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량문(上梁文)>

우리 전통문화에서 집을 지을 때 행하는 의식인 상량식이 있다. 집은 삶의 근거지이고 많은 돈과 노력이 드는 것이므로 혼례식, 장례식 등과 함께 그 의식은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다. 공사를 하기 위해 터를 닦기 시작할 때 산천과 사당에 고하는 고유제를 지내고 집의 골조를 완성하였을 때는 상량식을 거행한다.

상량은 건물 골격이 완성되는 들보(종도리)를 올리는 과정으로 가신(家神)인 성주가 탄생하는 순간이며, 건축 과정에서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들보를 올리며 상량식을 거행할 때, 상서로운 기운과 경사, 그리고 신령에 대한 경의를 담은 표현을 상량문에 담았다. 그 상량문은 종이나 비단 같은 천에 적어, 종도리나 종도리를 받치는 부재인 장여에 홈을 파고 넣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오래된 건축물에는 상량문이 남아있고 전해져왔다.

그 상량문에 대해 알아본다.

 

상량문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다. 서두에 그 집을 짓게 된 연유와 집주인의 인품, 공사 참여자, 상량 일시 등을 적는다. 다음은 동, , , , , 하 여섯 방향에 따라 축시(祝詩) 여섯 수를 짓는다. 이어 상량 후 좋은 일이 이 집을 통해 많이 일어나기를 기원하는 글귀로 마무리한다.

서문에 이어지는 축시는 맨 먼저 아랑위포량동(兒郞偉抛樑東)’이란 정형화된 문구로 시작한다. ‘아랑위포량동이어 동, , , , , 하 여섯 수의 축시가 이어진다.

 

{현종 8(1667), 종묘 영녕전 개수(改修)된 상량문의 축시를 보면

아랑위포량동(兒郞偉抛樑東) / 맑은 봄날 낙산에 아침 햇살 붉구나 / 모든 영령이 수놓은 문, 길이 보호하니 / 만년(萬年)토록 좋은 기운 성대히 머무르리라

아랑위포량서(西) / 금원에 서리와 이슬 내려 밤이 서늘하네 / 제관이 제사 지내려고 벽돌 사당 길 가니 / 악기에 맞추어 일제히 일무를 추네

아랑위포량남() / 전각에 부는 훈풍 나무들이 머금네 / 맑은 그늘 펼쳐 온 나라에 나누어 주고 / 당시 남기신 교화 지금까지 이르렀지

아랑위포량북() / 별들이 흩어져 북극성 둘러싸네 / 변함없이 남쪽을 바라보는 군왕의 병풍 / 천년(千年)토록 사당을 공경히 우러러보리라

아랑위포량상() / 상서로운 구름 아득히 의장(儀仗)을 가리네 / 참된 저세상 제향이 멀다 마라 / 뵙는 듯 지극정성에 신령이 흠향하리라

아랑위포량하() / 도성의 연무가 수많은 기와를 감쌌구나 / 성은으로 물산이 풍부하고 백성이 평안하니 / 환호와 기쁜 기색은 조야가 모두 같네!”

 

여기서 아랑위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어영차의 의성어라는 설이다. 그 다음 이어지는 던질 포, 들보 량, 동녘 동과 어우러져 어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라고 해석한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 고사에 따르면, 육조시대 이래 건축물의 골격이 완성된 뒤에 길일을 잡아 들보를 올리며 상량식을 거행하는데, 이때 친지들이 음식을 싸 와서 축하하고 목수를 대접한다. 그러면, 목수의 우두머리인 도목수가 들보 위에 걸터앉아 만두와 떡 등 제물을 사방과 위아래로 던지며 상량문을 읽는다. 이때는 아랑위는 의성어가 아니라 젊은이를 일컫는 아랑의 복수형으로 도목수가 장인들을 부를 때 통상적으로 쓰는 말이다. ‘아랑위포량동여보게, 들보 동쪽으로 떡을 던지세의 뜻이 된다.

, 아랑위포량동, , , , , 하로 이어지는 시구에는 각 방향에 해당하는 사물을 노래한다. ‘낙산은 영녕전의 동쪽에 있고, ‘금원은 궁궐의 후원으로 서쪽에, ‘나무들은 남쪽에, ‘북극성은 북쪽에, ‘구름은 위에, ‘도성은 임금이 다스리는 아래에 있다.

 

축시 뒤에는 복원상량지후(伏願上梁之後: 삼가 바라옵건대 상량 후에는)’라는 말을 시작으로 기원하는 문구로 끝을 맺는다. 영녕전 상량문에는 삼가 바라옵건대 상량한 후에는 국운이 장구하고 하늘의 아름다움이 더욱 이르리라. 효손에 경사가 생기리니 만년 장수하길 돕고 선왕을 잊을 수 없으니, 멀고 오랜 세월 동안 혈식(血食: 종묘 제사 때 쓰는 생고기, 즉 희생)을 받으리라라고 했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글 발췌)

 

일반적으로 큰 집이 아닌 경우에는 짧은 문장의 상량문을 종도리 바닥에 종서(縱書)로 쓴다. 종도리 아래에 부재인 장여가 있으면 장여에 가려 글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장여 바닥이나 종도리장여 측면에 쓰기도 한다. 순서는 집의 중심인 안방 쪽에서 시작해 건넌방 쪽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재액방지 문자로는 용()과 거북()이 가장 많이 쓰이고, 호랑이(), (), 기린(麒麟)도 쓰인다. 용은 용용용(龍龍龍), 용반(龍盤), 해룡(海龍), 활룡해룡(活龍 海龍), 구룡(龜龍)으로 적기도 한다. ‘()’도 구구구(龜龜龜), 낙구(洛龜), 수구(水龜), 산구(山龜), 하구(河龜)로 적기도 한다. 때로 상형문자나 그림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상량문에 거북을 적는 이유는 용과 거북이 물의 신(水神)이므로 화재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물이 아닌 해(), (), (), () 등의 문자도 화재를 방지하려는 의도로 쓰인다. 거북은 수신으로서 화재 방지의 의미가 있지만 장수 동물이나 길상 동물로도 인식된다. 호랑이는 벽사(辟邪)의 의미, 기린(麒麟)()은 길상 동물을 의미한다.

상량문에는 종도리를 올린 시간인 상량시(上樑時)인 년,,,시를 적는다. 건물이 마치 사람의 탄생처럼 탄생일인 사주(四柱)가 정해진다는 의미이다.

연도는 광무칠년갑진(光武七年甲辰)’처럼 연도와 간지를 표기한 방식이 일반적이다. ‘세재(歲在)’ 또는 태세(太歲)’라고 적고 간지 또는 연도를 적기도 하며, 청나라 연호인 동치(同治)’, ‘광서(光緖)’, ‘함풍(咸豐)’, ‘가경(嘉慶)’과 명나라 연호인 숭정(崇禎)’을 적는다. 대한제국기에 지어진 민가 상량문에는 광무(光武)’ 또는 단기(檀紀)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서원과 같은 유교 건물인 경우 공부자탄강(孔夫子誕降), 사찰 건물은 불기(佛紀)나 세존응화(世尊應化)로 각각 쓰는 등 건물 성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최근에 지어진 가옥은 서기(西紀)를 많이 사용한다. ‘()’를 적을 때 고자(古字)()’를 사용하기도 한다.

상량문에 자좌오향(子坐午向)’처럼 건물의 좌와 향을 적기도 하고, 가주(가주)의 이름이나 생년을 적기도 한다.

짧은 기원문(祈願文)을 적는데 응천상지삼광 비인간지오복(應天上之三光 備人間之五福)’이 가장 많이 쓰인다. ‘하늘의 삼광(三光)인 해별은 감응하시어 인간의 오복을 내려주소서.’라는 뜻이다. 이 밖에 부귀영화 자손창성(富貴榮華子孫昌盛), 부모천년수 자손만세영(父母千年壽子孫萬世榮)도 가끔 쓰인다. 쓰는 방식은 기원문의 글자가 많아서 대개 두 줄로 쓰며, 다른 글자보다 작은 글씨로 쓴다. 이 밖에 목수의 이름을 적기도 하고 오행(五行)을 적기도 한다.

 

전통 건축물의 마지막 공정에 해당하는 상량식에서 상량은 단순히 건축물의 완성을 알리는 의식을 넘어서, 그 건축물이 지닌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알리고, 건축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노고를 기리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건축물이 안전하고 풍요로운 기운을 불러일으키기를 기원하는 전통이다. 상량문은 건축물의 목적, 설립 연도,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등은 후대에 그 건축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여, 우리 문화와 역사를 보존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현대에는 전통 의식과 절차가 없어지고 또 달라진다. 성인식, 혼례식, 장례식 등의 중요한 의식도 전통과 많이 변하고 있다. 시대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 없는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는 미래 또한 없는 것이 상식이다. 옛 것을 알고 창의적으로 변화 하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정신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도 적용 가능하며 오늘날 살아가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元堂里 八坊 考證>

元堂里의 제 12元堂里 동쪽과 서쪽에 있는데 그 가운데는 개울 하나가 있다. 그 서쪽 마을은 바로 蔚山郡守 金滕의 거주지로 그 아들 潤生生員이고 그 손자 龜老忠順衛이니 에 거주할 때부터 富豪라 칭하였다. 그 손자 用貞 또한 生員인데 用貞이 일찍이 喪妻하여 그 묏자리를 東方谷에서 잡더니 古塚을 파고서 壙穴을 뚫었다. 이날 밤 鬼火가 공중에 연이어 왕래하다가 東方谷에서 길을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가니 이웃의 유식한 이가 그 불길함을 알아차렸다. 이에 한 달도 못되어 用貞이 죽었고 그 장남 은 자식이 없었으며 차남 도 그 손자에 이르러 또한 後嗣가 끊어졌다. 後人들이 마땅히 본보기로 삼아야 할 일이기 때문에 괴이한 일을 기록한다.

圃隱 文忠公5世孫鄭浣金潤生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거주했는데 생원이다. 그 아들 光胤또한 登科하여 藝文館 檢閱에 천거되었으니 名聲이 혁혁했다. 그 후 자손들이 모두 명성을 잃지 않고 朝廷에서 벼슬했으니 지금의 右相 維誠은 바로 檢閱5세손이다.

東萊府使 李圖男은 곧 忠順衛 金龜老의 사위인데 그 아들 光前이 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癸卯年(1543) 생원시에 장원하고 丙午年(1546)登科하여 承文正字를 지냈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아들 天慶日新堂인데 일찍이 南冥 曺先生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誠意鐵門關이라는 가르침을 얻어 체득한 바가 있다. 평생토록 반드시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한 뒤 衣冠을 갖추고 家廟에 참배하고는 걸상에 단정히 앉아 하루 종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鄕人들이 廟堂에서 享祀할 만한 분이라 하면서 말할 때마다 반드시 日新堂 日新堂이라했다. 二子를 두었는데 장남 는 기개가 있었고 季子 瑛은 풍채가 깔끔하고 학문을 겸비했으며 그 淵源家庭에서 나왔으니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그 동쪽 마을은 바로 淸州牧使 姜麟이 거주하던 곳인데 興安君4世孫 成均博士 李晁가 곧 孫壻였으니 李氏의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三男을 낳았으니, 장남 惟誠이고 차남은 惟訥이며 계남은 惟說이다. 惟誠은 장원급제 하였고 惟說은 생원이 되었지만 惟訥은 누차 鄕試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모자란다고 하였다.

그러나 惟訥만이 유독 아들과 손자로 이어 능히 집안을 일으켜 世業을 전했으니 사람들이 비로소 隱德이 있어 福祿이 다하지 않음을 알았다. 惟誠의 아들 또한 生員이 되어 參奉에 천거 되었다.

惟誠은 벼슬이 榮川郡守에 이르렀으니 晩年都山鷹巖상류 碧溪근처 동네로 이주하여 梧月堂이라 自號했다. 물을 끌어와 못을 만들고 못 위에 정자를 지어 天雲亭이라 편액하고는 시를 지어 읊기를 留得天雲許盪懷(유득천운허탕회: 천운을 머물게 하여 회포를 씻어내리)”라고 하였다.

權太師20世孫鄭圃隱 文忠公5世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 마을에 살았다. 뜰에다 손수 雙槐를 심어놓고 그 安分이라 편액 했으며 四子를 낳아 文顯 文著 文任 文彦이라 이름을 지었다. 君子로다. 이 사람이여!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본연의 모습대로 處身하며 벼슬도 원치 않고 많은 재물도 바라지 않으면서 오직 이 많은 것만을 부자로 여긴 이로다. ! 性情을 가다듬고 自足함을 아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은 반드시 文學으로써 그 자손에게 남겨주려 하면서 그 을 쌓고 학문을 축적했으니 아들 하나 손자 하나가 마침내 전후로 文科에 급제하여 드디어 雙槐亭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 전일에 을 닦아 뒤에 보답을 받음이 마치 맞추듯 일치하니, 이는 송() 진종(眞宗) 때의 진국공(晉國公) 왕호(王祜)가 집 정원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三槐亭을 지어 후대에 삼정승이 나오기를 믿었다는 것과 비교해 보건대 어떠한가!

이 세상을 떠나자 의 아들 文任墓碣銘을 지었는데 한 자 한 자가 모두 엄정하고 슬픔이 극진하여 追遠永慕의 정성이 言表에 드러나 있으니 참으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하겠다. 남의 자식된 이들이 이 墓碣銘을 본다면 누군들 눈물을 흘리면서 효성스런 마음이 한없이 생겨나지 않겠는가! 하물며 자손에게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 에 말하기를 孝子不匱永錫爾類(효자불괘영석이류 ; 효자는 다함이 없으니, 길이 닮은 이를 내린다.)”고 하였다. 이에 나는 權氏의 자손 중에 그 장차 父母에게 효도할 이가 면면히 이어질 것을 알겠으니 父親을 위해 손가락을 자른 이로서 어찌 유독 權洚(권홍)한 사람만을 꼽겠는가! 文彦의 아들이다. 文彦이 죽을 적에 의 나이 겨우 弱冠이었는데 父親을 위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다시 소생하게 했으니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킴은 이와 같다. 의 아우 ()癸卯年 (1603) 武科에 합격했고 그 형 ()의 아내 姜氏丁酉年 倭亂에 절개를 지켜 드디어 그 旌表했다. 文顯 文著 文任 文彦은 모두 家庭의 훈도를 받아 생장했으니 그 見聞이 전부 출중하여 難兄難弟라 하였다. 그러나 유독 文顯自挽詩陶淵明自挽詩와는 달랐다. 淵明은 평생 술을 넉넉히 마시지 못한 것을 한탄했지만 男子가 풀처럼 시드는 것을 한탄했으니 이 평생토록 기약한 바는 淵明보다 한 단계 높았던 것이다. 선비에게는 不朽한 것이 세 가지(入德, 入功, 立言) 있는데 이 이르기를, “忍將男子志甘與草同枯 (인장남자지감여초동고 : 차마 어찌 남자의 뜻을 품고, 풀과 같이 시들겠는가!”라고 한 一句 또한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의 아들 登科하여 工曹佐郎이 되었는데 이는 참으로 遺澤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觀相家로 성이 王氏인 자가 일찍이 여관에서 佐郞公을 보고 말하기를 의 형태인데 얼굴과 등에 환히 빛나는 것은 모두 虎彪의 무늬로서 그 文彩가 찬연하다. 이는

필시 의 부친께서 文章에 능했지만 及第하지 못하여 그 아들에게 文彩로 남은 것이다. 부친의 뜻과 사업을 잘 계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의 뜻이 비록 앞에는 좌절되었지만 뒤에는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草木처럼 썩어버리겠는가! 선비 文學을 많이 닦아 그 을 쌓은 이는 반드시 後代에 넉넉해진다. 나는 이에 不朽함이 命數窮通에 있지 않고 文學을 많이 닦아 그 을 쌓음에 있는 줄을 알겠다. 드디어 이를 두루 갖추어 기록한다.

3-4은 곧 文乙 部曲上下마을이다. 윗마을에 사는 이들은 土着人이 많은데 住民들이 부지런하여 자못 농사를 잘 짓고 있다. 아랫마을에는 部曲의 티만 남아있고 거주하는 사람은 없다.

5은 이름이 立石인데 溪上에 서 있는 돌이 있으므로 인하여 이름했다. 大丈夫 가운데 그 고요함을 사랑한 이들이 간혹 집을 짓고 거처했으나 오래 살지는 못했으니 기록하지 않는다.

6沙月이니 이곳은 丹城晉州의 접경으로 名區라 부르는 곳이다. 앞에는 시내가 있고 뒤에는 산이 있는데 산 이름은 尼丘山이고 그 위에 消怪寺가 있다. 姓氏一區를 전승하여 世居하니 黃氏李氏이다. 黃氏故 判書 孟獻曾孫生員으로 난리에 죽었고 은 시골에 숨어 집안에서 늙었다.

李氏故 興安君 5世孫으로 이름이 賀生이니 壬戌人이다. 그 담장 안의 정자 앞에 거북처럼 엎드려 있는 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 오래된 梅花 한그루가 있어 매우 기이하다. 賀生은 날 때부터 孤兒였는데 장성하자 父親喪을 입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忌日이 되면 30전부터 흰 옷을 입고 맨 밥을 먹었으며 30뒤까지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70살이 되도록 이를 게을리 아니하다가 일생을 마쳤으니 君子는 종신토록 을 입는다.”는 말이 이를 이른 것이다. 丁酉年 倭亂에 사방을 떠돌다가 父親 忌日이 되어 저녁 무렵 星州 多基村에 들어

가니 主人의 영접함이 매우 극진했다. 賀生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禮儀가 이리 근면합니까?”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내가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이제 그대의 모습을 보니 쓸쓸하고 애잔하여 마치 간절히 누구를 思慕하는 듯합니다. 무슨 일입니까?”라고 하였다. 賀生원컨대 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꿈에 大人 한분이 이곳에 찾아와 나에게 이르기를 나는 丹城 사람인데 내일이 내가 죽은 날이다. 나의 아들 賀生이 오늘 저녁 필시 이곳에 와서 내일 나에게 제사를 지낼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이 말을 듣고 痛哭하기를 을 당한 사람처럼 哀痛하게 하니 主人 또한 마주보며 눈물을 흘리다가 그 집안에 있는 음식을 모두 내어 祭需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 精誠은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

7墨谷이니 故 淸州牧使 姜沆이 살던 곳이다. 出仕한 뒤에는 그 世業의 아들 汝檣 에게 주고 晉州 元堂里로 이주했다. 梁山亭舍 자리가 남아있는데 완연히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8은 바로 培養山이니 곧 周氏文氏의 거주지이다. 周氏는 토착 성씨인데 世侯은 모두 判書였으며 孝行으로 旌閭를 받았다. 文氏 또한 토착 성씨로 이 마을에 살면서 顯達한 이가 20명이다. 그 중 判書2, 提學2, 學士2, 獻納1, 學諭1, 及第한 이가 3, 郡守 縣令4, 監察1, 奉正1, 進士3명인데 그 중 한 분이 江城君 益漸이다. 한 마을의 人才가 성대함으로 말하자면 당연히 그 마을 이름을 調元里라 해야 하는데도 主上이 특명하여 孝子里라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라는 것은 百行의 근원으로 忠臣을 구할 적에 반드시 孝子가문에서 택한다. 江城君實蹟退溪先生이 지은 碑閣記에 적혀 있다.

그 후 이 마을에 거주한 李氏는 그 先系江陽人이니 尙書左僕射 景芬8代孫參軍 李通이 급제한 文承魯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 후 거주하는 자손들이 비록 富貴를 누리지는 못했으나 대대로 文學하는 선비가 이어졌다. 李源自號淸香堂이니 행실이 더욱 드러나 退溪 南冥 두 선생의 문에 종유했다. 江城君行義功德一國에 선양하여 아이나 하인들도 모르는 이가 없게 한 것은 모두 에게서 나왔다. 曺先生은 교분이 매우 친밀하여 서로 더불어 陽春曲” “白雪曲같이 빼어난 唱和했고 또 淸香堂 八詠을 지었다. 의 아들 光坤은 호가 松堂이니 가업을 계승했다. 의 아우는 이고 의 아들 光友는 호가 竹閣이니 천품이 활달하고 인물이 장대하여 長子風度가 있었다. 아들이 없어 아우의 아들 로서 그 제사를 받들게 했는데 孝友하고 정직했으며 그 형 또한 孝友하고 근엄했으니 그 家風遺訓他族과 달랐다.

운창지(雲窓誌)_단성지(丹城誌) 2

4) 현내팔방고증(縣內八坊考證)

마을 이름이 縣內인 곳은 바로 읍내의 제 1이다. 울타리는 엉성하고 城堞은 무너졌으니 (주민을 보호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의미를 찾아볼 수가 없다. 壬辰 癸巳의 난리를 당하여 監司 金睟邑民을 강제로 동원하여 모두 을 쌓았는데 이는 어찌 民心이 스스로 을 완성하고자 하여 쌓은 것이겠는가! 당시 一尺 쯤 되는 片石은 그 값이 綿布 1과 같았다. 5城壁에는 그 片石의 수가 거의 100개에 이르렀으니 백성들이 원망을 쌓은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에 백성들의 원망이 극에 달했으니 백성들이 쌓은 바위가 스스로 무너져 성첩이 해자로 변한 것은 족히 기이할 것이 없다.

城內에는 官舍 터가 있지만 모두 다시 복구하지 못했다. 다만 東軒이 남아있는데 담장 밖에는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고 담장 안에는 紫微花 두 그루가 있다. 西軒담장 밖에는 別館이 있고 앞에는 蓮塘이 있으니 인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서쪽에는 衛舍가 있으니 담장 밖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및 그루가 있고 담장 안에는 네모난 못이 있다. 매양 묽은 연꽃이 성하게 피어나 푸른 잎사귀와 붉은 꽃봉오리가 琴軒을 밝게 비춘다.

동쪽에는 창고가 있고 그 아래에는 감옥이 있으니 그 뒤에 또한 오래된 느티나무 및 그루가 있다. 東門 밖의 近北山 아래에 鄕射堂이 있는데 그 옛 자리가 아니다. 南門 麻月이 바로 옛날에 터를 잡은 곳이지만 해마다 春秋로 반드시 그곳에서 禮法을 강론하는 것은 대개 그 자리가 넓고 평탄하기 때문이다. 또 그 앞에 搗砧司(도침:종이나 피륙을 다듬이질 하는)를 배치하여 하늘이 울리고 산이 무너질 듯 한 소리를 내어 巖石을 진동케 하고 谷神을 놀라게 하니 이는 南山에 있는 石角의 해로움을 누르기 위해서이다. 그 위에는 嚴惠寺가 있다. 社稷壇은 원당마을 산허리에 있으니 官門에서 서쪽으로 5리 이고 城隍祠江樓 들판 숲 속에 있으니 관문에서 동으로 5리 이며, 厲祭壇磨屹동네 산자락에 있으니 관문에서 북으로 5리이다.

사직단에는 豊年을 기원하고 陰德에 보답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春秋로 반드시 길한 戊日을 택하여 제사한다. 武學堂은 동문 안에 있고 火藥庫는 동헌 담장 밖에 있으며, 軍器廳은 화약고 북쪽에 있다. 이들은 모두 凶器를 보관하는 곳인데도 반드시 가까운 자리에 둔 것은 그 兵器를 중하게 여기서이다. 鄭允誼에 이르기를,

이른 새벽 말을 달려 외론 에 들어가니, 울타리엔 사람 없고 살구만 열렸구나.

뻐꾹새는 나랏일이 급한 줄도 모르는지, 숲 속에서 종일토록 봄 농사만 권한다.“

라고 하였으니 대개 末世의 형상을 묘사하여 흐느끼고 눈물 짓는 시이다.

2은 곧 九印谷이니 세칭 옛 鄕校金盞마을의 遺址이다. 江城郡이 혁파될 적에 또 文家學의 역모가 있었으니 이 이야기는 都山誌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임금이 진노하여 鄕校西山 북쪽 기슭으로 옮겼다. 알 수는 없지만 一道를 교화하여 풍속을 같게 하고 不肖를 가려내어 惡行을 축출하는 일은 學校敎育에 관계된 것인가? 學校의 자리에 관계된 것인가? 先王의 제도를 상고해 보건대, 六德을 닦아서 民性을 절제하고, 五倫을 밝혀서 民俗을 돈독히 하며 四敎를 숭상하여 民志를 북돋우는 일은 敎育者의 직분에 관계된 것이지 學校의 자리에는 관계가 없는 것이 명백하다. 필시 진노함을 전가하여 鄕校자리를 옮겨야 할 이치가 없는데도 이에 이르렀으니 그 金盞마을이 망한 것은 또한 氣數에 유관하여 그러한 것인가! 그러나 大聖享祀를 북쪽 기슭 응달진 곳에서 구차히 받들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鄕人중에 유식한 이들이 밝고 조용한 자리를 구하다가 洪氏들의 옛 터를 얻어 건립했으니 지금의 鄉校가 이것이다.

九印마을 서쪽기슭 아래 永慕堂 자리가 있는데 옛 山陰縣監 鄭構가 거주하던 곳으로 그는 吏曹參議 次恭4世孫이자 參奉 起門의 아들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그 父親喪을 당하자 8일간을 물 한 모금도 먹지 않았으니 南冥 曺先生이 서찰을 보내 그 몸 훼손함을 경계하였다. 70세에 또 모친상을 당해서는 執喪前喪과 같이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이 先山아래 작은 암자를 지어 永慕라 편액하고는 이에 거처했는데 老僧이 토란을 삶아 바쳤고 國喪을 당하여 상복을 입으니 御筆을 특별히 하사했다.

3은 바로 洪氏遺址이다. 江城郡 때에 이곳에 살던 洪氏들이 9를 연이어 科擧壯元을 했으니 그 案山에 있는 雙峯을 지금도 壯元峰이라 칭한다. 永樂(1403-1424) 년간에 홍씨 자손들의 미약함을 틈타 이 자리를 차지하여 鄕校를 건립한 지가 근 200여년이다. 그 간에 文武科壯元이 많이 났으니 알 수는 없지만 또한 杜固(중국 당나라 두씨 가문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된 곳) 같은 明堂의 기운이 있어 地德이 그렇게 도운 것인가! 그 왼쪽 기슭 아래 큰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壬辰 年間에 벼락을 맞아 부서졌다.

그 후 地師 박상의가 이를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단성에서 필시 鍾繇王羲之를 이을만한 名筆이 나올 것인데 이 바위가 부서졌으니 애석하게도 이제는 끝났다.”고 하였다. 그 말로써 상고해 보건대, 三陟府使 李昌의 서자인 惟訒이 명필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는데 丁酉年 난리에 죽었으니 그 말이 과연 맞다. 人才興亡地靈盛衰에 달린 것이 확실하다.

4-5은 곧 馬屹內外마을이다. 바깥 마을은 바로 宣傳官 蘭桂가 살던 곳으로 지금은 지키는 자손이 없다. 그 정자 자리에는 老松만이 바위 위에 널찍이 드리워져 있다. 判書 李山屹이라는 이가 또한 이 마음에 거주했으니 그 손자 은 낚시를 생업으로 삼았다. 하루는 그 아들 之寶가 따라갔는데 이 갑자기 失足하여 물에 빠지자 之寶가 울면서 물에 뛰어들어 그 아비의 屍身을 안고 죽었으니 당시 나이 아홉 살이었다. 이 일은 중국 나라 때 부친을 따라 上虞江에 빠져 죽은 曹娥라는 少女故事와 전후가 완전히 동일하다. 그런데도 新安江 위에는 절묘하고 뛰어난 글귀로 이지보를 칭송하는 碑銘이 없으니 한스럽다.(上虞江 위에는 당시 고을 수령이 曹娥를 칭송하는 를 세웠음)

안 마을에 거주한 이는 바로 吏曹判書 韓崇德6世孫世英이다. 世英沔川人인데 忠順衛 金龜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 마을에 거주했다. 5을 낳았으니 舜卿 禹卿 商卿 文卿 武卿이다. 武卿의 아들 大岦文卿의 아들 大猷 大器는 끝내 及第하지 못하고 자손도 없으며 오직 大岦만이 進士가 되었다. 大器孤松으로 儒者의 기상이 있고 古風道義를 좋아했으며 그 文章은 기이하고 고아한 것이 많다. 丁酉年에 피란하여 高靈에 있었는데 길가에서 安陰縣監 郭䞭 三父子(黃石山城에서 순절함)返葬 행렬을 보고는 를 지어 哀悼하였다. 에 이르기를,

"鴻毛보다 가벼운 목숨 萬人이 우러르니, 南國의 송죽 절개 歲寒더욱 푸르구나.

三父子 運柩행렬 돌아가는 길가에 장렬한 太陽광채 하늘 끝을 비춘다.“라고 하였다.

著述로는 奇遇錄이 있다. 從姪 璡은 가정에서 訓導 받은 것이 凡人과 달랐는데 壬辰亂을 당하여 軍糧을 모우는 有司가 되었다. 이에 倡義하여 군중을 격려하고 집집마다 곡식을 거두어 넉넉한 軍糧都督府에 납부한 것이 각 고을 중 선두였다. 元師가 그 의로움을 가상히 여겨 바야흐로 포상하려고 狀啓를 올렸으나 歸路에 적에게 죽음을 당했으니 軍資監 主簿에 추증되었다.

6-7凉亭文慶洞이 이곳이다. 鳳山府院君 河允源凉亭江舍를 지어 老年을 보냈다. 允源晉陽人으로 그 아들이 蔭職으로 文慶縣監을 지내고는 鄭文昌의 못 위 山谷에 거주했다. 이에 後人들이 모두 文慶谷이라 부르면서 文慶縣監의 이름은 부르지 않았으니 인하여 그 이름이 실전되었다. 鄭文昌故 鄭判書의 아들인데, 노인들이 전하기를 정판서가 못 위에 佚老園을 지어 그 아들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아들 文昌은 부자 집 아들인지라 항상 놀면서 낚시하는 일을 낙으로 삼아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인하여 그의 이름으로 못에 이름을 붙였고 判書의 이름은 잊혀져 전해지지 않는다. ! 高麗때에는 무한히 귀한 公卿이었으나 후세에는 단지 姓名만 기억되고 어떤 이는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하니 邵康節의 감회에 거듭 감회가 일어난다.

 

8은 곧 江樓들녘이다. 이 혁파될 당시 使臣이 행차를 멈추고 江上의 한 여관에 머물렀으니 인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南冥 曺先生이 일찍이 四韻詩를 지어 읊기를,

煙火當年化未銷 歸來方丈更南圖 (연화당년화미소 귀래방장경남도)

澄江靜夜宣城謝 孤鶴橫舟赤壁蘇 (징강정야선성사 고학횡주적벽소)

十里官楊靑倒水 萬傳鼓碧連霄 (십리관양청도수 만전뇌고벽연소)

浮生世事渾如夢 明日柴門政寂寥”(부생세사혼여몽 명일시문정적료)

속세 살던 당시에 神仙되지 못했으니, 方丈山 들어왔다 다시 남쪽 가려한다.

맑은 강 고요한 밤은 宣城太守 시구 같고, 외로운 이 배를 스침은 赤壁賦글귀 같네.

십리 뻗은 官衙 버들은 물에 비쳐 푸르고, 요란한 북소리는 하늘까지 울려 퍼진다.

헛된 인생 世上事 모두가 꿈 같으니, 내일이면 사립문 정말로 적막하리.“라고 하였다.

또 손수 편액을 胡蝶樓라 적고는 인하여 雜體詩를 지었으니,

다소간의 행인들, 나비처럼 너울너울 날아가더니.

별안간 모습 전부 변하여, 먼 길 가는 사람 위해,

물가에서 전송하고 돌아간다.“라고 하였다.

그 후 詩人墨客들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만 오직 進士 朴紳絶句를 사람들이 絶唱이라 칭하므로 이에 기록한다.

草軟沙場除設席 風高柳岸禁登樓 (초연사장제설석 풍고유안금등루)

眞仙若見今朝會 應悔人間久不留 (진선약견금조회 응회인간구불류)

연한 풀이 자란 모래밭에는 자리 펼 걱정 없고, 바람 좋은 버들 언덕이라 누각 오를 필요 없네.

神仙들이 만약에 오늘 모임 본다면, 인간세상 오래 머물지 못한 것을 후회하리.“

그 후 權應仁이 이 를 평하기를 이미 除字를 놓고 또 禁字를 놓았으니 이는 詩家의 자연스러운 格式을 모른 것이다.“ 라고 하였다.

<目錄>

1. 沿革考證

2. 山川考證

3. 邑里考證

4. 縣內八坊考證

5. 元堂里八坊考證

6. 北洞八坊考證

7. 法勿禮里八坊考證

8. 新燈八坊考證

9. 都山八坊考證

10. 悟里八坊考證

11. 生比良八坊考證

 

 

1. 沿革考證

丹城縣은 옛날 江城郡이다. 의 소재지는 新安江 언덕 九印橋 동쪽 5쯤의 번화한 고을 한복판에 있으니 江山의 아름다움과 人物의 번성함은 嶺南에서 으뜸이다. 六樓(중국 명나라 초기 남경에 있던 여섯 누각) 중의 輕烟樓 淡粉樓 柳翠樓 梅姸樓와 같은 기녀들의 누각이 전후로 즐비하고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는 妓女들의 춤사위가 구름같이 어우러지니 東南으로 행차하던 使臣들이 여기에 머물면서 꽃에 반하고 달에 취하여 돌아갈 줄을 몰랐다. 간드러진 기생들의 노래 소리는 언제나 은빛 포구에 구름을 멈추게 하고 현란한 거문고 통소 가락은 萬頃의 금빛 물결 사이에 우레처럼 울려 퍼졌다.

풍류 소리가 진동하자 바위가 갈라지고 하늘이 기울면서 北斗七星의 자루가 강물에 꽂히더니 표주박처럼 생긴 작은 배가 뒤집어지고 거북 모양의 官印이 사라졌다. 이에 잠수부로 하여금 이를 찾게 했으나 그 등에 껍질이 있고 배에 글자가 새겨진 거북官印을 발견하지 못했다. 방탕한 使臣은 자취를 숨겨 영영 사라졌지만 이를 어찌 사실대로 아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 世宗大王 때에 이르러 이 일을 듣고는 震怒하여 歌舞하던 樓臺를 부셔버리고 으로 강등시켰다. 이에 드디어 고을을 서산 아래로 옮기고 인하여 이름을 丹城이라 하였다. 丹城縣은 산수가 빼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중국 天台山丹丘赤城에 비유하였다. 이곳은 벼슬이 많이 나는 고장으로 서울과의 거리가 770.

 

2. 山川考證

대개 일찍이 듣건대 나라 楊泉이 지은 物理論에 말하기를 渾淪天地의 기운이 비로소 저절로 開闢하여 계곡과 구릉이 되고 제각기 그 형상과 명칭이 생겼으니 이것이 氣勢始終이다.” 라고 했다. ! 하늘의 造化가 베풀어진 지 오래되었다. 구름 속의 蛟龍과 거북의 등과 같은 형상이 있고 솟구치는 독수리와 비상하는 鵬鳥와 같은 모양이 있으며 이 날고 鳳凰이 춤추는 자태도 있고 篆書繪畵처럼 생긴 형태도 있다. 이것들을 이름하여 流山 來山 屯鐵 寶巖 集賢이라 하니 중의 큰 것들이다. 그 나머지 千巖萬壑이 안개와 구름 속에 구불구불 드넓게 뻗어내려 靈蛇처럼 을 치고 玉筍처럼 솟아난 작은 산들도 각각 그 형상이 지극하다.

뭇 골짜기마다 다투어 흐르는 것은 물인데 물은 그 형체를 파악할 수가 없다. 드넓게 출렁거리면서 그 움직이는 모양에 정해진 형상이 없다. 이에 그 형상은 참으로 논할 수 없지만 그 명칭은 또한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 天嶺의 아래에서 발원하여 山谷사이를 품고 돌아 넓은 평야를 내달리머 배를 왕래하게 하는 것은 新安江이다. 支川細流인 냇물들이 좌우로 구불구불 감돌다가 동으로 흘러 碧溪가 되고 또 동으로 黔川에 합쳐졌다가 서쪽으로 悟里를 지나 都川이 되니 新安江으로 유입되는 물들은 또한 각각 그 명칭이 있다. 이들은 능히 만물을 살리고 만물을 윤택하게 하니 다함없이 극진하고 헤아릴 수 없이 통용되는 것이다.

 

3. 邑里考證

先王이 고을을 봉하여 住民의 구역을 정할 적에 반드시 某山 某水로써 경계로 삼았다. 丹城 고을은 그 동서남북의 가로 세로와 넓이 둘레가 모두 100도 못되니 긴 부분을 잘라 짧은 부분에 보충하면 겨우 20餘里가 된다. 그 작은 것으로 말하자면 十戶의 보잘 것 없는 고을이지만 그 큰 것으로 말하자면 또 한 八極(八坊極地)이 있다. 인하여 八卦으로 八坊의 분야를 구획하여 八里로 정했다. 라는 것은 머문다는 뜻이니 백성들이 머물러 거처하는 곳이다.

<율곡사 대웅전>
신등면 율곡사 오른쪽 산봉우리 밑에 수십 길이나 되는 암벽이 있는데 그 이름이 새신바위이다. 원효대사가 절터를 잡을 때 이 바위에 올라서 바라보고 터를 정했다는 곳이다. 절이 완공될 무렵 법당에 단청을 하였는데 "이레 동안 아무도 절대로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일러놓고 화공이 법당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서 궁금히 여긴 상좌승이 이레째 되던 날 몰래 문틈으로 법당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새 한 마리가 붓을 물고 날아서 벽화를 그리다가 그만 붓을 떨어뜨리고 날아서 나가 버렸다. 그 새가 날아가서 지금의 새신바위에 앉았기 때문에 바위이름이 새신바위가 되었고 지금도 법당의 천장 밑 좌우 벽면에 산수화 그림 두 점이 남아있는데 미완성으로 알려져 있다.

<율곡사에서의 원효대사와 의상조사>
율곡사에 거처하던 원효대사가 보리죽을 먹고 있는데, 정취암에 있던 의상조사는 하늘에서 내려준 공양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정취암으로 의상을 찾아온 원효대사가 점심공양 시간이 되었는지라 '자네는 천공을 받아먹고 있으니 어디 나도 오늘 함께 드세'라고 하면서 기다렸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천녀(天女)가 내려오지 않으므로 원효대사는 그만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그제야 천녀가 공양을 바치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왜 이제야 오느냐"라고 물으니 천녀가 말하기를 "원효대사를 옹위하는 팔부 신장(神將)이 길을 가로막아서 정취암으로 올 수가 없었다."라는 것이었다. 이에 크게 깨달은 의상조사는 자신이 원효대사에게 미치지 못함을 개탄하고 그 뒤로는 천공을 사양하였다고 한다.

<작산마을 도장골 의구비(義狗碑)>
신등면 작산 마을 뒤쪽에 있는 도장골에는 의구비(義狗碑)라는 돌이 세워져 있다. 그 돌은 아무런 각자(刻字)도 없이 높이 1.5 m, 넓이80cm 인 민 돌로서 전하는 이야기만 남아있다. 옛날에 이곳은 단계에서 넘어오고 삼가 쪽으로 넘어가는 소로가 나 있었고 길옆에는 조그마한 못이 하나 있었다. 못 물은 농사에도 쓰이지만 냇물이 먼 이곳에서는 빨래터로도 이용되었다. 어느 날 오후 이 마을 부인 한사람이 빨래를 하고 있었고, 옆에는 집에서 기르는 개가 따라와서 누워있었다. 해질 무렵 탁발 나갔던 젊은 중이 절로 돌아가는 길에 빨래하는 부인을 겁탈하려고 하였는데, 옆에 누웠던 개가 중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중은 버틸 수가 없어서 도망쳐 달아나며 개를 발로 차서 개에게 상처를 주었다. 부인은 봉변을 면했지만 개는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이에 가족들이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 개의 죽음을 애처롭게 여겨서 이곳에 묻어주고 큰 빗돌을 세워서 그 표지를 한 것이다.

<법물마을 배다리, 북바위>
신등 법물의 위쪽 마을이 이교(梨橋)인데 배다리라고 하였다. 그 유래는 옛날에 배가 다녔다고 하여 배 매는 쇠말뚝이 있었다고도 한다. 마을 뒷산에 절터가 있으며 미륵등, 용바위 이름도 있는데 옛날에 절이 성할 때에는 많은 중이 있었다. 빈대로 인하여 절이 망할 때에 떠나는 중들이 돌 한 개씩을 모았다는 돌무더기는 중의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그때 중이 말하기를 "용바위 뒤로 길을 내면 마을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여 길을 내려고 산을 파니 피가 흘렀다고 한다. 그 뒤에 마을에 재해가 생겨서 길을 원래대로 돌리고 산은 원래대로 복구하였다. 미륵등 앞에 약수샘이 있는데 굴이 깊고 그 옆에 북바위가 있다. 약수를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이용하였는데, 어느 날 한 부녀가 거기서 목욕을 하고 나와서 골짝을 건너 북바위를 지나게 되었다. 이 북바위는 넓은 바위에 밑이 비고 한쪽만 땅에 묻히고 큰 바위에 눌려서 있는데 두드리면 그 소리가 두루 삼십 리에 들린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부인이 북바위를 왼손으로 짚고 지나갔다고 하는데 그러고 나서는 그 바위도 소리가 나지 않고 약수샘도 효험이 없어졌다고 한다.

<진태마을 조산백이>
신안면 진태 마을 아래쪽 강성 들판에 조산백이라는 곳이 있는데 옛날에 칠성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에 이 칠성바위를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지고 왕(王)씨들이 살았는데 그 중에 부자가 있어서 중이 탁발을 하러오면 매양 괴롭히고 홀대를 하였다. 어느 날 또 중이 나타나서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지나가므로 부잣집 하인들이 그것을 듣고 주인에게 알리니 주인이 지체 없이 종을 시켜 중을 잡아와서 무슨 말을 하였는지 추달하였다. 중이 말하기를 "저 일곱 개 바위 중에서 쪽박에 해당되는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을 없애면 더 부자가 되고 오래 갈 것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욕심 많은 주인이 바위를 깨어서 없앴는데 그때부터 재앙이 일어나 화재가 나고, 홍수가 덮쳐 마을이 떠내려가고, 칠성바위도 3개가 더 없어지고 3개만 남아 있게 되었다. 그 바위 3개는 경지정리를 하면서 땅속에 묻혀버리고 지금은 조산백이라는 지명만 남아 있다.

<어천과 대현촌 고개> 
청계리 대현촌(大峴村)을 지나 한재(大峙)를 넘으면 경호강변에 마을이 어리내인데 우천(愚川)이라고 쓰다가 어천(漁川)이 되었다. 옛날에 험준한 한재(大峙)는 대현촌(大峴村)까지 거리도 멀거니와 산이 높고 험하여 대낮에도 혼자서는 넘기가 어렵웠다.
산청에 사는 정씨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기골이 장대하여 씨름을 잘하기로 소문이 났다. 한번은 하동 옥종에 갔다가 오는데 대현촌(大峴村)까지 와서 고개를 넘으려고 하니 왠지 가기가 싫었다. 그러나 잘 곳도 만만치 않고 어천까지만 넘어오면 주막집도 있고 하여 혼자서 어두운 산길을 접어들어 고개까지 왔는데 어스름한 달밤에 웬 여자가 머리를 산발하고 길옆에 엎어져 있었다. 담력이 세지 않으면 혼비백산할 지경인데 "누구냐"고 고함을 질렀더니 여자가 "내 위에 이 놈 봐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바로 옆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큰 소리로 울부짖고는 숲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불문곡직하고 그 여자를 옆에 끼어 안고 있는 힘을 다해서 고개를 내려왔는데 주막집에 이르렀을 때에는 온 몸이 땀에 젖어 물에 빠진 듯하였다. 이미 의식을 잃은 젊은 여자를 주모와 같이 쌀 물을 갈아 먹이고 기다리자 밤이 깊어서야 깨어났다. 사연을 물어보니 친정은 하동 옥종이고 시가는 함양 유림인데 시가가 혹독하여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친정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개에 이르러, 혼자 넘기는 어렵고 날도 저물었지만, 무서운 줄도 모르고 산을 넘다가 호랑이를 만난 것이다. 호랑이가 일격에 덮쳐드니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산발이 되어 있는 터에 사람이 나타나서 "누구냐"고 고함을 지르니 여자가 "내 위에 덮친 호랑이를 보라"고 한 것이 호랑이를 놀래게 해서 달아나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튿날 정씨가 그 여자를 데리고 함양 시가에 가서 전후사실을 이야기하고 "앞으로는 구박하지 말고 잘 살도록 하라"고 타이르고 돌아왔다. 그 뒤에는 그 여자도 탈 없이 시집을 잘 살았으며 일 년에 한 번씩 찾아와서 딸 노릇 하겠다며 지내다가 정씨가 죽고 난 뒤에도 평생토록 제삿날을 잊지 않고 찾았다고 한다.

<생비량(生比良)>
생비량면 가계리와 화현리는 삼산(집현산, 황매산, 자굴산)이 이수(두 줄기 물)와 어우러진 명지로서 이 근처에 옛날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는 비량대사(比良大師)라는 고승이 살고 있었다. 불도의 높은 경지를 깨닫고 넓은 자비심으로 인근에 많은 감화를 주어서 원근에서 높은 존경심과 신뢰를 받고 있었다. 주민들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비량대사를 찾았고 대사의 말을 들으면 만사가 형통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량대사가 가사장삼을 입고 홀연히 절을 떠나 어디론지 가려고 하였다. 그 소문을 들은 인근의 주민들은 구세주처럼 믿고 따랐던 대사가 떠나려하니 줄을 이어 한사코 만류하였는데 아무리 매달려도 자비로운 웃음을 지을 뿐 가는 발길을 돌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애원하듯 매달리는 신심 깊은 주민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한마디가 "내가 떠난 뒤에도 이곳의 지명을 비량이 사는 곳이라고만 하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구름처럼 훌훌히 떠나는 비량대사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가 의논한 끝에 비량대사가 언제나 사는 곳이라 하여 ‘생비량'이라고 하였다.
양천강이 흐르고 강 건너 넓은 들은 도전(道田)마을로서 냇물을 건너야만 했기 때문에 섬으로 여겨서 '도(島)밭' 이라고 했다가 지금은 도전으로 쓴다. 

서쪽이 높은가(西上. 오른쪽이 상), 동쪽이 높은가 (왼쪽이 上) ?
집안 제사나 묘사때 신위나 묘의 위치를 볼 때나, 향교나 대성전에서 성현의 위패 위치를 보면, 묘.위패에서 바라볼 때 왼쪽(동쪽)이 높은지. 오른쪽(서쪽)이 높은지를 궁금해 한다. 그 원인과 변천과정을 알아본다.
 
<서상(西上)법>
논어 팔일편에 “王孫賈問曰 與其媚於奧 寧媚於竈 何謂也, 子曰 不然 獲罪於天 無所禱也.
{왕손가문왈 여기미어오 영미어조 하위야, 자왈 불연 획죄어천 무소도야 : 위나라 대부 왕손가가 “성주신보다 부뚜막신에게 아첨하는 것이 낫다”고 하자, 공자는 “아니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어디에도 빌 곳이 없다”고 답한다. 이는 “집안 깊숙한 곳에 있는 어른(奧. 깊을 오)보다, 먹을 것과 살림을 관장하는 실세(竈. 부뚜막 조)에게 잘 보여라”는 세속적 처세술을 공자는 단호히 거부하며, 도덕적 원칙과 천명을 따를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오(奧)는 집안 깊숙한 곳을 말하는데, 집안 가장 안쪽에 있는 명분과 의리를 지닌 어른이 있는 곳을 말한다. 옛날에는 집안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어른이 자리하고 있었고, 남향 집인 경우 서남쪽 모퉁이가 가장 안쪽 깊숙한 곳이 되므로 ‘오(奧)’라고 불렀다. 남향집 방의 출입구가 주로 남쪽이나 남동쪽에 있으므로, 출입이 번잡하지 않은 서남쪽이 어른의 자리였던 것이다. 서상(西上)의 유래라고 할 수 있다.
“예기(禮記)”에서도 室中之奧(실중지오: 방 안의 깊숙한 곳(오))라 하였으며, 남향 집인 경우 가장 깊은 곳이 서남(西南)쪽 모퉁이인 것이고, 산세나 강, 주변 자연환경에 따라 집의 방향이 달라지면 이 위치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제도화되어 사당이나 종묘에서 신위를 모실 때 서쪽을 1위로 두는 '서상법'으로 굳어지고 제례의 원칙이 된다.
현대 국제외교 의전규범에서도 국기게양, 좌석배치 모두 “오른쪽 상석” 원칙을 적용한다.
 
<좌상우하(左上右下)법>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자왈 위정이덕 비여북신 거기소이중성공지 : 정치를 덕으로 하면, 마치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으면서 뭇별들이 그를 둘러 도는 것과 같다. : 군주는 북쪽(북극성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고, 신하와 백성들이 그 주위를 공경하며 따르는 모습)에서와 같이,
좌상(左上)은 고대의 조정(정치) 및 천문,우주관에서 유래했다. 군주는 남쪽을 바라보고 앉는 남면(南面)을 하면, 군주의 왼쪽은 해가 뜨는 동쪽(생명과 시작)이 되고, 오른쪽은 해가 지는 서쪽(죽음과 결실)이 된다. 자연스럽게 만물이 소생하는 방향인 동쪽(왼쪽)을 귀하게 여겨 '좌(左)'를 상석으로, '우(右)'를 하석으로 삼았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서열이나, 문묘(조정의 원리인 사당)에서 1위 안자를 공자의 왼쪽(동쪽)에 배치한 것이 소목제도(昭穆制度)인 '좌상' 원리이다.
제례 문화는 주자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정립하면서 큰 변화를 맞는다. 집안 안방 구석에 신위를 모시는 대신, 집안에 ‘독립된 사당 건물’을 짓게 되므로 신위의 위치 공식도 좌상(左上)법으로 바뀐다.
사찰에서 불상의 위치도 좌상법이 적용된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인 본존불을 중심으로 부처님 좌측(부처님이 바라볼 때)은 문수보살 또는 미륵보살(서열 2위)이고, 부처님 우측은 보현보살 또는 제화갈라보살(서열 3위)이다. 또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 좌우에 아미타불(오른쪽)과 약사여래(왼쪽)를 모시기도 한다.
극락전과 무량수전은 아미타불 본존불을 중심으로 부처님 좌측이 관세음보살(지혜와 자비, 서열 2위)이고, 부처님 우측이 대세지보살 또는 지장보살(서열 3위)이다.
 
<고대 국가별 좌상우상(左上右上) 변천>
고대 왕조들은 자신들의 철학과 사상에 따라 서(西)와 우(右)를 숭상하기도 하고, 동(東)과 좌(左)를 숭상하기도 하며 변화해 왔다.
* 왕조별 상석의 변천
: 상나라(우/서 숭상)->주나라(좌/동 숭상)->진·한나라(우/서 숭상)->당·송 이후(좌/동 확립)
① 상(상)나라 : 우(右)와 서(西)의 숭상
신권(神權) 정치와 조상 숭배가 강했던 상나라는 생활 관습에 기반하여 서쪽과 오른쪽을 더 높은 상석으로 쳤으며, 제사를 중시하는 문화였으므로 서상법이 강하게 작용했다.
② 주(周)나라 : 좌(左)와 동(東)의 예법 확립
주나라 공단(주공)이 유교적 주례(周禮)를 정립하면서 정치적 권위와 좌상(左上)의 법칙이 표준화되었다. "예(禮)는 좌측을 숭상하고, 흉(凶, 군사/형벌)은 우측을 숭상한다"는 원칙이 이 때 확립된다. 다만, 사당 내부의 제례만큼은 서상법을 유지하여 이원화한다.
③ 진(秦)·한(漢)나라 : 다시 우(右)의 숭상
진나라와 한나라 시기에는 다시 오른쪽(우)과 서쪽을 숭상하는 문화가 팽배했는데, 흔히 인재를 등용하거나 출세하는 것을 '우대(右待)한다'고 하거나, 벼슬에서 쫓겨나 변방으로 밀려나는 것을 '좌천(左遷)당했다'고 표현하는 한자어가 바로 이 진·한 시대의 현상(우상좌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④ 당(唐)·송(宋)나라 이후 ~ 조선 : 좌(左)의 최종 승리 및 제도 정착
수·당 시기를 거쳐 송나라에 이르러 유교적 관료제가 완성되면서 '좌상우하'가 공식적인 관직과 외교 예법의 절대적 대원칙으로 고착된다.
이 원칙이 한반도의 고려와 조선으로 유입되어 조선 시대의 관직 체계(좌의정 > 우의정, 좌찬성 > 우찬성)의 구조가 된다.
 
<결론 : 두법의 공존>
동양 문화권은 이 두 가지를 섞어서 사용하며 통일성을 유지해오고 있다.
-. 사적인 공간 과 제사(신위) 공간 : 여전히 고대 가옥의 풍습을 따라 서상법(서쪽이 최고 상석)을 적용한다. (예: 종묘, 가문의 사당)
-. 공적인 공간 / 정치(조정) 공간 : 우주의 섭리와 남면 원리를 따라 좌상우하(왼쪽/동쪽이 최고 상석)를 적용한다. (예: 궁궐 왕의 자리, 문묘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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