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勿禮里入坊考證>
法勿禮里는 寶巖山 아래 있는데 중간에 시내가 있고 마을은 東西로 나뉘어 있다. 이곳은 吏部典書 허옹(邕)이 살던 곳이다. 邕은 高麗末 時政이 장차 어지러움을 보고는 朝廷에서 용납될 수 없음을 알았으니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비로소 丹溪의 시내위에 자리를 잡았다. 이에 집을 지어놓고 絶句詩를 읊어 이르기를,
“世間耳目事章章 一有眞言謂發狂 卷却談王三寸舌 丹溪湥處置茅堂
(세간이목사장장 일유진언위발광 권각담왕삼촌설 단계돌처치모당)
世間의 耳目들은 일마다 두려우니, 한번 진실한 말하면 미쳤다고 한다네.
王道를 애기하던 세치 혀 다물고는, 단계 물흐르는 자리에 초당을 지었네.“라고 하였다.
그 후 法勿禮里 寶巖山 아래로 이주했으니 이는 公이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자 함
이다. 이에 革命의 때를 당하여 새 왕조를 섬기지 않고 志節을 숭상함이 어떠했겠는가!
許邕의 아들 少遊는 掌令이 되어 直諫하다가 조정에 미움을 사 開城少尹으로 좌천되었다. 洪武 癸亥年(1383)에 母親喪을 당하자 3년 동안 侍墓하면서 喪服을 벗지 않았고 항상 枕席에 엎드려 주야로 號哭하였다. 당시 倭寇가 쳐들어왔다가 또한 그 孝誠에 감동하여 서로 경계하면서 감히 핍박하지 않기를 柳下惠의 무덤같이 하였다. 조선에 와서 그 정려를 내렸는데 勝覽에는 이른바 許季道라 되어있다. 이는 곧 少遊가 改名한 이름인데 당시 기록하는 사람이 이를
살피지 못한 것이다. 아들은 우(喁)로 中郎將이고 손자는 成孫으로 生員이다.
典書 張綱은 許典書의 사위다. 이곳에서 살다가 딸 하나를 얻어 시집보내니 商山 金後이다. 호는 丹丘齋요 官은 直提學에 이르렀으나 시류에서 勇退함으로서 禍를 면하였으며 그 뜻을 한 수의 絶句에 부쳤다.
公의 벼슬이 그 德에 미치지 못했고 壽도 짧아 겨우 33세에 歿하였다. 公의 아들은 張인데 나이 겨우 20에 登科하여 24세에 歿하니 하늘이 주었다가 빼앗은 소이를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아들은 3兄弟로 첫째 克用은 登第하여 벼슬이 司諫에 이르고 둘째 利用은 登第하여 持平이고, 셋째 貞用은 登第하여 承文院博士이다. 貞用의 아들은 둘인데 光礪, 光範이다. 모두 司馬에 오르고 光礪의 아들 達生은 벼슬이 持平이며, 光範의 아들 守敦은 호가 遠復齊로 兵曹正郎이다. 守敦은 나면서부터 미남으로 일찍이 翰林으로 있을 때 임금께서 항상 美翰林이라고 칭찬하였다. 임금의 총애가 이와 같았는데도 승진 발탁이 못된 것은 결국 하늘의 뜻이다. 아우 益敦은 進士로 自號 治田堂이다. 詩를 지어 읊기를,
“胸懷何淡淨 卜築更幽湥 白石長年科 玄琴太古音
園中侵藥畝 江上洗塵襟 眞趣渾如此 丹墀肯獻箴
(흉회하담정 복축경유돌 백석장년과 현금태고음
원중침약무 강상세진금 진취혼여차 단지긍헌잠)
마음에 품은 생각 어찌 그리 淡白 한가, 그윽한 계곡에 다시 집을 지었다네.
白石은 長壽할 식량이요, 玄琴은 太古의 소리로다.
정원에서 약초밭 김을 매고, 江上에서 먼지 옷깃 씻는다네.
참된 흥취 물 흐르는 것과 같으니, 무슨 일로 대궐에 獻策하라!“ 라고 하였다.
遠復齊의 아들은 넷인데 澂,沖,湛,濂이고, 治田堂의 아들 다섯은 氵賀,灠,潚,滾,浚이다. 沖은 10세전에 글재주가 크게 뛰어나더니 14세에 漢城試에서 鼎字賦로 壯元하고 또 密陽院樓에 4韻을 題하였다. 湛역시 文章으로 이름이 나고 두 번이나 文科 壯元을 하였으나 모두 忌諱사항에 저축되어 물러나고 말았다. 임종시 막내 아우인이 濂이 울면서 銘旌을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하고 청하였더니 혼절했다가 다시 깨어나 소리 내어 1句를 읊기를,
“靑年壯志驚神鬼 白首虛名愧古今 (청년장지경신귀 백수허명괴고금)
젊을 때 큰 포부 귀신도 놀랬건만, 늙어서 헛된 이름 고금에 부끄럽다.” 하고는 逝去하니 호는 汲古齊이고 文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濂은 文科에 올라 翰林學士로 있다가 外職인 韓山郡守를 지냈다. 일찍이 물가에 집을 지어
挹虛亭이라 편액하고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호를 三休堂이라 하였다. 氵賀는 일찍이 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곧 科擧를 포기하고 대청의 섬돌아래 세 그루의 梅花를 손수 심고 三梅堂이라 하였다. 공은 소시에 矗石樓 연회에서 시를 읊었는데,
“角聲三動小車來 朱戶靑窓次第開 粉面低睂聯席坐 珍羞厭口八盤堆
歌警谷鳥黃莊葉 鼓起沙鷗白點苔 盡日偷閒猶未足 更看明月照樓臺
(각성삼동소거래 주호청창차제개 분면저미연석좌 진수염구팔반퇴
가경곡조황장엽 고기사구백점태 진일투한유미족 경간명월조루대)
뿔피리 세 번 울려 작은 수레 타고오니, 붉은 문 푸른 창이 차례로 열리구나.
화장한 여인들 눈썹 깔고 자리 연해 앉았고, 진귀한 음식 배불리 먹고도 쟁반에 쌓였구나.
노래 소리에 꾀꼬리도 놀라 잎 속으로 숨어들고, 북소리에 갈매기들은 모래밭에 점점이 앉아있네. 하루 종일 놀아도 오히려 부족하여, 다시 바라보니 명월이 축석누대 비추는구나.“
라고 하였다.
濂은 일찍이 奇才를 타고 났으며 특히 詩에 능했으니 擇木知幽鳥라는 詩로 及第하였다. 浚은
은 進士가 되었으나 大科를 포기하고 호를 三足齊라 지어 하는 말이 "書는 姓名을 기록하면 足하고, 名은 進士에 들면 足하며, 食은 죽을 이을 정도면 足하다"고 하였다. 晩年에 新安江위를 노닐면서 "江山을 모두 後人에게 부치노라"라는 詩를 지어 읊고 얼마 못되어 別世하였으니 사람들이 詩로써 조짐을 보인 것이라 하였다. 一家의 형제 9인중 8文章이라 칭하는데 혹은 불행하여 短命하고 혹은 재능이 있어도 낙방하고 혹은 登第하였으나 顯達하지 못했으니 “文章은 壽命과 榮達을 싫어한다.”는 속담이 참으로 빈 말이 아니다. 三休堂든 아들이 4형제인데 勉之, 勖之, 勵之, 養力之이니 모두 일찍 죽었다. 養力之는 지조가 질박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읊은 詩에 이르기를,
“爲樂都緣欲樂心 樂心何事反勞心 勞盡心來成一樂 不如無樂只安心
(위락도연욕락심 락심하사반로심 로진심래성일락 불여무락지안심)
즐거움은 마음이 즐거워야 하는데, 즐거운 마음 무엇 때문에 근심일까?
마음 고생 다한 다음 즐거움이 이루어지니, 즐거움 없는 편안한 마음만 못하다네.“
라고 하였다.
三足齊의 아들은 3형제인데 景訥, 景訒, 景謹이다.
景訥은 일찍이 文才가 있어 연이어 鄕試에 세 번이나 합격하였으나 會試에는 실패하고 돌아오는 즉시 발분하여 붓을 던지고 癸未(1583) 武科에 登第 벼슬이 務安縣監에 이르렀다. 宣祖때 宣傳官으로 있으면서 임금의 총애로 누차 상을 받았는데 하사받은 諺解小學은 그 자손들이 상자 안에 寶藏하고 있다. 아들은 하나인데 이름이 應虎한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하였고 겨우 10세에 季父인 大瑕齋를 따라 嚴惠寺에 놀러 가서 지은 시가 있어 이르기를,
“曉到嚴惠寺 寒鐘第一敲 餘聲渡江水 眠鶴起松梢
(효도엄혜사 한종제일고 여성도강수 면학기송초)
새벽에 도착하니, 처량한 종소리 제일 먼저 올린다.
소리 남아 강물을 건너가니, 졸던 학이 소나무 가지에서 일어난다.“라고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하였으며 傳誦하였으며 癸卯(1603) 武科에 登第하여 벼슬이 僉正에 이르렀다.
아들은 複文으로 庚寅年에 낳으니 大瑕齋가 기뻐하면서 僉正을 불러 이르기를 "항상 네가 武科로 나간것이 恨이었는데 이번에 네가 生男을 하니 天幸으로 우리 가문의 경사로다. 공자와 석가가 친히 안고 와서 庚寅年에 낳게 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느냐. 庚寅은 屈原이 태어난 해인데다가 더욱이 庚자는 호랑이니라. 周易에 이르기를 “豹虎는 문채가 화려하다.”하였고 黃山谷 詩에 가로대 “謝公의 문장은 豹虎문채 같으니, 지금 어린 손자 몸에 찬연히 박혀있네."라고 했다. 우리 先世의 호표같은 문장을 장차 네 아들이 復舊하여 반듯이 문채가 찬연할 것이다. 그 이름을 複文이라 하고 字를 克彬이라 하라" 하니 僉正공은 季父의 가르침대로 기쁘게 따랐다. 克彬이 장성하면서 매우 총명하여 한번 듣고 본 것은 그 때마다 다 암송하고 때때로 입을 열어 시를 읊으면 많은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僉正공이 항상 叔父의 가르침대로 勤勉하니 克彬도 또한 이를 본받아 스스로 학과에 힘써 先世의 業미인 文을 거의 回復할 것 같았다. 그러나 세번 科擧에 응시하여 끝내 한 번도 성취하지 못하고 나이 겨우 40에 卒하여 선세의 업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그 天命이야 어찌 하겠는가?
景訒은 일찍이 文藝를 닦아 누차 과거에 응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늦게야 붓을 던지고 癸卯(1603) 武科에 응시 登第하였다. 공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困窮과 榮達은 모두 天命에 달렸으니 文武科에 등제하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나의 아우 景謹이 일찍이 꿈을 꾸고서 이를 기록해 두었다가 나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조카 應虎와 함께 靑黑色 호랑이 한 마리를 제압하여 그 등에 타고 叔姪이 나란히 큰 골짜기에 들어가 큰 波濤위를 내달리며 의기양양하게 좋아하더란다. 내 아우가 쳐다보고 처음에는 놀랐다가 나중에 기뻐하면서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碧桃紅杏이 머리위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함으로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지금 우리 叔姪이 나란히 같이 虎榜에 합격한 것은 나의 아우가 20년 전 꿈에서 그 징조를 보았던 것이다. 謝良佐가 이른바 몽매간의 일은 바로 성취하지 못하고 초조하게 바라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런 경우를 이른 것인가? 그러나 내 어찌 이로써 榮達이라하여 權貴의 門에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결국은 名利를 쫓는 무리로 전락하겠는가? 이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오두막에서 老年을 한가하게 보내는 것이 나의 初志를 굽히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들은 셋인데 應奎, 應斗, 應翼이다. 應奎는 언변이 좋고 應斗는 詩賦를 잘 하였다.
景謹은 어릴 때부터 君子의 學問을 배워 매사에 감히 자신하지 않았다. 일찍이 覺齋 河先生이 門下에서 禮義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으며 南冥 曺先生의 門下에 미치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였다. 그 학문은 經史를 근본으로 하고 古今을 證據하여 論議가 英發하고 風貌가 늠름하여 사람들이 모두 삼가하고 두려워하였다. 조정에서 공의 風儀를 듣고 持平벼슬을 제수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異議를 제기하는 자가 있어 이루지 못하였다. 일찍이 自號를 大瑕齋라 하였다.
진주목사 崔岦을 방문하고 시를 지어 贈呈하였는데 이르기를,
“진주목사 松川은 글이 가장 특출하니, 두 편 詩는 古人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吏民들은 문장이 귀한 줄 모르고, 오직 베푼 은택만을 애기하네.“라고 하였다.
崔牧使가 이 詩를 보고 謝禮하였다. 임진년에 공이 왜란을 피하여 星州에 갔다가 省墓차 三嘉에서 丹城오는 사이 길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賊을 만나 屈하지 않고 殉死하였다.
東坊에 터가 하나 있는데 노래하고 춤추는 누대의 돌계단이 있다.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 府院君이 이 마음에 살았는데 부유하기가 王侯와 같아 그 부인 蔡氏가 매양 가마를 타고 나와 上下 山坂을 누비며 사냥하고 돌아다녔으니 음란한 탕아와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럼으로 지금까지 蔡氏의 姓만 전하고 主君의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집안 다스림이 이와 같았으니 그 성명이 전하지 않음은 당연하다.
제 3坊 岐內는 山陰縣監 柳東成이 살던 곳인데 進士 柳夢禎이 孝子라고 이 坊에 살았다고 하나 모두 전하지 못한다. 또 茂松尹氏가 있었는데 그 先은 文貞公 澤이고 六世孫 左議政 江이 처음으로 丹溪에 살았다. 그 아들 汴은 判中樞이고 그 아들 子榮은 문과로 장원하고 또 重試에 장원하여 또 發英試에도 합격하였다. 그 후 자손들은 서울로 가고 子榮의 형의 아들 濂은 생원이고, 생원의 아들 浚은 진사이며, 진사의 아들은 彦洙인데 또한 진사다. 姜許孫의 사위가 되어 三嘉의 丘坪으로 이거하였다. 아들 佑賢은 禮賓寺直長이고 그 아들 沂은 金慶山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 坊에서 살았는데 喪妻하고 後妻는 아들이 둘인데 景溟은 登武科하고 景洛은 軍器寺奉事다.
제 4坊은 內法勿禮이니 시내 위 골짜기에 암굴이 있고 폭포가 있어 물이 날고 맑아 옛날부터
漱玉泉이라 稱하였다. 10년 전부터 沙鐵이 많이 나와 그것을 캐어내는 바람에 淸流가 혼탁하여 그 害가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미쳤으나 주민들이 이를 금하지 못했다.
제 5坊은 곧 慕禮다. 奉事 尹京洛이 살만한 곳이라고 터를 잡아 이사 온 곳으로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그 자손이다. 그 위 5里 거리에 栗谷寺가 있다.
제 8坊은 大老里로 옛날에 대장부들이 살던 곳인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그 뒤 농사를 짓는 백성들이 밭 갈고 논을 갈면서 간혹 金銀寶貨를 주었다고 하니 人才가 성했던 마을이었던 모양이다. 또한 孝子로 旌表가 있는 사람, 烈女, 貞節의 旌閭를 받은 사람이 각 하나씩이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대로 높은 벼슬아치들이 살던 마을이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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