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등 팔방고증(新燈 八坊考證)>

新燈里의 제1坊은 新羅때 赤村縣인데 高麗에 이르러 丹溪라 개명했다. 시내 동쪽은 곧 都坪이니 이곳이 바로 丹溪縣의 옛 자리로 지금은 民田이 되어 곡식이 무성하다. 냇물은 黃梅山화에서 발원하여 그 아래로 흐르니 또한 이름을 丹溪라 한다. 시내 가운데 우뚝한 바위가 있어 妓巖이라 하는데 그 위에는 구멍이 벌집처럼 나 있으니 이는 日傘을 꽂는 구멍이다. 이곳이 縣이었던 당시 使臣으로 오는 이들이 항상 기생과 더불어 日傘을 꽂아 햇볕을 가리고 바위위에 놀면서 歌舞를 즐겼으니 이로 인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제 2坊은 곧 陽前이니 故 正言 李昌年이 살던 곳이다. 그 아들 安忠은 文科에 급제하고 또 發英試에 합격하여 벼슬이 正言에 이르렀다. 그 아들 愼孝는 監司이고 아들 祿崇은 宗簿寺正이며 아들 彭壽는 縣監으로 1男 1女를 두었는데 사위가 바로 柳夢祥이다. 夢祥의 高祖 伯逵는 工曹參議이고 曾祖 宏은 禮賓寺 少尹으로 許邕의 손자인 中郎將 㬂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線을 낳았는데 武科에 급제했다. 線은 司諫 金克用의 딸에게 장가들어 秀榮을 낳았는데 生員으로 곧 夢祥의 부친이다. 夢祥은 자식이 없어 伯逵의 曾孫 鳳山郡守 懿의 손자인 沃을 後嗣로 삼았다. 沃은 兵馬節度使 鄭世弼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元春 亨春 重春 有春이다. 有春은 武科에 급제하여 세 고을을 다스렸고 또 元從功臣으로 參判에 추증되었다. 柳氏의 여러 자손들은 모두 丹溪서쪽에 거주하니 곧 제3 坊이다.

縣의 창고가 있는데 창고 담장 밖에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으니 곧 淸心亭이다. 정자는 단계를 굽어보고 있으며 시내 위에는 또 望仙橋가 있다. 이 마을에는 또 判中樞 尹汴의 터가 있는데 權太師 18세손인 典獄署 奉事 金錫이 中樞의 外孫으로 인하여 거주하였다. 그 아들 時準은 參奉이고 손자 運은 尙衣院 別提인데 이가 4남을 낳았으니 世眞 世春 世仁 世倫이다. 世春은 別座이고 世仁은 軍器寺 判官이며 世倫은 生員이다. 世倫은 천품이 진실하고 操行이 엄정했으며 일찍 부친을 잃고 모친을 섬김에 지성을 다했으니 甘旨의 봉양과 定省의 근면함은 참으로 옛날의 孝子에 비하여도 뒤 짐이 없었다. 그 喪을 당해서는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거처하면서 비록 한추위 무더위에도 喪服을 벗지 않았고 태풍과 장마에도 省墓를 폐하지 않았으며 3년을 血泣하면서 한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미음만 계속 먹어 야윈 몸에 뼈만 앙상하더니 온갖 병이 겹쳐 寸步도 걸을 수 없게 되자 항상 여막 밖에 거적자리를 깔고 묘소를 바라보며 부복하여 종일토록 號哭하면서 執喪을 더욱 굳게 하여 조금도 해이함이 없었다. 再朞가 겨우 지나자 병이 더욱 깊어져 호흡이 가물거리고 목숨이 頃刻에 달리니 兄弟와 宗族및 이웃의 長老들이 모두 모여 눈물을 흘리며 肉汁을 권했다. 이에 말하기를 ‘禫服을 몸에 입고 있으니 차마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끝내 권유를 따르지 않다가 인하여 세상을 떠났으니 누가 感泣하지 않겠는가!

그 생전 봉양과 사후 장례의 정성을 보건대 한결같이 天性에서 나왔으니 무덤가 잣나무를 말라 죽게 한 孝誠과 피눈물을 흘린 古人의 정성도 거의 이보다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兄弟 4 이 한 마을에 살면서 형을 嚴父처럼 섬기고 아우를 사랑하여 재물을 사사로이 함이 없었으며 항상 단란하게 지내면서 서로 다투는 허물이 없었으니 友愛가 돈독했다. 나이 弱冠도 못되어 지향하는 바가 이미 정확하여 남명 조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고 덕계 오선생과 從遊했으니 善을 좋아하는 마음이 지극했다. 소시에 마을노인에게 반년 동안 修學했는데 그 사람이 죽음에 자식이 없자 즉시 찾아가 그 喪을 한결같이 禮制를 좇아 치렀으며 初喪부터 葬事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떠나지 않았고 또 상복을 지어 입었으니 그 初學의 은덕을 잊지 아니함은 사람 마음을 감동시켰다. 일찍이 성현들의 경전을 읽으면서 꼿꼿하게 端坐하여 밤새도록 정진했으니 그 행실의 돈독함과 학문의 노력 또한 古人에게 부끄러움이 없었다. 아! 부모에게 효도함이 이와 같고 형제에게 우애함이 이와 같으며 善을 좋아함이 이미 이와 같고 학문에 독실함이 또 이와 같으니 그 마음가짐과 일을 처리함이 참으로 一鄕의 善士에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살아서는 당대의 薦擧를 입지 못했고 죽어서는 후일의 旌表를 무릅쓰지 못했으니 이것이 바로 鄕人들이 그 사람을 追想하여 항시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므로 그 始末을 기록한다.

判官 世仁의 遺蹟은 吳正言이 지은 墓誌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判官은 二子를 두었으니 瀹과 濤이다. 瀹은 일찍 죽었고 아들 克亮을 두었으니 호걸스럽고 의리를 좋아하여 외조부 趙大笑軒의 기풍이 있었으며 英陵 參奉을 제수했다. 潗 濤 濬모두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潗은 壬子年 문과에 급제했고 濤와 濬은 癸丑年에 등과하여 형제 2인이 2년 사이 아울러 대과에 합격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그 후 潗은 寧海府使되었고 濤는 左承旨에 이르렀으며 濬은 光州牧使로 부임했으니 모두 벼슬이 德에 차지 못했다. 寧海府使는 黙翁, 승지는 東溪, 광주목사는 霜巖이라 自號했으니 상암의 實錄은 趙龍洲가 지은 墓碣文에 상세히 적혀있다. 영해부사의 아들 克鼎은 무과를 공부했는데 불행히 일찍 죽었다. 승지는 두 아들 克重 克斅를 두었는데 극효는 일찍 죽고 극중은 진사시에 합격했다. 부모를 섬김에 안색을 살펴 진심으로 봉양하여 승지가 매우 사랑했으나 승지보다 먼저 죽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광주목사는 세 아들 克履 克有 克謙을 두었는데 모두 儒行을 갖추어 당세에 이름이 났으며 극유는 太學에 올라 繕工監 參奉을 지냈다.

제 4坊은 晋山 柳玕의 5 世孫 副正 承潤의 거주지이다. 아들 莠는 從仕郎으로 司涓이고 그

아들 從平은 龍驤衛 副司直이며 그 아들 淵은 兵馬虞候이고 그 아들 萬禎은 長鬐縣監이다. 현감은 두 아들 宇와 宙를 두었는데 모두 忠順衛 禦侮將軍이다. 宙는 무인인데도 부모상을 치를 적에 한결같이 禮制를 따랐으니 사람들이 모두 칭송했다. 宇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報春은 임진란에 晉陽에서 전사했고 그 형 載春은 단아하고 화락한 사람이었으니 만년에 武陵으로 이주하여 자못 煙霞를 사랑하는 버릇이 있었다. 慶春의 아들 爟은 무과에 급제했는데 소시부터 雄健함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제5坊은 바로 水淸洞이니 생원 權克行의 거주지 이다. 극행의 자는 士中인데 그 조부 文著는 安分堂의 둘째 아들이다. 先世의 터전이 있었으므로 丹溪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 부친 深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 이주하여 三子 克行 克平 克明을 두었다. 극행은 소시부터 文名이 있었는데 丁酉年 난리 중에 大邱지방을 떠돌다가 方伯의 명으로 籌邊樓 上梁文을 지었다. 方伯은 바로 西平君 韓浚謙이었는데 크게 稱賞을 더하니 才名이 더욱 자자하였다. 그러나 등과하지 못하고 또 자식이 없었으니 이에 悲命賦를 지었다.

제6 坊은 바로 杜谷이니 權參議의 別莊이다. 鄭思迪 또한 이 마을에 거주했으니 무과에 급제했다.

제 7 坊은 島內이니 곧 柳池의 庶子 斗星의 거주지이다. 그 손자 得春 彦春은 모두 무과에 급제했다.

제 8 坊은 碧溪驛이니 碧溪의에 있어 이름을 붙였다.

丹溪의 淸心亭아래에 節婦門이 있는 節婦는 存齋 郭䞭의 딸로 柳文虎의 妻이다. 權東溪가 그 문에 적기를 ‘아버지와 아들 딸이 忠 孝 節에 殉死하니, 한집안의 三綱 지킴 萬古의 본보기로다.’ 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度子禮의 銘에 비유하였다.

<벼 멸구>
10월 가을 황금 빛 들판 벼논에 마치 원형 탈모증처럼 듬성듬성하게 하얗게 변한 부분을 볼 수있다.
가을철  벼수확기에 벼멸구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다. 멸구에 대해 알아보자.
- 멸구 이름
멸구는 한자로 멸충(滅蟲)으로 농작물을 멸망시키는 해충이다. 멸구는 우리말에는 특정 성질을 가진 사람이나 동·식물, 사물을 비하할 때 붙이는 접미사 '구'가 '충'대신 붙은 것이다. (예: 얼뜨기-얼뜨구, 멍청이-멍청구, 메뚜기-메뚜구)
벼멸구의 영어 이름은 생김새와 습성에 따라  Brown Planthopper (약자 BPH, Hopper: 멸구가 메뚜기처럼 잘 튀어 다니기 때문)
-. 어떻게 피해를 입히나.
벼 줄기를 이빨로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침(구침)을 줄기 속에 찔러 넣고 즙액(물기와 영양분)을 빠는 방식으로 벼를 말라죽인다.
1) 직사광선이 닿지않은 습도가 높은 볏대 아랫부분(수면 위 줄기)에 집단으로 모여 뾰족한 입을 줄기 바깥쪽 피부에 꽂아 벼가 뿌리에서 줄기와 잎으로 보내는 양분과 수분(체액)을 빨아먹는다.
2) 수천~수만 마리의 벼멸구가 동시에 흡즙을 시작하면, 벼는 뿌리로부터 올린 물과 양분을 잎까지 전달하지 못하게 되고, 또한 벼멸구가 찌른 상처 부위로 병균이 침투하거나 줄기 조직이 파괴되어 물관·체관의 기능이 마비된다.
3) 영양분과 수분을 빼앗긴 벼는 줄기 속이 비어버리고 아래쪽부터 급격히 갈색으로 변하고 말라, 포기 전체가 둥그렇게 주저앉아 말라 집단고사 (Hopperburn.주저앉음)한다.
-.원인 :
1) 중국에서 바람 타고 이동 (6~7월)
벼멸구는 추위에 약해 한국의 추운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월동하지 못한다.
매년 6월 중순~7월 하순 사이, 중국 남부 지역에서 발달한 저기압 기류(장마철 편서풍)를 타고 바다를 건너 국내 서해안과 남해안으로 날아온다. (飛來蟲, 1세대 멸구)
2) 국내 논에서의 폭발적인 자체 증식 (7~9월)
논에 정착한 멸구 암컷 한 마리는 평생 200~300개의 알을 벼 줄기 속에 낳는다. 여름철 기온이 높으면 알에서 애벌레를 거쳐 어른벌레가 되는 기간이 20~25일 정도로 매우 짧아진다. 7월에 들어온 1세대가 알을 낳아 2세대(8월 중하순)가 되고, 이들이 다시 알을 낳아 3세대(9월 초수확기)가 되면 개체 수가 처음에 비해 수백수천 배로 폭발한다.
3) 고온 지속 시 피해 극대화
늦여름과 가을철에 고온 건조하거나 다습한 날씨가 지속되면 멸구의 생육 주기가 단축되어 세대 교체가 더 빨라집니다. 따라서 수확기에 들판을 하얗게 말라죽이는 멸구 대군단은 여름 동안 국내 논에서 대를 이어 번식한 결과물이다.
-. 방제 및 대응 대책
1) 정밀 약제 살포: 벼멸구는 볏대 아랫부분(수면 위 10cm 부위)에 집중 서식하므로, 약제가 줄기 하단까지 충분히 도달할 수 있도록 정밀하게 살포해야 합니다.
2) 사전 방제: 8~9월경 논 아랫부분을 주기적으로 확인하여 밀도가 높아지기 전 초기에 방제해야 합니다.
3) 논물 관리 및 통풍: 물을 빼주어 논 안의 습도를 낮추고 통풍이 잘되도록 관리하면 번식 억제에 도움이 된다.

멸구

<法勿禮里入坊考證>

法勿禮里는 寶巖山 아래 있는데 중간에 시내가 있고 마을은 東西로 나뉘어 있다. 이곳은 吏部典書 허옹(邕)이 살던 곳이다. 邕은 高麗末 時政이 장차 어지러움을 보고는 朝廷에서 용납될 수 없음을 알았으니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비로소 丹溪의 시내위에 자리를 잡았다. 이에 집을 지어놓고 絶句詩를 읊어 이르기를,

“世間耳目事章章 一有眞言謂發狂 卷却談王三寸舌 丹溪湥處置茅堂

(세간이목사장장 일유진언위발광 권각담왕삼촌설 단계돌처치모당)

世間의 耳目들은 일마다 두려우니, 한번 진실한 말하면 미쳤다고 한다네.

王道를 애기하던 세치 혀 다물고는, 단계 물흐르는 자리에 초당을 지었네.“라고 하였다.

그 후 法勿禮里 寶巖山 아래로 이주했으니 이는 公이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자 함

이다. 이에 革命의 때를 당하여 새 왕조를 섬기지 않고 志節을 숭상함이 어떠했겠는가!

許邕의 아들 少遊는 掌令이 되어 直諫하다가 조정에 미움을 사 開城少尹으로 좌천되었다. 洪武 癸亥年(1383)에 母親喪을 당하자 3년 동안 侍墓하면서 喪服을 벗지 않았고 항상 枕席에 엎드려 주야로 號哭하였다. 당시 倭寇가 쳐들어왔다가 또한 그 孝誠에 감동하여 서로 경계하면서 감히 핍박하지 않기를 柳下惠의 무덤같이 하였다. 조선에 와서 그 정려를 내렸는데 勝覽에는 이른바 許季道라 되어있다. 이는 곧 少遊가 改名한 이름인데 당시 기록하는 사람이 이를

살피지 못한 것이다. 아들은 우(喁)로 中郎將이고 손자는 成孫으로 生員이다.

典書 張綱은 許典書의 사위다. 이곳에서 살다가 딸 하나를 얻어 시집보내니 商山 金後이다. 호는 丹丘齋요 官은 直提學에 이르렀으나 시류에서 勇退함으로서 禍를 면하였으며 그 뜻을 한 수의 絶句에 부쳤다.

公의 벼슬이 그 德에 미치지 못했고 壽도 짧아 겨우 33세에 歿하였다. 公의 아들은 張인데 나이 겨우 20에 登科하여 24세에 歿하니 하늘이 주었다가 빼앗은 소이를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아들은 3兄弟로 첫째 克用은 登第하여 벼슬이 司諫에 이르고 둘째 利用은 登第하여 持平이고, 셋째 貞用은 登第하여 承文院博士이다. 貞用의 아들은 둘인데 光礪, 光範이다. 모두 司馬에 오르고 光礪의 아들 達生은 벼슬이 持平이며, 光範의 아들 守敦은 호가 遠復齊로 兵曹正郎이다. 守敦은 나면서부터 미남으로 일찍이 翰林으로 있을 때 임금께서 항상 美翰林이라고 칭찬하였다. 임금의 총애가 이와 같았는데도 승진 발탁이 못된 것은 결국 하늘의 뜻이다. 아우 益敦은 進士로 自號 治田堂이다. 詩를 지어 읊기를,

“胸懷何淡淨 卜築更幽湥 白石長年科 玄琴太古音

園中侵藥畝 江上洗塵襟 眞趣渾如此 丹墀肯獻箴

(흉회하담정 복축경유돌 백석장년과 현금태고음

원중침약무 강상세진금 진취혼여차 단지긍헌잠)

마음에 품은 생각 어찌 그리 淡白 한가, 그윽한 계곡에 다시 집을 지었다네.

白石은 長壽할 식량이요, 玄琴은 太古의 소리로다.

정원에서 약초밭 김을 매고, 江上에서 먼지 옷깃 씻는다네.

참된 흥취 물 흐르는 것과 같으니, 무슨 일로 대궐에 獻策하라!“ 라고 하였다.

遠復齊의 아들은 넷인데 澂,沖,湛,濂이고, 治田堂의 아들 다섯은 氵賀,灠,潚,滾,浚이다. 沖은 10세전에 글재주가 크게 뛰어나더니 14세에 漢城試에서 鼎字賦로 壯元하고 또 密陽院樓에 4韻을 題하였다. 湛역시 文章으로 이름이 나고 두 번이나 文科 壯元을 하였으나 모두 忌諱사항에 저축되어 물러나고 말았다. 임종시 막내 아우인이 濂이 울면서 銘旌을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하고 청하였더니 혼절했다가 다시 깨어나 소리 내어 1句를 읊기를,

“靑年壯志驚神鬼 白首虛名愧古今 (청년장지경신귀 백수허명괴고금)

젊을 때 큰 포부 귀신도 놀랬건만, 늙어서 헛된 이름 고금에 부끄럽다.” 하고는 逝去하니 호는 汲古齊이고 文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濂은 文科에 올라 翰林學士로 있다가 外職인 韓山郡守를 지냈다. 일찍이 물가에 집을 지어

挹虛亭이라 편액하고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호를 三休堂이라 하였다. 氵賀는 일찍이 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곧 科擧를 포기하고 대청의 섬돌아래 세 그루의 梅花를 손수 심고 三梅堂이라 하였다. 공은 소시에 矗石樓 연회에서 시를 읊었는데,

“角聲三動小車來 朱戶靑窓次第開 粉面低睂聯席坐 珍羞厭口八盤堆

歌警谷鳥黃莊葉 鼓起沙鷗白點苔 盡日偷閒猶未足 更看明月照樓臺

(각성삼동소거래 주호청창차제개 분면저미연석좌 진수염구팔반퇴

가경곡조황장엽 고기사구백점태 진일투한유미족 경간명월조루대)

뿔피리 세 번 울려 작은 수레 타고오니, 붉은 문 푸른 창이 차례로 열리구나.

화장한 여인들 눈썹 깔고 자리 연해 앉았고, 진귀한 음식 배불리 먹고도 쟁반에 쌓였구나.

노래 소리에 꾀꼬리도 놀라 잎 속으로 숨어들고, 북소리에 갈매기들은 모래밭에 점점이 앉아있네. 하루 종일 놀아도 오히려 부족하여, 다시 바라보니 명월이 축석누대 비추는구나.“

라고 하였다.

濂은 일찍이 奇才를 타고 났으며 특히 詩에 능했으니 擇木知幽鳥라는 詩로 及第하였다. 浚은

은 進士가 되었으나 大科를 포기하고 호를 三足齊라 지어 하는 말이 "書는 姓名을 기록하면 足하고, 名은 進士에 들면 足하며, 食은 죽을 이을 정도면 足하다"고 하였다. 晩年에 新安江위를 노닐면서 "江山을 모두 後人에게 부치노라"라는 詩를 지어 읊고 얼마 못되어 別世하였으니 사람들이 詩로써 조짐을 보인 것이라 하였다. 一家의 형제 9인중 8文章이라 칭하는데 혹은 불행하여 短命하고 혹은 재능이 있어도 낙방하고 혹은 登第하였으나 顯達하지 못했으니 “文章은 壽命과 榮達을 싫어한다.”는 속담이 참으로 빈 말이 아니다. 三休堂든 아들이 4형제인데 勉之, 勖之, 勵之, 養力之이니 모두 일찍 죽었다. 養力之는 지조가 질박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읊은 詩에 이르기를,

“爲樂都緣欲樂心 樂心何事反勞心 勞盡心來成一樂 不如無樂只安心

(위락도연욕락심 락심하사반로심 로진심래성일락 불여무락지안심)

즐거움은 마음이 즐거워야 하는데, 즐거운 마음 무엇 때문에 근심일까?

마음 고생 다한 다음 즐거움이 이루어지니, 즐거움 없는 편안한 마음만 못하다네.“

라고 하였다.

三足齊의 아들은 3형제인데 景訥, 景訒, 景謹이다.

景訥은 일찍이 文才가 있어 연이어 鄕試에 세 번이나 합격하였으나 會試에는 실패하고 돌아오는 즉시 발분하여 붓을 던지고 癸未(1583) 武科에 登第 벼슬이 務安縣監에 이르렀다. 宣祖때 宣傳官으로 있으면서 임금의 총애로 누차 상을 받았는데 하사받은 諺解小學은 그 자손들이 상자 안에 寶藏하고 있다. 아들은 하나인데 이름이 應虎한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하였고 겨우 10세에 季父인 大瑕齋를 따라 嚴惠寺에 놀러 가서 지은 시가 있어 이르기를,

“曉到嚴惠寺 寒鐘第一敲 餘聲渡江水 眠鶴起松梢

(효도엄혜사 한종제일고 여성도강수 면학기송초)

새벽에 도착하니, 처량한 종소리 제일 먼저 올린다.

소리 남아 강물을 건너가니, 졸던 학이 소나무 가지에서 일어난다.“라고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하였으며 傳誦하였으며 癸卯(1603) 武科에 登第하여 벼슬이 僉正에 이르렀다.

아들은 複文으로 庚寅年에 낳으니 大瑕齋가 기뻐하면서 僉正을 불러 이르기를 "항상 네가 武科로 나간것이 恨이었는데 이번에 네가 生男을 하니 天幸으로 우리 가문의 경사로다. 공자와 석가가 친히 안고 와서 庚寅年에 낳게 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느냐. 庚寅은 屈原이 태어난 해인데다가 더욱이 庚자는 호랑이니라. 周易에 이르기를 “豹虎는 문채가 화려하다.”하였고 黃山谷 詩에 가로대 “謝公의 문장은 豹虎문채 같으니, 지금 어린 손자 몸에 찬연히 박혀있네."라고 했다. 우리 先世의 호표같은 문장을 장차 네 아들이 復舊하여 반듯이 문채가 찬연할 것이다. 그 이름을 複文이라 하고 字를 克彬이라 하라" 하니 僉正공은 季父의 가르침대로 기쁘게 따랐다. 克彬이 장성하면서 매우 총명하여 한번 듣고 본 것은 그 때마다 다 암송하고 때때로 입을 열어 시를 읊으면 많은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僉正공이 항상 叔父의 가르침대로 勤勉하니 克彬도 또한 이를 본받아 스스로 학과에 힘써 先世의 業미인 文을 거의 回復할 것 같았다. 그러나 세번 科擧에 응시하여 끝내 한 번도 성취하지 못하고 나이 겨우 40에 卒하여 선세의 업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그 天命이야 어찌 하겠는가?

景訒은 일찍이 文藝를 닦아 누차 과거에 응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늦게야 붓을 던지고 癸卯(1603) 武科에 응시 登第하였다. 공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困窮과 榮達은 모두 天命에 달렸으니 文武科에 등제하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나의 아우 景謹이 일찍이 꿈을 꾸고서 이를 기록해 두었다가 나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조카 應虎와 함께 靑黑色 호랑이 한 마리를 제압하여 그 등에 타고 叔姪이 나란히 큰 골짜기에 들어가 큰 波濤위를 내달리며 의기양양하게 좋아하더란다. 내 아우가 쳐다보고 처음에는 놀랐다가 나중에 기뻐하면서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碧桃紅杏이 머리위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함으로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지금 우리 叔姪이 나란히 같이 虎榜에 합격한 것은 나의 아우가 20년 전 꿈에서 그 징조를 보았던 것이다. 謝良佐가 이른바 몽매간의 일은 바로 성취하지 못하고 초조하게 바라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런 경우를 이른 것인가? 그러나 내 어찌 이로써 榮達이라하여 權貴의 門에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결국은 名利를 쫓는 무리로 전락하겠는가? 이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오두막에서 老年을 한가하게 보내는 것이 나의 初志를 굽히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들은 셋인데 應奎, 應斗, 應翼이다. 應奎는 언변이 좋고 應斗는 詩賦를 잘 하였다.

 

景謹은 어릴 때부터 君子의 學問을 배워 매사에 감히 자신하지 않았다. 일찍이 覺齋 河先生이 門下에서 禮義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으며 南冥 曺先生의 門下에 미치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였다. 그 학문은 經史를 근본으로 하고 古今을 證據하여 論議가 英發하고 風貌가 늠름하여 사람들이 모두 삼가하고 두려워하였다. 조정에서 공의 風儀를 듣고 持平벼슬을 제수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異議를 제기하는 자가 있어 이루지 못하였다. 일찍이 自號를 大瑕齋라 하였다.

진주목사 崔岦을 방문하고 시를 지어 贈呈하였는데 이르기를,

“진주목사 松川은 글이 가장 특출하니, 두 편 詩는 古人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吏民들은 문장이 귀한 줄 모르고, 오직 베푼 은택만을 애기하네.“라고 하였다.

崔牧使가 이 詩를 보고 謝禮하였다. 임진년에 공이 왜란을 피하여 星州에 갔다가 省墓차 三嘉에서 丹城오는 사이 길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賊을 만나 屈하지 않고 殉死하였다.

東坊에 터가 하나 있는데 노래하고 춤추는 누대의 돌계단이 있다.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 府院君이 이 마음에 살았는데 부유하기가 王侯와 같아 그 부인 蔡氏가 매양 가마를 타고 나와 上下 山坂을 누비며 사냥하고 돌아다녔으니 음란한 탕아와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럼으로 지금까지 蔡氏의 姓만 전하고 主君의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집안 다스림이 이와 같았으니 그 성명이 전하지 않음은 당연하다.

제 3坊 岐內는 山陰縣監 柳東成이 살던 곳인데 進士 柳夢禎이 孝子라고 이 坊에 살았다고 하나 모두 전하지 못한다. 또 茂松尹氏가 있었는데 그 先은 文貞公 澤이고 六世孫 左議政 江이 처음으로 丹溪에 살았다. 그 아들 汴은 判中樞이고 그 아들 子榮은 문과로 장원하고 또 重試에 장원하여 또 發英試에도 합격하였다. 그 후 자손들은 서울로 가고 子榮의 형의 아들 濂은 생원이고, 생원의 아들 浚은 진사이며, 진사의 아들은 彦洙인데 또한 진사다. 姜許孫의 사위가 되어 三嘉의 丘坪으로 이거하였다. 아들 佑賢은 禮賓寺直長이고 그 아들 沂은 金慶山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 坊에서 살았는데 喪妻하고 後妻는 아들이 둘인데 景溟은 登武科하고 景洛은 軍器寺奉事다.

제 4坊은 內法勿禮이니 시내 위 골짜기에 암굴이 있고 폭포가 있어 물이 날고 맑아 옛날부터

漱玉泉이라 稱하였다. 10년 전부터 沙鐵이 많이 나와 그것을 캐어내는 바람에 淸流가 혼탁하여 그 害가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미쳤으나 주민들이 이를 금하지 못했다.

제 5坊은 곧 慕禮다. 奉事 尹京洛이 살만한 곳이라고 터를 잡아 이사 온 곳으로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그 자손이다. 그 위 5里 거리에 栗谷寺가 있다.

제 8坊은 大老里로 옛날에 대장부들이 살던 곳인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그 뒤 농사를 짓는 백성들이 밭 갈고 논을 갈면서 간혹 金銀寶貨를 주었다고 하니 人才가 성했던 마을이었던 모양이다. 또한 孝子로 旌表가 있는 사람, 烈女, 貞節의 旌閭를 받은 사람이 각 하나씩이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대로 높은 벼슬아치들이 살던 마을이 틀림없는 것 같다.

<단성 사직제(社稷祭)>
농경문화의 전통은 수천년이상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일년 농사의 풍년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기위해 땅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에게 제를 올리는 사직제가 있다.
산청 단성 사직단(단성면 내원마을 소재)祭는 이 전통을 지역 향교에서 주관하고 지역농협조합에서 후원하여 매년 봄과 가을에 봉행한다. 올해 가을에도 9월 21일(음8월 첫戊일) 단성향교 유림들과 농협직원,마을 주민들 30여명이 이른 아침에 모여 지냈다.
산청군 단성면 내원마을에 소재한 단성 사직단(社稷壇)은 제단 축조 방식이 잘 보존 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경상남도 기념물255호)
조선이후 서울 사직단을 비롯한 전국의 사직단에서 공식적으로 지내던 사직제가, 일제강점기에 민족문화말살 정책으로 중단되었다.  단성 사직단에서는 일제시대에도 지역 주민과 유림들이 일제의 눈을 피해 자발적으로 사직제를 지냈으며, 현재까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타지역에서 보기 힘든 산청 단성의 귀중한 문화자산이다. 면단위(산청 단성면)에서 이런 전통을 끊기지 않고 내려오는게 소중하다. 오랫동안 지켜오는 전통은 현대의 빠른 변화에서도 유지해 나가는 힘이있다. 단성사직단제가 그 예인 것이다.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_ 진주정씨

진주정씨(晋州鄭氏)는 다른 말로 진양정씨(晉陽鄭氏)라고도 한다. 진양이 1995년 진주시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진주정씨로 명명되고 있다. 진주정씨는 신라 건국 6부족의 하나인 진지부의 지백호(智伯虎)를 원시조로 한다. 하지만, 지백호 이후의 계대가 밝혀진 바가 없어 이를 증명할 길은 없다.

진주정씨에는 뿌리가 다른 여덟 계통의 정씨가 있다. 이를 진주8정(晋州八鄭)이라고 한다. 이들은 동성동본이면서도 세계를 달리하는 여러 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를 비롯한 문헌에 따르면, 진주정씨는 12파가 있다고 전하나, 정확한 소목은 밝힐 수 없고 현존하는 계파는 8계통이라고 볼 수 있다. 그중 4개 파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예(鄭藝), 정자우(鄭子友), 정장(鄭莊), 정헌(鄭櫶)을 시조로 하는 4계통이 그것이다.

 

충장공파(忠莊公派)는 고려통합벽상삼한공신(高麗統合壁上三韓功臣)으로 광록대부(光祿大夫)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정예를 시조로 한다. 그 후 계대로 전해 내려오지 않다가 제학공(提學公) 정시양(鄭時陽)에서부터 계대가 확실해 정시양을 기세조로 삼고 있다. 정시양은 고려 문종 때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의 시조는 진주호장(晉州戶長)을 지낸 정자우이다. 그의 6세손으로 고려 현종 때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에 봉해진 정신열(鄭臣烈)을 중조(中祖)로 하는 파(派)와 7세손 정중공(鄭仲恭)을 중조로 하는 파, 8세손인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정보경(鄭普卿)을 중조로 하는 파로 나누어진다.

공대공파(恭戴公派)의 시조는 정장이다. 정장은 고려 말엽에 통정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를 지냈다. 그의 4세손인 정척(鄭陟)은 조선 태종 때 판윤(判尹)을 지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파도 있다.

정헌계(鄭櫶系)의 시조 정헌은 고려 말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둘째 아들 정택(鄭澤)은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어사공파(御史公派)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계통으로 이뤄진 진주정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1명,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59명을 배출했으며, 정척(鄭陟)·정성근(鄭誠謹) 등 2명의 청백리를 배출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총 7만4777가구에 23만85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진주정씨의 갈래와 내력
첫째, 진주정씨 충장공파는 고려 통합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으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영절공 정예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 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정시양을 기세조로 받들고 있다.
정시양의 7세손 정수(鄭需)는 판도좌랑과 좌사간을 역임하고 진양부원군에 봉해졌고, 이로써 충장공파의 가세가 크게 일어났다. 그의 후손 정을보(鄭乙輔)는 정당문학과 도감제조를 역임했으며, 후에 청천군에 봉해지고, 찬성사에 올랐다(공민왕).
숭정대부로 찬성사를 역임했던 정신중(鄭臣重)의 아들 정이오(鄭以吾)는 조선 태종 때의 명신으로 찬성과 대제학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인 정분(鄭?)은 세종과 문종 조에 걸쳐 조정의 중신으로 많은 치적을 남겼고,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나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의 반대파로 몰려 사사(賜死)되었다.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皇甫仁), 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그도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고신(告身)을 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이후 대신과 대간의 빈번한 청죄(請罪)가 계속되었지만, 1년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 사사되었다.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기국(器局)이 있었다. 문신이지만 토목에 조예가 깊어, 세종 말에서 단종 초에 걸쳐 궁궐 조성·축성, 현릉(顯陵, 문종묘) 조성 등에 공헌했다. 그의 사후 영조 때 가서야 김종서, 황보인과 함께 복권되었다(영조 22). 정조 때에는 장흥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고, 장릉(莊陵) 충신단에도 배식(配食)되었다. 순조 때에는 충신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정문을 세웠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진주정씨 충장공파인 정신중, 아들 정이오, 손자 정분 등 3대 묘가 있는 진주시 상대동 고분군에 있으며, 충장공 정분이 배향된 전남 장흥의 충렬사가 있다.

둘째, 은열공파는 고려조에서 호장을 지낸 정자우의 후손이다. 그의 6세손 정신열이 고려 현종 때 천거되어 여러 직을 거친 후 병부상서에 올라 거란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올라 진양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인 선주지사 정임덕(鄭任德)의 아들 정유(鄭愈)와 정손(鄭孫)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부사가 되었던 정천익(鄭千益)은 당시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왔다가 사위인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씨를 재배하여 물레와 씨아를 창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은열공파 정신렬을 제향한 진주 촉석루 내 청계서원이 있다.

셋째, 통정대부로 첨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던 정장을 파조로 하는 공대공파에서는 세종조의 명신인 정척이 뛰어났다. 정척은 교서관 정자를 거쳐 봉상시 주부와 감찰을 지내고 판한성부사. 수문전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세조 때에는 양성지와 함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편찬했다.

정척의 아들 정성근은 성종 때 대마도에 사신으로 갔을 때 대마도주가 문 밖에 나와 왕명을 받지 않자, 두번 세번 독촉하여 왕명을 받도록 했다고 한다. 그는 효성이 지극해 연산군의 단상법(短喪法)을 어기고 3년 상을 치렀고, 성종이 승하하였을 때에도 3년 상을 행하니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려 죽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그러자 그의 아들인 승문원 박사 정주신(鄭舟臣)은 단식으로 목숨을 끊었고, 아우 정매신(鄭梅臣)과 아들 정원린(鄭元麟), 정원기(鄭元麒), 정매신의 손자 정효성(鄭孝成)이 모두 효행이 뛰어나 4대에 걸쳐 6명의 정문이 세워졌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되자, 전남 광양군으로 피란했다가 정착한 정대유(鄭大有)와 그의 아들 5형제의 후손들이 광양지방에 집중 세거하고 있다. 
경기 하남 초이동에는 진주정씨 공대공파 정척의 묘역이 있다.

넷째, 문하시중평장사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던 정헌의 계통에서는 그의 손자 정온(鄭溫)이 청맹(靑盲)으로 유명했다. 그는 대사간을 역임하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눈 뜬 장님을 가장하고 지리산 청학동에 숨어 살았다.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가 수차례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매서운 절개를 지켰다. 태종이 사람을 보내서 칼로 눈을 찌르는 흉내를 내어 보았으나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온의 아우로 고려 말에 감찰어사를 지낸 정택의 10세손인 정경세(鄭經世)는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성리학자인 사계 김장생과 함께 우리나라 예학(禮學)의 주축을 이뤘다. 시문과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우복집(愚伏集)’ ‘상례참고(喪體參考)’ ‘주문작해(朱文酌解)’ 등이 있다.
진주시 사곡에는 우공공파 시조 정온이 귀향하여 조용히 지내고자 지은 우곡정이 있다.

다섯째, 정자우의 후손이며, 고려 때 첨정(僉正)을 지낸 정중공을 파조로 하는 계통에서는 15세손 정기룡이 유명하다. 그는 초명(初名)이 정무수(鄭茂壽)였으나, 나중에 정기룡(鄭起龍)으로 개명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과 금산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곤양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방어했다. 상주판관으로 상주성을 탈환한 후 성주·합천·초계·의령·고령 등지의 여러 성을 탈환하는 데 이름을 떨쳤다.

이외에도 정신(鄭侁)을 시조로 하는 지후공파(祗侯公派), 정안교(鄭安校)를 시조로 하는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 등이 있다.

진주정씨의 인물들

▲충장공파에서는 고려개국공신으로 문하시중에 오른 시조 정예가 있으며, ‘고려사’를 편찬한 정이오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을보는 공민왕 때 찬성사가 되었으며, 문영공(文英公) 정수는 대제학을 지냈고, 문영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정수규는 정당문학을, 정천귀는 대제학을 지냈으며, 충장공 정분은 정이오의 아들로 단종 때 우의정에 올랐으나, 세조의 계유정난으로 죽음을 맞았다.

▲은열공파에서는 시조 정자우가 고려 때 호장을 지냈으며, 6세손인 정신열은 병부상서에 올라 거란침공을 격퇴하였다. 공민왕 때 정천익은 사위인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오자 이를 시배(始培)하여 물레와 씨아를 창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자우의 후손으로 첨정을 지낸 정중공은 첨정공파의 시조가 되었으며, 정기용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공대공파에서는 시조 정장이 고려 말에 통정첨지를 지냈으며, 4세손 정척은 조선 태종 때 판윤을 지냈다.

▲어사공파에서는 시조 정헌이 고려 말에 평장사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정온(우곡)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냈고, 우곡공파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손자 정택은 고려 때 감찰어사를 지내, 어사공파를 이었다. 정택의 10세손 정경세는 조선조 대제학을 지내고 김장생과 함께 조선 예학파를 대표한다.

그외 지후공파의 시조 정선은 고려 때 지후에 올랐으며, 내부사공파의 시조 정안교는 고려 때 판내부사를 지냈다.

진주정씨의 현대인물로는 정일형(유엔총회 한국대표, 국회의원, 외무장관, 신민당부총재) 박사와 그의 아들 정대철(국회의원)이 있으며, 그외 국회의원으로 정세환 정헌주 정준 정상용 정균환 정동호 정상열 정갑주 정재완 정순덕 등이 있고, 서울시장을 역임한 정상천 변호사도 진주정씨이다. 또한 법조계에서는 정기승(대법판사), 정창운(검찰총장)과 변호사로 정덕기, 정창훈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교육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원식 총리가 있으며, 정정환(부산대 대학원장), 정운오(미 일리노이주립대 교수), 정재환(법학박사, 동아대 총장), 정수봉(법학박사, 동국대 총장), 정재각(문학박사, 동국대 총장), 정동규(약학박사, 숙명여대 약대 학장), 정요한(이학박사, 조선대 교수)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정주영(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정재구(제일제당 사장) 등이 있다.

김성회 /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https://n.news.naver.com/article/022/0002477854

<北洞入坊考證>

北洞里는 屯鐵山 아래 빙 둘러 있는데 주위가 10里이고 중국 巴楚의 明月협곡과 같으므로 그 위에 月明寺가 있다. 골짜기는 맑은 시내를 끼고 있는데 시내 위, 중간, 아래, 左右에 다섯 마

을이 있다. 제 1坊은 곧 시내 아래인데 羅氏와 鄭氏가 살고 있다. 鄭禮明이란 사람은 벼슬이 淸州牧使이고 그 아들 仲孫은 또 武科에 급제하여 內禁衛를 지냈다. 비록 벼슬이 崇班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 財産이 王公에 비할 만하여 凶年에 능히 9郡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으니 당시 사람들이 입이 닳도록 칭송했다. 아들은 없고 딸만 있었는데 正武公의 아들 李處仁에게 시집보내어 그 집안을 전했다.

羅氏는 判書 廷老가 이 사람이다. 그 아들 有文은 燕山朝에 短喪法이 엄하던 시절 母親이 죽었는데 홀로 執喪을 禮대로 행하다가 슬픔으로 몸을 훼손하여 병이 들었다. 그 아내와 永訣하며 말하기를 “3년 동안 어머니 祭祀하기를 내가 살아있을 때와 같게 하라.”고 하니 아내가 그 말을 따라 비록 風雪이 몰아쳐도 반드시 墓祭를 친히 드리면서 폐하지 않았다. 이 일이 朝庭에 알려지자 有文과 아내 李氏에게 모두 旌閭를 내렸다. 天道가 무심하여 晉나라 鄧伯道처럼 자식이 없었으니 羅氏의 世傳家業은 모두 判書의 사위인 姜儉에게 돌아갔다. 儉은 晉陽人인

데 장원급제하여 버슬이 郡守에 이르렀다. 俗傳하기를 儉은 少時에 月明寺에서 讀書했는데 꿈에 한 僧侶가 간곡히 고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미 땅속 괴물이 된지 오래 되었으니 어찌 배가 고프지 않겠는가! 그대가 만약 나로 하여금 다시 天日을 보게 하고 중들의 供養을 먹게 해준다면 원하는 바를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儉이 즉시 家僮과 寺僧을 데리고 뜰 가운데를 석 자나 팠지만 아무 것도 없으므로 허망한 꿈이라 여겼다. 그날 밤 또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만약 다시 한 자만 더 파면 효험을 볼 것이다.”라고 하므로 그 말대로 다시 파니 과연 七尺 石佛이 있었다. 諸僧이 합장하고 賀禮하며 말하기를 “선비께서는 필시 이제부터 陞進할 것입니다.” 라고 하더니 5-6년이 못되어 과연 登科하였다. 儉이 일찍이 스스로 얘기한 것이 지금까지 전한다.

제 2坊은 곧 시내 중간인데 이곳은 正武公의 손자 義淳이 살았다. 그 아들 繼裕는 5명을 낳았으니 장남은 昱(욱)이고 다음은 昌(창)이며 다음은 曇(담)이고 다음은 暹(섬)이고 다음은 晁(조)이다. 昱은 능히 儒者로 처신했고 昌과 晁는 아울러 文科에 급제했다. 公이 세상을 떠나자 公의 아들 三陟府使 昌이 公의 墓碣銘을 지었는데 5代의 일을 매우 상세하게 적었다. 그러나 유독 神德王后와 慶順公主에 관해서는 그 글이 소략하여 大體를 볼 수 없으니 무엇 때문인가? 公이 알면서도 상세히 적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몰라서 상세히 적지 않은 것인가? 살펴보건대, 洪武25년(1392)에 景武公에게 鐵券을 하사했으니 이에 말하기를 “卿의 어머니를 惠寜翁主에 봉하고 卿의 아내를 慶順宮主라 명했으니 君親의 思念을 더욱 돈독히 하고 장인

과 사위의 恩義를 소홀히 말라.“고 하였다. 그 君親의 은덕과 의리가 지극하여 마땅히 沁水(東漢 明帝의 딸인 沁水公主의 園林이 있던 곳으로 여기서는 慶順公主의 田庄을 비유한 듯함)를 오래 보전하고 蘭陵(梁나라 武帝의 어머니인 張后의 陵이 있는 곳으로 여기서는 神德王后의 陵을 비유한 듯함)을 길이 수호하여 무궁토록 慶事를 전할 것 같았다. 그러나 數世도 미치지 못해 800리 밖으로 유배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공주를 시집보낸 것은 신덕왕후 康氏에 의해서인데 신덕왕후의 릉은 太宗朝에 헐어버렸고 그 자손들의 유배도 또한 太宗朝에 있었던 일이다. 그 후 世宗朝에 芳碩을 昭悼公에 추증했고 明宗朝에 이르러 신덕왕후의 릉을 복원하려 했지만 릉의 소재를 알지 못해 안치하지 못했다. 公 또한 5世孫으로 부름을 받고 御前에 나가 아뢰었는데 그 말이 ”신의 祖父는 800리 밖으로 유배되었으니 朝廷의 명령을 받지도 않고 어찌 감히 사사로이 展謁하여 그 墓를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公은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알면서도 상세히 적지 않았다는 것은 타당한가? 碑石에 뚜렷이 새기는 것은 장차 자손에게 보이려는 것이니 어찌 상세히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孔子께서 魯나라 諸侯의 일을 諱隱한 것처럼 그렇게 한 것이라면 公의 墓碣銘은 부실하게 기록하여 그 사실을 분명히 밝히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으니 先朝를 추념하고 後孫을 생각하는 계책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昱의 아들 중에 장남은 惟謙이니 惟謙은 자녀의 도리를 다하고 學問하는 일에 근면했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惟謙의 아들 垠 또한 강개한 기질에 讀書를 즐겨하면서 出世하여 집안은 일으키려 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惟謹의 아들 垤은 節義를 지켜 安貧면서 자손을 많이 두었다.

제 3坊은 곤 시내 오른쪽이니 이곳은 武科 급제한 從仕郎 李處仁의 터인데 壯元한 李智亨의 아들 生員 翕(흡)이 處仁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에 살았다. 參判 朴聰의 4世孫인 寅亮은 곧 翕의 孫壻인데 寅亮은 평생 儒業을 행하고 一身을 삼가하며 博學했으나 끝내 科擧에 합격하지 못했다. 公의 父親 蓁(진)도 누차 科擧에 실패했고 아들 楣(미)도 또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여 朴氏 3代가 세 번이나 落榜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資憲大夫 領中樞 剛莊公 河漢의 손자인 恒이 李義淳의 딸에게 장가들어 또한 이 마을에 살았다. 그 손자 汝灌은 武科에 급제하여 訓鍊院 僉正이 되었다.

 

제 4坊은 바로 시내 왼쪽인데 이곳은 光陽縣監 姜行의 거주지이다. 그 아들 文會는 典籍이고 그 손자 顯은 判書이나 바로 惠平公이다. 公은 弱冠時 또래 몇 명과 더불어 鄕校에서 讀書하다가 凉亭에 술이 익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네 사람이 밤중에 항아리 있는 곳에 들어가 술 항아리를 짊어지고는 달아나 江樓위에 이르러 한껏 마시고 놀다가 돌아갔다. 이에 각기 七言詩 1句로 그 일을 읊었으니 그 詩에 이르기를,

“晉代疎光畢吏部 風流千載付吾儕 偸來夜半無人縛 大醉還山月欲低”

(진대소광필리부 풍류천재부오제 투래야반무인박 대취환산월욕저)

 

晉나라 괴짜 술꾼 필리부 그 풍류로 천년 흘러 우리에게 전해졌네.

한밤중에 훔쳐와도 잡아 묶는 사람 없어, 大醉하여 돌아오니 달이 이미 지려하네.“

라고 하였다. 그 末句가 바로 判書가 읊은 것이니 사람들이 그 大成할 것을 알았다.

(* 畢吏部 : 晉나라 吏部郞을 지낸 畢卓,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무척 좋아했는데 한번은 이웃집에 술이 익자 밤중에 몰래 들어가 술항아리 곁에서 훔쳐 마시다가 주인에게 들켜 밤새도록 묶여 있었다고 함.)

이 마을에 또 八莒君 都有德의 11世孫인 著作郞 希齡의 거쳐가 있다. 希齡은 咸陽人으로 少時부터 文章을 닦아서 붓을 잡으면 즉시 써내려가 사람들이 모두 傳誦했는데 불행히도 短命했다. 著作郞의 아들 敬孝는 字가 一源인데 어려서 孤兒가 되었지만 일찍 성숙했으니 外祖母 梁氏가 유달리 사랑했다. 梁氏는 進士 應鯤의 딸로 參奉 起門의 아내이니 儒家에서 생장하여 見聞이 넓고 詩禮에 익숙했다. 항상 무릎 위에 앉혀놓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으로 글을 가르

치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鳳毛처럼 유달리 특출하여 능히 제 아비를 이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성하여 文詞에 크게 힘을 쏟더니 詩에 더욱 뛰어나 神技에 가까운 글귀를 연달아 지었으므로 諸人들이 모두 따를 수가 없었다. 누차 科場에서 이름을 날려 벼슬길에 오르는 일을 단숨에 기대했으나 나갈 때마다 실패하고 또 액운이 겹치자 드디어 세상에 뜻을 끊고는 인하여 病隱이라 自號했다. 당시 金大瑕子 李梧月堂 吳德溪 諸賢 모두 절친한 벗으로 서로 더불어 推重했다. 德溪가 일찍이 말하기를 “先親께서 一源의 先大人과 더불어 왕래함이 一家와 같았으므로 나도 일원과 더불어 또한 兄弟의 情義가 있다.”고 하였다. (1521년생 吳德溪는 1556년생 病隱보다 나이가 35세 많고, 병은의 부친인 1539년생 著作郞 보다도 18세가 많으니 아마 착오가 있는 듯 함) 病隱은 二子를 두었으니 장남 聖欽은 先世의 풍골을 지녀 武藝를 좋아했다. 차남 聖兪는 字가 鄰哉인데 모습이 古風스럽고 마음이 활달하며 言辭가 유창하고 理致에 통달했으며 易數에 조예가 깊어 隱遁을 핑계 삼아 세상을 觀照했다. 내가 일찍이 淵源의 유래를 물으니 말하기를 “道는 하늘에 있고 理는 사람에게 구비되어 있으니 우러러 바라보고 굽어 살피면서 그 이치를 탐구하면 무슨 疑惑이 있겠는가! 河圖가 伏羲氏에게 나타나고 洪範九疇가 禹임금에게 내려짐으로부터 天地萬物의 변화가 모두 명확히 드러나 남김이 없다. 그러므로 理가 있으면 氣가 있고 氣가 있으면 數가 있으니 數와 理는 애초에 서로 격리된 것이 아니다. 理를 따라서 數를 궁구하면 사물의 情狀이 運籌하는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매양 宋니라 邵康節이지은 皇極經世書를 보면 開闢이래로부터 그 年數를 헤아려 1元에서 12會가 경과하고 1會에서 30運이 경과하며 1運에서 12世가 경과하면서, 窮하면 變하고 變하면 生하며 生해서는 다함이 없다.” 라고 하였다.

내가 그 학문을 보건데 河圖 洛書를 근본까지 추구하고 털끝처럼 미세한 부분까지 파고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환히 疑惑이 없게 하였다. 오직 그가 易을 크게 완미고 象數設을 헤아려 밝힌 것은 모두 孝悌의 도리였다.

내가 알기로는 都君이 일상으로 가까이 하는 바는 易書이고 즐겨 완상하는 바는 爻辭이다. 이치를 함양하고 孝悌의 도리를 발휘하여 이로써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이로써 몸을 닦았으니 집안을 다스리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에게 우애롭게 하면서 妙理를 탐구하고 變化를 관찰하는 것이 바로 그의 학문이다. 日月의 度數를 헤아려 그 차고 기움 만을 고찰하거나 星辰의 運行을 헤아려 그 자리와 머무는 곳만을 살핀다면 어찌 족히 都君을 얘기할 만하겠는가! 나는 都君이 이런 학문을 가지고 있는데도 아는 사람이 적은 것이 슬프기 때문에 갖추어 기록한다.

제 6坊은 곧 葛田이니 故 兪政丞의 터이다. 그 자손 중에 쇠미하여 賤人이 된 兪薰이란 자는 나이 90인데 항상 말하기를 “우리 先世에 兪政丞이 이곳에 살다가 이곳에 묻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름을 물으면 알지 못하므로 政丞의 이름이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제 7坊은 곧 加坪이니 들판 서쪽은 安州判官 孫暝의 손자인 敬宗의 거주지이다. 敬宗은 武科에 급제하여 軍器寺 判官을 지냈고 아들 厦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그 스승을 위해 心喪 3년을 입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칭송했다.

들판 동쪽은 예부터 칭하기를 三嘉縣監 柳某의 거주지라 하였다. 정자 터가 新安驛 상류 바위 위에 있는데 모두 柳三嘉의 江舍 터라고 이른다. 그 墓도 또한 加坪에 있었는데 鄭業龍이란 자가 碣石을 뽑아버리고 그 父親을 墓 앞에다 葬事했으니 사람들이 그 姓만 알고 그 이름을 모르게 되었다. 유식한 사람이 이 마을에 살았다면 業龍은 필시 罪를 받았을 것이고, 柳氏

이름도 後世에 전해졌을 것이다.

加坪의 상류는 바로 水月洞이다. 그 위에 落水巖이 있으니 고을의 士友들이 항상 노니는 곳이다. 都病隱이 일찍이 詩를 지어 읊기를,

“仙人去後石臺空 白日雷鳴翠峽中 靑蓮若見流觴處 應道廬山在下風

(선인거후석대공 백일뇌명취협중 청련약견유상처 응도여산재하풍)

仙人들이 떠난 뒤 石臺만 남았으니, 대낮에 우레소리 푸른 峽谷 진동한다.

李太白이 만약 이곳 流觴曲水를 보았다면, 廬山 풍류 하찮다고 응당 말했으리.“

라고 하였다.

제 8坊은 新安驛이니 縣의 북쪽 10리 新安院과 松界院 중간에 있다. 松界院은 바로 松界部曲의 자리인데 거주하는 사람은 없고 풀만 무성하다. 洞口의 新安江上에 周氏 李氏 羅有文의 旌閭가 있다. 周氏는 곧 復信의 딸이자 姜隱의 妻인데 혹자들이 말하기를 “그 貞節은 梁應鯤이 촉발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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