이 부지런하여 자못 농사를 잘 짓고 있다. 아랫마을에는 部曲의 티만 남아있고 거주하는 사람은 없다.
제 5坊은 이름이 立石인데 溪上에 서 있는 돌이 있으므로 인하여 이름했다. 大丈夫 가운데 그 고요함을 사랑한 이들이 간혹 집을 짓고 거처했으나 오래 살지는 못했으니 기록하지 않는다.
제 6坊은 沙月이니 이곳은 丹城과 晉州의 접경으로 名區라 부르는 곳이다. 앞에는 시내가 있고 뒤에는 산이 있는데 산 이름은 尼丘山이고 그 위에 消怪寺가 있다. 두 姓氏가 一區를 전승하여 世居하니 黃氏와 李氏이다. 黃氏는 故 判書 孟獻의 曾孫인 棹가 生員으로 난리에 죽었고 俶은 시골에 숨어 집안에서 늙었다.
李氏는 故 興安君 5世孫으로 이름이 賀生이니 壬戌人이다. 그 담장 안의 정자 앞에 거북처럼 엎드려 있는 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 오래된 梅花 한그루가 있어 매우 기이하다. 賀生은 날 때부터 孤兒였는데 장성하자 父親喪에 服을 입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忌日이 되면 30日 전부터 흰 옷을 입고 맨 밥을 먹었으며 30日 뒤까지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70살이 되도록 이를 게을리 아니하다가 일생을 마쳤으니 “君子는 종신토록 喪을 입는다.”는 말이 이를 이른 것이다. 丁酉年 倭亂에 사방을 떠돌다가 父親 忌日이 되어 저녁 무렵 星州 多基村에 들어
가니 主人의 영접함이 매우 극진했다. 賀生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禮儀가 이리 근면합니까?”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내가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이제 그대의 모습을 보니 쓸쓸하고 애잔하여 마치 간절히 누구를 思慕하는 듯합니다. 무슨 일입니까?”라고 하였다. 賀生이 “원컨대 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꿈에 大人 한분이 이곳에 찾아와 나에게 이르기를 ”나는 丹城 사람인데 내일이 내가 죽은 날이다. 나의 아들 賀生이 오늘 저녁 필시 이곳에 와서 내일 나에게 제사를 지낼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公이 이 말을 듣고 痛哭하기를 喪을 당한 사람처럼 哀痛하게 하니 主人 또한 마주보며 눈물을 흘리다가 그 집안에 있는 음식을 모두 내어 祭需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아! 精誠은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
제 7坊은 墨谷이니 故 淸州牧使 姜沆이 살던 곳이다. 出仕한 뒤에는 그 世業을 兄의 아들 汝檣 에게 주고 晉州 元堂里로 이주했다. 또 梁山亭舍 자리가 남아있는데 완연히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제 8坊은 바로 培養山이니 곧 周氏와 文氏의 거주지이다. 周氏는 토착 성씨인데 世侯와 璟은 모두 判書였으며 璟은 孝行으로 旌閭를 받았다. 文氏 또한 토착 성씨로 이 마을에 살면서 顯達한 이가 20명이다. 그 중 判書가 2명, 提學이 2명, 學士가 2명, 獻納이 1명, 學諭가 1명, 及第한 이가 3명, 郡守 縣令이 4명, 監察이 1명, 奉正이 1명, 進士가 3명인데 그 중 한 분이 江城君 益漸이다. 한 마을의 人才가 성대함으로 말하자면 당연히 그 마을 이름을 調元里라 해야 하는데도 主上이 특명하여 孝子里라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孝라는 것은 百行의 근원으로 忠臣을 구할 적에 반드시 孝子가문에서 택한다. 江城君의 實蹟은 退溪先生이 지은 碑閣記에 적혀 있다.
그 후 이 마을에 거주한 李氏는 그 先系가 江陽人이니 尙書左僕射 景芬의 8代孫인 參軍 李通이 급제한 文承魯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 후 거주하는 자손들이 비록 富貴를 누리지는 못했으나 대대로 文學하는 선비가 이어졌다. 李源은 自號가 淸香堂이니 행실이 더욱 드러나 退溪 南冥 두 선생의 문에 종유했다. 江城君의 行義와 功德을 一國에 선양하여 아이나 하인들도 모르는 이가 없게 한 것은 모두 源에게서 나왔다. 曺先生은 교분이 매우 친밀하여 서로 더불어 “陽春曲” “白雪曲”같이 빼어난 詩를 唱和했고 또 淸香堂 八詠을 지었다. 源의 아들 光坤은 호가 松堂이니 가업을 계승했다. 源의 아우는 潛이고 潛의 아들 光友는 호가 竹閣이니 천품이 활달하고 인물이 장대하여 長子의 風度가 있었다. 아들이 없어 아우의 아들 瑜로서 그 제사를 받들게 했는데 瑜는 孝友하고 정직했으며 그 형 琛 또한 孝友하고 근엄했으니 그 家風과 遺訓이 他族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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