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_ 진주정씨

진주정씨(晋州鄭氏)는 다른 말로 진양정씨(晉陽鄭氏)라고도 한다. 진양이 1995년 진주시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진주정씨로 명명되고 있다. 진주정씨는 신라 건국 6부족의 하나인 진지부의 지백호(智伯虎)를 원시조로 한다. 하지만, 지백호 이후의 계대가 밝혀진 바가 없어 이를 증명할 길은 없다.

진주정씨에는 뿌리가 다른 여덟 계통의 정씨가 있다. 이를 진주8(晋州八鄭)이라고 한다. 이들은 동성동본이면서도 세계를 달리하는 여러 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를 비롯한 문헌에 따르면, 진주정씨는 12파가 있다고 전하나, 정확한 소목은 밝힐 수 없고 현존하는 계파는 8계통이라고 볼 수 있다. 그중 4개 파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예(鄭藝), 정자우(鄭子友), 정장(鄭莊), 정헌(鄭櫶)을 시조로 하는 4계통이 그것이다.

 

충장공파(忠莊公派)는 고려통합벽상삼한공신(高麗統合壁上三韓功臣)으로 광록대부(光祿大夫)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정예를 시조로 한다. 그 후 계대로 전해 내려오지 않다가 제학공(提學公) 정시양(鄭時陽)에서부터 계대가 확실해 정시양을 기세조로 삼고 있다. 정시양은 고려 문종 때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의 시조는 진주호장(晉州戶長)을 지낸 정자우이다. 그의 6세손으로 고려 현종 때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에 봉해진 정신열(鄭臣烈)을 중조(中祖)로 하는 파(派)와 7세손 정중공(鄭仲恭)을 중조로 하는 파, 8세손인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정보경(鄭普卿)을 중조로 하는 파로 나누어진다.

공대공파(恭戴公派)의 시조는 정장이다. 정장은 고려 말엽에 통정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를 지냈다. 그의 4세손인 정척(鄭陟)은 조선 태종 때 판윤(判尹)을 지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파도 있다.

정헌계(鄭櫶系)의 시조 정헌은 고려 말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둘째 아들 정택(鄭澤)은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어사공파(御史公派)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계통으로 이뤄진 진주정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1명,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59명을 배출했으며, 정척(鄭陟)·정성근(鄭誠謹) 등 2명의 청백리를 배출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총 7만4777가구에 23만85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진주정씨의 갈래와 내력
첫째, 진주정씨 충장공파는 고려 통합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으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영절공 정예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 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정시양을 기세조로 받들고 있다.
정시양의 7세손 정수(鄭需)는 판도좌랑과 좌사간을 역임하고 진양부원군에 봉해졌고, 이로써 충장공파의 가세가 크게 일어났다. 그의 후손 정을보(鄭乙輔)는 정당문학과 도감제조를 역임했으며, 후에 청천군에 봉해지고, 찬성사에 올랐다(공민왕).
숭정대부로 찬성사를 역임했던 정신중(鄭臣重)의 아들 정이오(鄭以吾)는 조선 태종 때의 명신으로 찬성과 대제학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인 정분(鄭?)은 세종과 문종 조에 걸쳐 조정의 중신으로 많은 치적을 남겼고,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나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의 반대파로 몰려 사사(賜死)되었다.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皇甫仁), 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그도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고신(告身)을 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이후 대신과 대간의 빈번한 청죄(請罪)가 계속되었지만, 1년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 사사되었다.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기국(器局)이 있었다. 문신이지만 토목에 조예가 깊어, 세종 말에서 단종 초에 걸쳐 궁궐 조성·축성, 현릉(顯陵, 문종묘) 조성 등에 공헌했다. 그의 사후 영조 때 가서야 김종서, 황보인과 함께 복권되었다(영조 22). 정조 때에는 장흥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고, 장릉(莊陵) 충신단에도 배식(配食)되었다. 순조 때에는 충신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정문을 세웠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진주정씨 충장공파인 정신중, 아들 정이오, 손자 정분 등 3대 묘가 있는 진주시 상대동 고분군에 있으며, 충장공 정분이 배향된 전남 장흥의 충렬사가 있다.

둘째, 은열공파는 고려조에서 호장을 지낸 정자우의 후손이다. 그의 6세손 정신열이 고려 현종 때 천거되어 여러 직을 거친 후 병부상서에 올라 거란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올라 진양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인 선주지사 정임덕(鄭任德)의 아들 정유(鄭愈)와 정손(鄭孫)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부사가 되었던 정천익(鄭千益)은 당시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왔다가 사위인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씨를 재배하여 물레와 씨아를 창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은열공파 정신렬을 제향한 진주 촉석루 내 청계서원이 있다.

셋째, 통정대부로 첨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던 정장을 파조로 하는 공대공파에서는 세종조의 명신인 정척이 뛰어났다. 정척은 교서관 정자를 거쳐 봉상시 주부와 감찰을 지내고 판한성부사. 수문전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세조 때에는 양성지와 함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편찬했다.

정척의 아들 정성근은 성종 때 대마도에 사신으로 갔을 때 대마도주가 문 밖에 나와 왕명을 받지 않자, 두번 세번 독촉하여 왕명을 받도록 했다고 한다. 그는 효성이 지극해 연산군의 단상법(短喪法)을 어기고 3년 상을 치렀고, 성종이 승하하였을 때에도 3년 상을 행하니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려 죽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그러자 그의 아들인 승문원 박사 정주신(鄭舟臣)은 단식으로 목숨을 끊었고, 아우 정매신(鄭梅臣)과 아들 정원린(鄭元麟), 정원기(鄭元麒), 정매신의 손자 정효성(鄭孝成)이 모두 효행이 뛰어나 4대에 걸쳐 6명의 정문이 세워졌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되자, 전남 광양군으로 피란했다가 정착한 정대유(鄭大有)와 그의 아들 5형제의 후손들이 광양지방에 집중 세거하고 있다. 
경기 하남 초이동에는 진주정씨 공대공파 정척의 묘역이 있다.

넷째, 문하시중평장사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던 정헌의 계통에서는 그의 손자 정온(鄭溫)이 청맹(靑盲)으로 유명했다. 그는 대사간을 역임하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눈 뜬 장님을 가장하고 지리산 청학동에 숨어 살았다.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가 수차례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매서운 절개를 지켰다. 태종이 사람을 보내서 칼로 눈을 찌르는 흉내를 내어 보았으나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온의 아우로 고려 말에 감찰어사를 지낸 정택의 10세손인 정경세(鄭經世)는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성리학자인 사계 김장생과 함께 우리나라 예학(禮學)의 주축을 이뤘다. 시문과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우복집(愚伏集)’ ‘상례참고(喪體參考)’ ‘주문작해(朱文酌解)’ 등이 있다.
진주시 사곡에는 우공공파 시조 정온이 귀향하여 조용히 지내고자 지은 우곡정이 있다.

다섯째, 정자우의 후손이며, 고려 때 첨정(僉正)을 지낸 정중공을 파조로 하는 계통에서는 15세손 정기룡이 유명하다. 그는 초명(初名)이 정무수(鄭茂壽)였으나, 나중에 정기룡(鄭起龍)으로 개명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과 금산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곤양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방어했다. 상주판관으로 상주성을 탈환한 후 성주·합천·초계·의령·고령 등지의 여러 성을 탈환하는 데 이름을 떨쳤다.

이외에도 정신(鄭侁)을 시조로 하는 지후공파(祗侯公派), 정안교(鄭安校)를 시조로 하는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 등이 있다.

진주정씨의 인물들

▲충장공파에서는 고려개국공신으로 문하시중에 오른 시조 정예가 있으며, ‘고려사’를 편찬한 정이오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을보는 공민왕 때 찬성사가 되었으며, 문영공(文英公) 정수는 대제학을 지냈고, 문영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정수규는 정당문학을, 정천귀는 대제학을 지냈으며, 충장공 정분은 정이오의 아들로 단종 때 우의정에 올랐으나, 세조의 계유정난으로 죽음을 맞았다.

▲은열공파에서는 시조 정자우가 고려 때 호장을 지냈으며, 6세손인 정신열은 병부상서에 올라 거란침공을 격퇴하였다. 공민왕 때 정천익은 사위인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오자 이를 시배(始培)하여 물레와 씨아를 창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자우의 후손으로 첨정을 지낸 정중공은 첨정공파의 시조가 되었으며, 정기용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공대공파에서는 시조 정장이 고려 말에 통정첨지를 지냈으며, 4세손 정척은 조선 태종 때 판윤을 지냈다.

▲어사공파에서는 시조 정헌이 고려 말에 평장사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정온(우곡)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냈고, 우곡공파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손자 정택은 고려 때 감찰어사를 지내, 어사공파를 이었다. 정택의 10세손 정경세는 조선조 대제학을 지내고 김장생과 함께 조선 예학파를 대표한다.

그외 지후공파의 시조 정선은 고려 때 지후에 올랐으며, 내부사공파의 시조 정안교는 고려 때 판내부사를 지냈다.

진주정씨의 현대인물로는 정일형(유엔총회 한국대표, 국회의원, 외무장관, 신민당부총재) 박사와 그의 아들 정대철(국회의원)이 있으며, 그외 국회의원으로 정세환 정헌주 정준 정상용 정균환 정동호 정상열 정갑주 정재완 정순덕 등이 있고, 서울시장을 역임한 정상천 변호사도 진주정씨이다. 또한 법조계에서는 정기승(대법판사), 정창운(검찰총장)과 변호사로 정덕기, 정창훈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교육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원식 총리가 있으며, 정정환(부산대 대학원장), 정운오(미 일리노이주립대 교수), 정재환(법학박사, 동아대 총장), 정수봉(법학박사, 동국대 총장), 정재각(문학박사, 동국대 총장), 정동규(약학박사, 숙명여대 약대 학장), 정요한(이학박사, 조선대 교수)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정주영(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정재구(제일제당 사장) 등이 있다.

김성회 /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https://n.news.naver.com/article/022/0002477854

<北洞入坊考證>

北洞里屯鐵山 아래 빙 둘러 있는데 주위가 10이고 중국 巴楚明月협곡과 같으므로 그 위에 月明寺가 있다. 골짜기는 맑은 시내를 끼고 있는데 시내 위, 중간, 아래, 左右에 다섯 마

을이 있다. 1은 곧 시내 아래인데 羅氏鄭氏가 살고 있다. 鄭禮明이란 사람은 벼슬이 淸州牧使이고 그 아들 仲孫은 또 武科에 급제하여 內禁衛를 지냈다. 비록 벼슬이 崇班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 財産王公에 비할 만하여 凶年에 능히 9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으니 당시 사람들이 입이 닳도록 칭송했다. 아들은 없고 딸만 있었는데 正武公의 아들 李處仁에게 시집보내어 그 집안을 전했다.

羅氏判書 廷老가 이 사람이다. 그 아들 有文燕山朝短喪法이 엄하던 시절 母親이 죽었는데 홀로 執喪대로 행하다가 슬픔으로 몸을 훼손하여 병이 들었다. 그 아내와 永訣하며 말하기를 “3년 동안 어머니 祭祀하기를 내가 살아있을 때와 같게 하라.”고 하니 아내가 그 말을 따라 비록 風雪이 몰아쳐도 반드시 墓祭를 친히 드리면서 폐하지 않았다. 이 일이 朝庭에 알려지자 有文과 아내 李氏에게 모두 旌閭를 내렸다. 天道가 무심하여 나라 鄧伯道처럼 자식이 없었으니 羅氏世傳家業은 모두 判書의 사위인 姜儉에게 돌아갔다. 晉陽人

데 장원급제하여 버슬이 郡守에 이르렀다. 俗傳하기를 少時月明寺에서 讀書했는데 꿈에 한 僧侶가 간곡히 고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미 땅속 괴물이 된지 오래 되었으니 어찌 배가 고프지 않겠는가! 그대가 만약 나로 하여금 다시 天日을 보게 하고 중들의 供養을 먹게 해준다면 원하는 바를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이 즉시 家僮寺僧을 데리고 뜰 가운데를 석 자나 팠지만 아무 것도 없으므로 허망한 꿈이라 여겼다. 그날 밤 또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만약 다시 한 자만 더 파면 효험을 볼 것이다.”라고 하므로 그 말대로 다시 파니 과연 七尺 石佛이 있었다. 諸僧이 합장하고 賀禮하며 말하기를 선비께서는 필시 이제부터 陞進할 것입니다.” 라고 하더니 5-6년이 못되어 과연 登科하였다. 이 일찍이 스스로 얘기한 것이 지금까지 전한다.

2은 곧 시내 중간인데 이곳은 正武公의 손자 義淳이 살았다. 그 아들 繼裕5명을 낳았으니 장남은 ()이고 다음은 ()이며 다음은 ()이고 다음은 ()이고 다음은 ()이다. 은 능히 儒者로 처신했고 는 아울러 文科에 급제했다. 이 세상을 떠나자 의 아들 三陟府使 昌墓碣銘을 지었는데 5의 일을 매우 상세하게 적었다. 그러나 유독 神德王后慶順公主에 관해서는 그 글이 소략하여 大體를 볼 수 없으니 무엇 때문인가? 이 알면서도 상세히 적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몰라서 상세히 적지 않은 것인가? 살펴보건대, 洪武25(1392)景武公에게 鐵券을 하사했으니 이에 말하기를 의 어머니를 惠寜翁主에 봉하고 의 아내를 慶順宮主라 명했으니 君親思念을 더욱 돈독히 하고 장인

과 사위의 恩義를 소홀히 말라.“고 하였다. 君親의 은덕과 의리가 지극하여 마땅히 沁水(東漢 明帝의 딸인 沁水公主園林이 있던 곳으로 여기서는 慶順公主田庄을 비유한 듯함)를 오래 보전하고 蘭陵(나라 武帝의 어머니인 張后이 있는 곳으로 여기서는 神德王后을 비유한 듯함)을 길이 수호하여 무궁토록 慶事를 전할 것 같았다. 그러나 數世도 미치지 못해 800리 밖으로 유배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공주를 시집보낸 것은 신덕왕후 康氏또에 의해서인데 신덕왕후의 릉은 太宗朝에 헐어버렸고 그 자손들의 유배도 또한 太宗朝에 있었던 일이다. 그 후 世宗朝芳碩昭悼公에 추증했고 明宗朝에 이르러 신덕왕후의 릉을 복원하려 했지만 릉의 소재를 알지 못해 안치하지 못했다. 또한 5世孫으로 부름을 받고 御前에 나가 아뢰었는데 그 말이 신의 祖父800리 밖으로 유배되었으니 朝廷의 명령을 받지도 않고 어찌 감히 사사로이 展謁하여 그 를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은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알면서도 상세히 적지 않았다는 것은 타당한가? 碑石에 뚜렷이 새기는 것은 장차 자손에게 보이려는 것이니 어찌 상세히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孔子께서 나라 諸侯의 일을 諱隱한 것처럼 그렇게 한 것이라면 墓碣銘은 부실하게 기록하여 그 사실을 분명히 밝히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으니 先朝를 추념하고 後孫을 생각하는 계책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의 아들 중에 장남은 惟謙이니 惟謙은 자녀의 도리를 다하고 學問하는 일에 근면했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惟謙의 아들 또한 강개한 기질에 讀書를 즐겨하면서 出世하여 집안은 일으키려 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惟謹의 아들 節義를 지켜 安貧면서 자손을 많이 두었다.

3은 곤 시내 오른쪽이니 이곳은 武科 급제한 從仕郎 李處仁의 터인데 壯元李智亨의 아들 生員 翕()處仁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에 살았다. 參判 朴聰4世孫寅亮은 곧 孫壻인데 寅亮은 평생 儒業을 행하고 一身을 삼가하며 博學했으나 끝내 科擧에 합격하지 못했다. 父親 蓁()도 누차 科擧에 실패했고 아들 ()도 또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여 朴氏 3가 세 번이나 落榜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資憲大夫 領中樞 剛莊公 河漢의 손자인 李義淳의 딸에게 장가들어 또한 이 마을에 살았다. 그 손자 汝灌武科에 급제하여 訓鍊院 僉正이 되었다.

 

4은 바로 시내 왼쪽인데 이곳은 光陽縣監 姜行의 거주지이다. 그 아들 文會典籍이고 그 손자 判書이나 바로 惠平公이다. 弱冠時 또래 몇 명과 더불어 鄕校에서 讀書하다가 凉亭에 술이 익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네 사람이 밤중에 항아리 있는 곳에 들어가 술 항아리를 짊어지고는 달아나 江樓위에 이르러 한껏 마시고 놀다가 돌아갔다. 이에 각기 七言詩 1로 그 일을 읊었으니 그 에 이르기를,

晉代疎光畢吏部 風流千載付吾儕 偸來夜半無人縛 大醉還山月欲低

(진대소광필리부 풍류천재부오제 투래야반무인박 대취환산월욕저)

 

나라 괴짜 술꾼 필리부 그 풍류로 천년 흘러 우리에게 전해졌네.

한밤중에 훔쳐와도 잡아 묶는 사람 없어, 大醉하여 돌아오니 달이 이미 지려하네.“

라고 하였다. 末句가 바로 判書가 읊은 것이니 사람들이 그 大成할 것을 알았다.

(* 畢吏部 : 나라 吏部郞을 지낸 畢卓,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무척 좋아했는데 한번은 이웃집에 술이 익자 밤중에 몰래 들어가 술항아리 곁에서 훔쳐 마시다가 주인에게 들켜 밤새도록 묶여 있었다고 함.)

이 마을에 또 八莒君 都有德11世孫著作郞 希齡의 거쳐가 있다. 希齡咸陽人으로 少時부터 文章을 닦아서 붓을 잡으면 즉시 써내려가 사람들이 모두 傳誦했는데 불행히도 短命했다. 著作郞의 아들 敬孝一源인데 어려서 孤兒가 되었지만 일찍 성숙했으니 外祖母 梁氏가 유달리 사랑했다. 梁氏進士 應鯤의 딸로 參奉 起門의 아내이니 儒家에서 생장하여 見聞이 넓고 詩禮에 익숙했다. 항상 무릎 위에 앉혀놓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으로 글을 가르

치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鳳毛처럼 유달리 특출하여 능히 제 아비를 이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성하여 文詞에 크게 힘을 쏟더니 에 더욱 뛰어나 神技에 가까운 글귀를 연달아 지었으므로 諸人들이 모두 따를 수가 없었다. 누차 科場에서 이름을 날려 벼슬길에 오르는 일을 단숨에 기대했으나 나갈 때마다 실패하고 또 액운이 겹치자 드디어 세상에 뜻을 끊고는 인하여 病隱이라 自號했다. 당시 金大瑕子 李梧月堂 吳德溪 諸賢 모두 절친한 벗으로 서로 더불어 推重했다. 德溪가 일찍이 말하기를 先親께서 一源先大人과 더불어 왕래함이 一家와 같았으므로 나도 일원과 더불어 또한 兄弟情義가 있다.”고 하였다. (1521년생 吳德溪1556년생 病隱보다 나이가 35세 많고, 병은의 부친인 1539년생 著作郞 보다도 18세가 많으니 아마 착오가 있는 듯 함) 病隱二子를 두었으니 장남 聖欽先世의 풍골을 지녀 武藝를 좋아했다. 차남 聖兪鄰哉인데 모습이 古風스럽고 마음이 활달하며 言辭가 유창하고 理致에 통달했으며 易數에 조예가 깊어 隱遁을 핑계 삼아 세상을 觀照했다. 내가 일찍이 淵源의 유래를 물으니 말하기를 는 하늘에 있고 는 사람에게 구비되어 있으니 우러러 바라보고 굽어 살피면서 그 이치를 탐구하면 무슨 疑惑이 있겠는가! 河圖伏羲氏에게 나타나고 洪範九疇임금에게 내려짐으로부터 天地萬物의 변화가 모두 명확히 드러나 남김이 없다. 그러므로 가 있으면 가 있고 가 있으면 가 있으니 는 애초에 서로 격리된 것이 아니다. 를 따라서 를 궁구하면 사물의 情狀運籌하는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매양 니라 邵康節이지은 皇極經世書를 보면 開闢이래로부터 그 年數를 헤아려 1에서 12가 경과하고 1에서 30이 경과하며 1에서 12가 경과하면서, 하면 하고 하면 하며 해서는 다함이 없다.” 라고 하였다.

내가 그 학문을 보건데 河圖 洛書를 근본까지 추구하고 털끝처럼 미세한 부분까지 파고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환히 疑惑이 없게 하였다. 오직 그가 을 크게 완미고 象數設을 헤아려 밝힌 것은 모두 孝悌의 도리였다.

내가 알기로는 都君이 일상으로 가까이 하는 바는 易書이고 즐겨 완상하는 바는 爻辭이다. 이치를 함양하고 孝悌의 도리를 발휘하여 이로써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이로써 몸을 닦았으니 집안을 다스리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에게 우애롭게 하면서 妙理를 탐구하고 變化를 관찰하는 것이 바로 그의 학문이다. 日月度數를 헤아려 그 차고 기움 만을 고찰하거나 星辰運行을 헤아려 그 자리와 머무는 곳만을 살핀다면 어찌 족히 都君을 얘기할 만하겠는가! 나는 都君이 이런 학문을 가지고 있는데도 아는 사람이 적은 것이 슬프기 때문에 갖추어 기록한다.

6은 곧 葛田이니 故 兪政丞의 터이다. 그 자손 중에 쇠미하여 賤人이 된 兪薰이란 자는 나이 90인데 항상 말하기를 우리 先世兪政丞이 이곳에 살다가 이곳에 묻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름을 물으면 알지 못하므로 政丞의 이름이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7은 곧 加坪이니 들판 서쪽은 安州判官 孫暝의 손자인 敬宗의 거주지이다. 敬宗武科에 급제하여 軍器寺 判官을 지냈고 아들 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그 스승을 위해 心喪 3년을 입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칭송했다.

들판 동쪽은 예부터 칭하기를 三嘉縣監 柳某의 거주지라 하였다. 정자 터가 新安驛 상류 바위 위에 있는데 모두 柳三嘉江舍 터라고 이른다. 도 또한 加坪에 있었는데 鄭業龍이란 자가 碣石을 뽑아버리고 그 父親앞에다 葬事했으니 사람들이 그 만 알고 그 이름을 모르게 되었다. 유식한 사람이 이 마을에 살았다면 業龍은 필시 를 받았을 것이고, 柳氏

이름도 後世에 전해졌을 것이다.

加坪의 상류는 바로 水月洞이다. 그 위에 落水巖이 있으니 고을의 士友들이 항상 노니는 곳이다. 都病隱이 일찍이 를 지어 읊기를,

仙人去後石臺空 白日雷鳴翠峽中 靑蓮若見流觴處 應道廬山在下風

(선인거후석대공 백일뇌명취협중 청련약견유상처 응도여산재하풍)

仙人들이 떠난 뒤 石臺만 남았으니, 대낮에 우레소리 푸른 峽谷 진동한다.

李太白이 만약 이곳 流觴曲水를 보았다면, 廬山 풍류 하찮다고 응당 말했으리.“

라고 하였다.

8新安驛이니 의 북쪽 10新安院松界院 중간에 있다. 松界院은 바로 松界部曲의 자리인데 거주하는 사람은 없고 풀만 무성하다. 洞口新安江上周氏 李氏 羅有文旌閭가 있다. 周氏는 곧 復信의 딸이자 姜隱인데 혹자들이 말하기를 貞節梁應鯤이 촉발시켰다.”고 한다.

<상량문(上梁文)>

우리 전통문화에서 집을 지을 때 행하는 의식인 상량식이 있다. 집은 삶의 근거지이고 많은 돈과 노력이 드는 것이므로 혼례식, 장례식 등과 함께 그 의식은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다. 공사를 하기 위해 터를 닦기 시작할 때 산천과 사당에 고하는 고유제를 지내고 집의 골조를 완성하였을 때는 상량식을 거행한다.

상량은 건물 골격이 완성되는 들보(종도리)를 올리는 과정으로 가신(家神)인 성주가 탄생하는 순간이며, 건축 과정에서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들보를 올리며 상량식을 거행할 때, 상서로운 기운과 경사, 그리고 신령에 대한 경의를 담은 표현을 상량문에 담았다. 그 상량문은 종이나 비단 같은 천에 적어, 종도리나 종도리를 받치는 부재인 장여에 홈을 파고 넣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오래된 건축물에는 상량문이 남아있고 전해져왔다.

그 상량문에 대해 알아본다.

 

상량문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다. 서두에 그 집을 짓게 된 연유와 집주인의 인품, 공사 참여자, 상량 일시 등을 적는다. 다음은 동, , , , , 하 여섯 방향에 따라 축시(祝詩) 여섯 수를 짓는다. 이어 상량 후 좋은 일이 이 집을 통해 많이 일어나기를 기원하는 글귀로 마무리한다.

서문에 이어지는 축시는 맨 먼저 아랑위포량동(兒郞偉抛樑東)’이란 정형화된 문구로 시작한다. ‘아랑위포량동이어 동, , , , , 하 여섯 수의 축시가 이어진다.

 

{현종 8(1667), 종묘 영녕전 개수(改修)된 상량문의 축시를 보면

아랑위포량동(兒郞偉抛樑東) / 맑은 봄날 낙산에 아침 햇살 붉구나 / 모든 영령이 수놓은 문, 길이 보호하니 / 만년(萬年)토록 좋은 기운 성대히 머무르리라

아랑위포량서(西) / 금원에 서리와 이슬 내려 밤이 서늘하네 / 제관이 제사 지내려고 벽돌 사당 길 가니 / 악기에 맞추어 일제히 일무를 추네

아랑위포량남() / 전각에 부는 훈풍 나무들이 머금네 / 맑은 그늘 펼쳐 온 나라에 나누어 주고 / 당시 남기신 교화 지금까지 이르렀지

아랑위포량북() / 별들이 흩어져 북극성 둘러싸네 / 변함없이 남쪽을 바라보는 군왕의 병풍 / 천년(千年)토록 사당을 공경히 우러러보리라

아랑위포량상() / 상서로운 구름 아득히 의장(儀仗)을 가리네 / 참된 저세상 제향이 멀다 마라 / 뵙는 듯 지극정성에 신령이 흠향하리라

아랑위포량하() / 도성의 연무가 수많은 기와를 감쌌구나 / 성은으로 물산이 풍부하고 백성이 평안하니 / 환호와 기쁜 기색은 조야가 모두 같네!”

 

여기서 아랑위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어영차의 의성어라는 설이다. 그 다음 이어지는 던질 포, 들보 량, 동녘 동과 어우러져 어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라고 해석한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 고사에 따르면, 육조시대 이래 건축물의 골격이 완성된 뒤에 길일을 잡아 들보를 올리며 상량식을 거행하는데, 이때 친지들이 음식을 싸 와서 축하하고 목수를 대접한다. 그러면, 목수의 우두머리인 도목수가 들보 위에 걸터앉아 만두와 떡 등 제물을 사방과 위아래로 던지며 상량문을 읽는다. 이때는 아랑위는 의성어가 아니라 젊은이를 일컫는 아랑의 복수형으로 도목수가 장인들을 부를 때 통상적으로 쓰는 말이다. ‘아랑위포량동여보게, 들보 동쪽으로 떡을 던지세의 뜻이 된다.

, 아랑위포량동, , , , , 하로 이어지는 시구에는 각 방향에 해당하는 사물을 노래한다. ‘낙산은 영녕전의 동쪽에 있고, ‘금원은 궁궐의 후원으로 서쪽에, ‘나무들은 남쪽에, ‘북극성은 북쪽에, ‘구름은 위에, ‘도성은 임금이 다스리는 아래에 있다.

 

축시 뒤에는 복원상량지후(伏願上梁之後: 삼가 바라옵건대 상량 후에는)’라는 말을 시작으로 기원하는 문구로 끝을 맺는다. 영녕전 상량문에는 삼가 바라옵건대 상량한 후에는 국운이 장구하고 하늘의 아름다움이 더욱 이르리라. 효손에 경사가 생기리니 만년 장수하길 돕고 선왕을 잊을 수 없으니, 멀고 오랜 세월 동안 혈식(血食: 종묘 제사 때 쓰는 생고기, 즉 희생)을 받으리라라고 했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글 발췌)

 

일반적으로 큰 집이 아닌 경우에는 짧은 문장의 상량문을 종도리 바닥에 종서(縱書)로 쓴다. 종도리 아래에 부재인 장여가 있으면 장여에 가려 글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장여 바닥이나 종도리장여 측면에 쓰기도 한다. 순서는 집의 중심인 안방 쪽에서 시작해 건넌방 쪽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재액방지 문자로는 용()과 거북()이 가장 많이 쓰이고, 호랑이(), (), 기린(麒麟)도 쓰인다. 용은 용용용(龍龍龍), 용반(龍盤), 해룡(海龍), 활룡해룡(活龍 海龍), 구룡(龜龍)으로 적기도 한다. ‘()’도 구구구(龜龜龜), 낙구(洛龜), 수구(水龜), 산구(山龜), 하구(河龜)로 적기도 한다. 때로 상형문자나 그림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상량문에 거북을 적는 이유는 용과 거북이 물의 신(水神)이므로 화재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물이 아닌 해(), (), (), () 등의 문자도 화재를 방지하려는 의도로 쓰인다. 거북은 수신으로서 화재 방지의 의미가 있지만 장수 동물이나 길상 동물로도 인식된다. 호랑이는 벽사(辟邪)의 의미, 기린(麒麟)()은 길상 동물을 의미한다.

상량문에는 종도리를 올린 시간인 상량시(上樑時)인 년,,,시를 적는다. 건물이 마치 사람의 탄생처럼 탄생일인 사주(四柱)가 정해진다는 의미이다.

연도는 광무칠년갑진(光武七年甲辰)’처럼 연도와 간지를 표기한 방식이 일반적이다. ‘세재(歲在)’ 또는 태세(太歲)’라고 적고 간지 또는 연도를 적기도 하며, 청나라 연호인 동치(同治)’, ‘광서(光緖)’, ‘함풍(咸豐)’, ‘가경(嘉慶)’과 명나라 연호인 숭정(崇禎)’을 적는다. 대한제국기에 지어진 민가 상량문에는 광무(光武)’ 또는 단기(檀紀)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서원과 같은 유교 건물인 경우 공부자탄강(孔夫子誕降), 사찰 건물은 불기(佛紀)나 세존응화(世尊應化)로 각각 쓰는 등 건물 성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최근에 지어진 가옥은 서기(西紀)를 많이 사용한다. ‘()’를 적을 때 고자(古字)()’를 사용하기도 한다.

상량문에 자좌오향(子坐午向)’처럼 건물의 좌와 향을 적기도 하고, 가주(가주)의 이름이나 생년을 적기도 한다.

짧은 기원문(祈願文)을 적는데 응천상지삼광 비인간지오복(應天上之三光 備人間之五福)’이 가장 많이 쓰인다. ‘하늘의 삼광(三光)인 해별은 감응하시어 인간의 오복을 내려주소서.’라는 뜻이다. 이 밖에 부귀영화 자손창성(富貴榮華子孫昌盛), 부모천년수 자손만세영(父母千年壽子孫萬世榮)도 가끔 쓰인다. 쓰는 방식은 기원문의 글자가 많아서 대개 두 줄로 쓰며, 다른 글자보다 작은 글씨로 쓴다. 이 밖에 목수의 이름을 적기도 하고 오행(五行)을 적기도 한다.

 

전통 건축물의 마지막 공정에 해당하는 상량식에서 상량은 단순히 건축물의 완성을 알리는 의식을 넘어서, 그 건축물이 지닌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알리고, 건축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노고를 기리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건축물이 안전하고 풍요로운 기운을 불러일으키기를 기원하는 전통이다. 상량문은 건축물의 목적, 설립 연도,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등은 후대에 그 건축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여, 우리 문화와 역사를 보존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현대에는 전통 의식과 절차가 없어지고 또 달라진다. 성인식, 혼례식, 장례식 등의 중요한 의식도 전통과 많이 변하고 있다. 시대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 없는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는 미래 또한 없는 것이 상식이다. 옛 것을 알고 창의적으로 변화 하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정신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도 적용 가능하며 오늘날 살아가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元堂里 八坊 考證>

元堂里의 제 12元堂里 동쪽과 서쪽에 있는데 그 가운데는 개울 하나가 있다. 그 서쪽 마을은 바로 蔚山郡守 金滕의 거주지로 그 아들 潤生生員이고 그 손자 龜老忠順衛이니 에 거주할 때부터 富豪라 칭하였다. 그 손자 用貞 또한 生員인데 用貞이 일찍이 喪妻하여 그 묏자리를 東方谷에서 잡더니 古塚을 파고서 壙穴을 뚫었다. 이날 밤 鬼火가 공중에 연이어 왕래하다가 東方谷에서 길을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가니 이웃의 유식한 이가 그 불길함을 알아차렸다. 이에 한 달도 못되어 用貞이 죽었고 그 장남 은 자식이 없었으며 차남 도 그 손자에 이르러 또한 後嗣가 끊어졌다. 後人들이 마땅히 본보기로 삼아야 할 일이기 때문에 괴이한 일을 기록한다.

圃隱 文忠公5世孫鄭浣金潤生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거주했는데 생원이다. 그 아들 光胤또한 登科하여 藝文館 檢閱에 천거되었으니 名聲이 혁혁했다. 그 후 자손들이 모두 명성을 잃지 않고 朝廷에서 벼슬했으니 지금의 右相 維誠은 바로 檢閱5세손이다.

東萊府使 李圖男은 곧 忠順衛 金龜老의 사위인데 그 아들 光前이 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癸卯年(1543) 생원시에 장원하고 丙午年(1546)登科하여 承文正字를 지냈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아들 天慶日新堂인데 일찍이 南冥 曺先生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誠意鐵門關이라는 가르침을 얻어 체득한 바가 있다. 평생토록 반드시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한 뒤 衣冠을 갖추고 家廟에 참배하고는 걸상에 단정히 앉아 하루 종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鄕人들이 廟堂에서 享祀할 만한 분이라 하면서 말할 때마다 반드시 日新堂 日新堂이라했다. 二子를 두었는데 장남 는 기개가 있었고 季子 瑛은 풍채가 깔끔하고 학문을 겸비했으며 그 淵源家庭에서 나왔으니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그 동쪽 마을은 바로 淸州牧使 姜麟이 거주하던 곳인데 興安君4世孫 成均博士 李晁가 곧 孫壻였으니 李氏의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三男을 낳았으니, 장남 惟誠이고 차남은 惟訥이며 계남은 惟說이다. 惟誠은 장원급제 하였고 惟說은 생원이 되었지만 惟訥은 누차 鄕試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모자란다고 하였다.

그러나 惟訥만이 유독 아들과 손자로 이어 능히 집안을 일으켜 世業을 전했으니 사람들이 비로소 隱德이 있어 福祿이 다하지 않음을 알았다. 惟誠의 아들 또한 生員이 되어 參奉에 천거 되었다.

惟誠은 벼슬이 榮川郡守에 이르렀으니 晩年都山鷹巖상류 碧溪근처 동네로 이주하여 梧月堂이라 自號했다. 물을 끌어와 못을 만들고 못 위에 정자를 지어 天雲亭이라 편액하고는 시를 지어 읊기를 留得天雲許盪懷(유득천운허탕회: 천운을 머물게 하여 회포를 씻어내리)”라고 하였다.

權太師20世孫鄭圃隱 文忠公5世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 마을에 살았다. 뜰에다 손수 雙槐를 심어놓고 그 安分이라 편액 했으며 四子를 낳아 文顯 文著 文任 文彦이라 이름을 지었다. 君子로다. 이 사람이여!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본연의 모습대로 處身하며 벼슬도 원치 않고 많은 재물도 바라지 않으면서 오직 이 많은 것만을 부자로 여긴 이로다. ! 性情을 가다듬고 自足함을 아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은 반드시 文學으로써 그 자손에게 남겨주려 하면서 그 을 쌓고 학문을 축적했으니 아들 하나 손자 하나가 마침내 전후로 文科에 급제하여 드디어 雙槐亭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 전일에 을 닦아 뒤에 보답을 받음이 마치 맞추듯 일치하니, 이는 송() 진종(眞宗) 때의 진국공(晉國公) 왕호(王祜)가 집 정원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三槐亭을 지어 후대에 삼정승이 나오기를 믿었다는 것과 비교해 보건대 어떠한가!

이 세상을 떠나자 의 아들 文任墓碣銘을 지었는데 한 자 한 자가 모두 엄정하고 슬픔이 극진하여 追遠永慕의 정성이 言表에 드러나 있으니 참으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하겠다. 남의 자식된 이들이 이 墓碣銘을 본다면 누군들 눈물을 흘리면서 효성스런 마음이 한없이 생겨나지 않겠는가! 하물며 자손에게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 에 말하기를 孝子不匱永錫爾類(효자불괘영석이류 ; 효자는 다함이 없으니, 길이 닮은 이를 내린다.)”고 하였다. 이에 나는 權氏의 자손 중에 그 장차 父母에게 효도할 이가 면면히 이어질 것을 알겠으니 父親을 위해 손가락을 자른 이로서 어찌 유독 權洚(권홍)한 사람만을 꼽겠는가! 文彦의 아들이다. 文彦이 죽을 적에 의 나이 겨우 弱冠이었는데 父親을 위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다시 소생하게 했으니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킴은 이와 같다. 의 아우 ()癸卯年 (1603) 武科에 합격했고 그 형 ()의 아내 姜氏丁酉年 倭亂에 절개를 지켜 드디어 그 旌表했다. 文顯 文著 文任 文彦은 모두 家庭의 훈도를 받아 생장했으니 그 見聞이 전부 출중하여 難兄難弟라 하였다. 그러나 유독 文顯自挽詩陶淵明自挽詩와는 달랐다. 淵明은 평생 술을 넉넉히 마시지 못한 것을 한탄했지만 男子가 풀처럼 시드는 것을 한탄했으니 이 평생토록 기약한 바는 淵明보다 한 단계 높았던 것이다. 선비에게는 不朽한 것이 세 가지(入德, 入功, 立言) 있는데 이 이르기를, “忍將男子志甘與草同枯 (인장남자지감여초동고 : 차마 어찌 남자의 뜻을 품고, 풀과 같이 시들겠는가!”라고 한 一句 또한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의 아들 登科하여 工曹佐郎이 되었는데 이는 참으로 遺澤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觀相家로 성이 王氏인 자가 일찍이 여관에서 佐郞公을 보고 말하기를 의 형태인데 얼굴과 등에 환히 빛나는 것은 모두 虎彪의 무늬로서 그 文彩가 찬연하다. 이는

필시 의 부친께서 文章에 능했지만 及第하지 못하여 그 아들에게 文彩로 남은 것이다. 부친의 뜻과 사업을 잘 계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의 뜻이 비록 앞에는 좌절되었지만 뒤에는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草木처럼 썩어버리겠는가! 선비 文學을 많이 닦아 그 을 쌓은 이는 반드시 後代에 넉넉해진다. 나는 이에 不朽함이 命數窮通에 있지 않고 文學을 많이 닦아 그 을 쌓음에 있는 줄을 알겠다. 드디어 이를 두루 갖추어 기록한다.

3-4은 곧 文乙 部曲上下마을이다. 윗마을에 사는 이들은 土着人이 많은데 住民들이 부지런하여 자못 농사를 잘 짓고 있다. 아랫마을에는 部曲의 티만 남아있고 거주하는 사람은 없다.

5은 이름이 立石인데 溪上에 서 있는 돌이 있으므로 인하여 이름했다. 大丈夫 가운데 그 고요함을 사랑한 이들이 간혹 집을 짓고 거처했으나 오래 살지는 못했으니 기록하지 않는다.

6沙月이니 이곳은 丹城晉州의 접경으로 名區라 부르는 곳이다. 앞에는 시내가 있고 뒤에는 산이 있는데 산 이름은 尼丘山이고 그 위에 消怪寺가 있다. 姓氏一區를 전승하여 世居하니 黃氏李氏이다. 黃氏故 判書 孟獻曾孫生員으로 난리에 죽었고 은 시골에 숨어 집안에서 늙었다.

李氏故 興安君 5世孫으로 이름이 賀生이니 壬戌人이다. 그 담장 안의 정자 앞에 거북처럼 엎드려 있는 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 오래된 梅花 한그루가 있어 매우 기이하다. 賀生은 날 때부터 孤兒였는데 장성하자 父親喪을 입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忌日이 되면 30전부터 흰 옷을 입고 맨 밥을 먹었으며 30뒤까지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70살이 되도록 이를 게을리 아니하다가 일생을 마쳤으니 君子는 종신토록 을 입는다.”는 말이 이를 이른 것이다. 丁酉年 倭亂에 사방을 떠돌다가 父親 忌日이 되어 저녁 무렵 星州 多基村에 들어

가니 主人의 영접함이 매우 극진했다. 賀生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禮儀가 이리 근면합니까?”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내가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이제 그대의 모습을 보니 쓸쓸하고 애잔하여 마치 간절히 누구를 思慕하는 듯합니다. 무슨 일입니까?”라고 하였다. 賀生원컨대 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꿈에 大人 한분이 이곳에 찾아와 나에게 이르기를 나는 丹城 사람인데 내일이 내가 죽은 날이다. 나의 아들 賀生이 오늘 저녁 필시 이곳에 와서 내일 나에게 제사를 지낼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이 말을 듣고 痛哭하기를 을 당한 사람처럼 哀痛하게 하니 主人 또한 마주보며 눈물을 흘리다가 그 집안에 있는 음식을 모두 내어 祭需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 精誠은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

7墨谷이니 故 淸州牧使 姜沆이 살던 곳이다. 出仕한 뒤에는 그 世業의 아들 汝檣 에게 주고 晉州 元堂里로 이주했다. 梁山亭舍 자리가 남아있는데 완연히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8은 바로 培養山이니 곧 周氏文氏의 거주지이다. 周氏는 토착 성씨인데 世侯은 모두 判書였으며 孝行으로 旌閭를 받았다. 文氏 또한 토착 성씨로 이 마을에 살면서 顯達한 이가 20명이다. 그 중 判書2, 提學2, 學士2, 獻納1, 學諭1, 及第한 이가 3, 郡守 縣令4, 監察1, 奉正1, 進士3명인데 그 중 한 분이 江城君 益漸이다. 한 마을의 人才가 성대함으로 말하자면 당연히 그 마을 이름을 調元里라 해야 하는데도 主上이 특명하여 孝子里라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라는 것은 百行의 근원으로 忠臣을 구할 적에 반드시 孝子가문에서 택한다. 江城君實蹟退溪先生이 지은 碑閣記에 적혀 있다.

그 후 이 마을에 거주한 李氏는 그 先系江陽人이니 尙書左僕射 景芬8代孫參軍 李通이 급제한 文承魯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 후 거주하는 자손들이 비록 富貴를 누리지는 못했으나 대대로 文學하는 선비가 이어졌다. 李源自號淸香堂이니 행실이 더욱 드러나 退溪 南冥 두 선생의 문에 종유했다. 江城君行義功德一國에 선양하여 아이나 하인들도 모르는 이가 없게 한 것은 모두 에게서 나왔다. 曺先生은 교분이 매우 친밀하여 서로 더불어 陽春曲” “白雪曲같이 빼어난 唱和했고 또 淸香堂 八詠을 지었다. 의 아들 光坤은 호가 松堂이니 가업을 계승했다. 의 아우는 이고 의 아들 光友는 호가 竹閣이니 천품이 활달하고 인물이 장대하여 長子風度가 있었다. 아들이 없어 아우의 아들 로서 그 제사를 받들게 했는데 孝友하고 정직했으며 그 형 또한 孝友하고 근엄했으니 그 家風遺訓他族과 달랐다.

운창지(雲窓誌)_단성지(丹城誌) 2

4) 현내팔방고증(縣內八坊考證)

마을 이름이 縣內인 곳은 바로 읍내의 제 1이다. 울타리는 엉성하고 城堞은 무너졌으니 (주민을 보호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의미를 찾아볼 수가 없다. 壬辰 癸巳의 난리를 당하여 監司 金睟邑民을 강제로 동원하여 모두 을 쌓았는데 이는 어찌 民心이 스스로 을 완성하고자 하여 쌓은 것이겠는가! 당시 一尺 쯤 되는 片石은 그 값이 綿布 1과 같았다. 5城壁에는 그 片石의 수가 거의 100개에 이르렀으니 백성들이 원망을 쌓은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에 백성들의 원망이 극에 달했으니 백성들이 쌓은 바위가 스스로 무너져 성첩이 해자로 변한 것은 족히 기이할 것이 없다.

城內에는 官舍 터가 있지만 모두 다시 복구하지 못했다. 다만 東軒이 남아있는데 담장 밖에는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고 담장 안에는 紫微花 두 그루가 있다. 西軒담장 밖에는 別館이 있고 앞에는 蓮塘이 있으니 인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서쪽에는 衛舍가 있으니 담장 밖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및 그루가 있고 담장 안에는 네모난 못이 있다. 매양 묽은 연꽃이 성하게 피어나 푸른 잎사귀와 붉은 꽃봉오리가 琴軒을 밝게 비춘다.

동쪽에는 창고가 있고 그 아래에는 감옥이 있으니 그 뒤에 또한 오래된 느티나무 및 그루가 있다. 東門 밖의 近北山 아래에 鄕射堂이 있는데 그 옛 자리가 아니다. 南門 麻月이 바로 옛날에 터를 잡은 곳이지만 해마다 春秋로 반드시 그곳에서 禮法을 강론하는 것은 대개 그 자리가 넓고 평탄하기 때문이다. 또 그 앞에 搗砧司(도침:종이나 피륙을 다듬이질 하는)를 배치하여 하늘이 울리고 산이 무너질 듯 한 소리를 내어 巖石을 진동케 하고 谷神을 놀라게 하니 이는 南山에 있는 石角의 해로움을 누르기 위해서이다. 그 위에는 嚴惠寺가 있다. 社稷壇은 원당마을 산허리에 있으니 官門에서 서쪽으로 5리 이고 城隍祠江樓 들판 숲 속에 있으니 관문에서 동으로 5리 이며, 厲祭壇磨屹동네 산자락에 있으니 관문에서 북으로 5리이다.

사직단에는 豊年을 기원하고 陰德에 보답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春秋로 반드시 길한 戊日을 택하여 제사한다. 武學堂은 동문 안에 있고 火藥庫는 동헌 담장 밖에 있으며, 軍器廳은 화약고 북쪽에 있다. 이들은 모두 凶器를 보관하는 곳인데도 반드시 가까운 자리에 둔 것은 그 兵器를 중하게 여기서이다. 鄭允誼에 이르기를,

이른 새벽 말을 달려 외론 에 들어가니, 울타리엔 사람 없고 살구만 열렸구나.

뻐꾹새는 나랏일이 급한 줄도 모르는지, 숲 속에서 종일토록 봄 농사만 권한다.“

라고 하였으니 대개 末世의 형상을 묘사하여 흐느끼고 눈물 짓는 시이다.

2은 곧 九印谷이니 세칭 옛 鄕校金盞마을의 遺址이다. 江城郡이 혁파될 적에 또 文家學의 역모가 있었으니 이 이야기는 都山誌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임금이 진노하여 鄕校西山 북쪽 기슭으로 옮겼다. 알 수는 없지만 一道를 교화하여 풍속을 같게 하고 不肖를 가려내어 惡行을 축출하는 일은 學校敎育에 관계된 것인가? 學校의 자리에 관계된 것인가? 先王의 제도를 상고해 보건대, 六德을 닦아서 民性을 절제하고, 五倫을 밝혀서 民俗을 돈독히 하며 四敎를 숭상하여 民志를 북돋우는 일은 敎育者의 직분에 관계된 것이지 學校의 자리에는 관계가 없는 것이 명백하다. 필시 진노함을 전가하여 鄕校자리를 옮겨야 할 이치가 없는데도 이에 이르렀으니 그 金盞마을이 망한 것은 또한 氣數에 유관하여 그러한 것인가! 그러나 大聖享祀를 북쪽 기슭 응달진 곳에서 구차히 받들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鄕人중에 유식한 이들이 밝고 조용한 자리를 구하다가 洪氏들의 옛 터를 얻어 건립했으니 지금의 鄉校가 이것이다.

九印마을 서쪽기슭 아래 永慕堂 자리가 있는데 옛 山陰縣監 鄭構가 거주하던 곳으로 그는 吏曹參議 次恭4世孫이자 參奉 起門의 아들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그 父親喪을 당하자 8일간을 물 한 모금도 먹지 않았으니 南冥 曺先生이 서찰을 보내 그 몸 훼손함을 경계하였다. 70세에 또 모친상을 당해서는 執喪前喪과 같이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이 先山아래 작은 암자를 지어 永慕라 편액하고는 이에 거처했는데 老僧이 토란을 삶아 바쳤고 國喪을 당하여 상복을 입으니 御筆을 특별히 하사했다.

3은 바로 洪氏遺址이다. 江城郡 때에 이곳에 살던 洪氏들이 9를 연이어 科擧壯元을 했으니 그 案山에 있는 雙峯을 지금도 壯元峰이라 칭한다. 永樂(1403-1424) 년간에 홍씨 자손들의 미약함을 틈타 이 자리를 차지하여 鄕校를 건립한 지가 근 200여년이다. 그 간에 文武科壯元이 많이 났으니 알 수는 없지만 또한 杜固(중국 당나라 두씨 가문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된 곳) 같은 明堂의 기운이 있어 地德이 그렇게 도운 것인가! 그 왼쪽 기슭 아래 큰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壬辰 年間에 벼락을 맞아 부서졌다.

그 후 地師 박상의가 이를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단성에서 필시 鍾繇王羲之를 이을만한 名筆이 나올 것인데 이 바위가 부서졌으니 애석하게도 이제는 끝났다.”고 하였다. 그 말로써 상고해 보건대, 三陟府使 李昌의 서자인 惟訒이 명필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는데 丁酉年 난리에 죽었으니 그 말이 과연 맞다. 人才興亡地靈盛衰에 달린 것이 확실하다.

4-5은 곧 馬屹內外마을이다. 바깥 마을은 바로 宣傳官 蘭桂가 살던 곳으로 지금은 지키는 자손이 없다. 그 정자 자리에는 老松만이 바위 위에 널찍이 드리워져 있다. 判書 李山屹이라는 이가 또한 이 마음에 거주했으니 그 손자 은 낚시를 생업으로 삼았다. 하루는 그 아들 之寶가 따라갔는데 이 갑자기 失足하여 물에 빠지자 之寶가 울면서 물에 뛰어들어 그 아비의 屍身을 안고 죽었으니 당시 나이 아홉 살이었다. 이 일은 중국 나라 때 부친을 따라 上虞江에 빠져 죽은 曹娥라는 少女故事와 전후가 완전히 동일하다. 그런데도 新安江 위에는 절묘하고 뛰어난 글귀로 이지보를 칭송하는 碑銘이 없으니 한스럽다.(上虞江 위에는 당시 고을 수령이 曹娥를 칭송하는 를 세웠음)

안 마을에 거주한 이는 바로 吏曹判書 韓崇德6世孫世英이다. 世英沔川人인데 忠順衛 金龜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 마을에 거주했다. 5을 낳았으니 舜卿 禹卿 商卿 文卿 武卿이다. 武卿의 아들 大岦文卿의 아들 大猷 大器는 끝내 及第하지 못하고 자손도 없으며 오직 大岦만이 進士가 되었다. 大器孤松으로 儒者의 기상이 있고 古風道義를 좋아했으며 그 文章은 기이하고 고아한 것이 많다. 丁酉年에 피란하여 高靈에 있었는데 길가에서 安陰縣監 郭䞭 三父子(黃石山城에서 순절함)返葬 행렬을 보고는 를 지어 哀悼하였다. 에 이르기를,

"鴻毛보다 가벼운 목숨 萬人이 우러르니, 南國의 송죽 절개 歲寒더욱 푸르구나.

三父子 運柩행렬 돌아가는 길가에 장렬한 太陽광채 하늘 끝을 비춘다.“라고 하였다.

著述로는 奇遇錄이 있다. 從姪 璡은 가정에서 訓導 받은 것이 凡人과 달랐는데 壬辰亂을 당하여 軍糧을 모우는 有司가 되었다. 이에 倡義하여 군중을 격려하고 집집마다 곡식을 거두어 넉넉한 軍糧都督府에 납부한 것이 각 고을 중 선두였다. 元師가 그 의로움을 가상히 여겨 바야흐로 포상하려고 狀啓를 올렸으나 歸路에 적에게 죽음을 당했으니 軍資監 主簿에 추증되었다.

6-7凉亭文慶洞이 이곳이다. 鳳山府院君 河允源凉亭江舍를 지어 老年을 보냈다. 允源晉陽人으로 그 아들이 蔭職으로 文慶縣監을 지내고는 鄭文昌의 못 위 山谷에 거주했다. 이에 後人들이 모두 文慶谷이라 부르면서 文慶縣監의 이름은 부르지 않았으니 인하여 그 이름이 실전되었다. 鄭文昌故 鄭判書의 아들인데, 노인들이 전하기를 정판서가 못 위에 佚老園을 지어 그 아들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아들 文昌은 부자 집 아들인지라 항상 놀면서 낚시하는 일을 낙으로 삼아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인하여 그의 이름으로 못에 이름을 붙였고 判書의 이름은 잊혀져 전해지지 않는다. ! 高麗때에는 무한히 귀한 公卿이었으나 후세에는 단지 姓名만 기억되고 어떤 이는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하니 邵康節의 감회에 거듭 감회가 일어난다.

 

8은 곧 江樓들녘이다. 이 혁파될 당시 使臣이 행차를 멈추고 江上의 한 여관에 머물렀으니 인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南冥 曺先生이 일찍이 四韻詩를 지어 읊기를,

煙火當年化未銷 歸來方丈更南圖 (연화당년화미소 귀래방장경남도)

澄江靜夜宣城謝 孤鶴橫舟赤壁蘇 (징강정야선성사 고학횡주적벽소)

十里官楊靑倒水 萬傳鼓碧連霄 (십리관양청도수 만전뇌고벽연소)

浮生世事渾如夢 明日柴門政寂寥”(부생세사혼여몽 명일시문정적료)

속세 살던 당시에 神仙되지 못했으니, 方丈山 들어왔다 다시 남쪽 가려한다.

맑은 강 고요한 밤은 宣城太守 시구 같고, 외로운 이 배를 스침은 赤壁賦글귀 같네.

십리 뻗은 官衙 버들은 물에 비쳐 푸르고, 요란한 북소리는 하늘까지 울려 퍼진다.

헛된 인생 世上事 모두가 꿈 같으니, 내일이면 사립문 정말로 적막하리.“라고 하였다.

또 손수 편액을 胡蝶樓라 적고는 인하여 雜體詩를 지었으니,

다소간의 행인들, 나비처럼 너울너울 날아가더니.

별안간 모습 전부 변하여, 먼 길 가는 사람 위해,

물가에서 전송하고 돌아간다.“라고 하였다.

그 후 詩人墨客들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만 오직 進士 朴紳絶句를 사람들이 絶唱이라 칭하므로 이에 기록한다.

草軟沙場除設席 風高柳岸禁登樓 (초연사장제설석 풍고유안금등루)

眞仙若見今朝會 應悔人間久不留 (진선약견금조회 응회인간구불류)

연한 풀이 자란 모래밭에는 자리 펼 걱정 없고, 바람 좋은 버들 언덕이라 누각 오를 필요 없네.

神仙들이 만약에 오늘 모임 본다면, 인간세상 오래 머물지 못한 것을 후회하리.“

그 후 權應仁이 이 를 평하기를 이미 除字를 놓고 또 禁字를 놓았으니 이는 詩家의 자연스러운 格式을 모른 것이다.“ 라고 하였다.

<目錄>

1. 沿革考證

2. 山川考證

3. 邑里考證

4. 縣內八坊考證

5. 元堂里八坊考證

6. 北洞八坊考證

7. 法勿禮里八坊考證

8. 新燈八坊考證

9. 都山八坊考證

10. 悟里八坊考證

11. 生比良八坊考證

 

 

1. 沿革考證

丹城縣은 옛날 江城郡이다. 의 소재지는 新安江 언덕 九印橋 동쪽 5쯤의 번화한 고을 한복판에 있으니 江山의 아름다움과 人物의 번성함은 嶺南에서 으뜸이다. 六樓(중국 명나라 초기 남경에 있던 여섯 누각) 중의 輕烟樓 淡粉樓 柳翠樓 梅姸樓와 같은 기녀들의 누각이 전후로 즐비하고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는 妓女들의 춤사위가 구름같이 어우러지니 東南으로 행차하던 使臣들이 여기에 머물면서 꽃에 반하고 달에 취하여 돌아갈 줄을 몰랐다. 간드러진 기생들의 노래 소리는 언제나 은빛 포구에 구름을 멈추게 하고 현란한 거문고 통소 가락은 萬頃의 금빛 물결 사이에 우레처럼 울려 퍼졌다.

풍류 소리가 진동하자 바위가 갈라지고 하늘이 기울면서 北斗七星의 자루가 강물에 꽂히더니 표주박처럼 생긴 작은 배가 뒤집어지고 거북 모양의 官印이 사라졌다. 이에 잠수부로 하여금 이를 찾게 했으나 그 등에 껍질이 있고 배에 글자가 새겨진 거북官印을 발견하지 못했다. 방탕한 使臣은 자취를 숨겨 영영 사라졌지만 이를 어찌 사실대로 아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 世宗大王 때에 이르러 이 일을 듣고는 震怒하여 歌舞하던 樓臺를 부셔버리고 으로 강등시켰다. 이에 드디어 고을을 서산 아래로 옮기고 인하여 이름을 丹城이라 하였다. 丹城縣은 산수가 빼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중국 天台山丹丘赤城에 비유하였다. 이곳은 벼슬이 많이 나는 고장으로 서울과의 거리가 770.

 

2. 山川考證

대개 일찍이 듣건대 나라 楊泉이 지은 物理論에 말하기를 渾淪天地의 기운이 비로소 저절로 開闢하여 계곡과 구릉이 되고 제각기 그 형상과 명칭이 생겼으니 이것이 氣勢始終이다.” 라고 했다. ! 하늘의 造化가 베풀어진 지 오래되었다. 구름 속의 蛟龍과 거북의 등과 같은 형상이 있고 솟구치는 독수리와 비상하는 鵬鳥와 같은 모양이 있으며 이 날고 鳳凰이 춤추는 자태도 있고 篆書繪畵처럼 생긴 형태도 있다. 이것들을 이름하여 流山 來山 屯鐵 寶巖 集賢이라 하니 중의 큰 것들이다. 그 나머지 千巖萬壑이 안개와 구름 속에 구불구불 드넓게 뻗어내려 靈蛇처럼 을 치고 玉筍처럼 솟아난 작은 산들도 각각 그 형상이 지극하다.

뭇 골짜기마다 다투어 흐르는 것은 물인데 물은 그 형체를 파악할 수가 없다. 드넓게 출렁거리면서 그 움직이는 모양에 정해진 형상이 없다. 이에 그 형상은 참으로 논할 수 없지만 그 명칭은 또한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 天嶺의 아래에서 발원하여 山谷사이를 품고 돌아 넓은 평야를 내달리머 배를 왕래하게 하는 것은 新安江이다. 支川細流인 냇물들이 좌우로 구불구불 감돌다가 동으로 흘러 碧溪가 되고 또 동으로 黔川에 합쳐졌다가 서쪽으로 悟里를 지나 都川이 되니 新安江으로 유입되는 물들은 또한 각각 그 명칭이 있다. 이들은 능히 만물을 살리고 만물을 윤택하게 하니 다함없이 극진하고 헤아릴 수 없이 통용되는 것이다.

 

3. 邑里考證

先王이 고을을 봉하여 住民의 구역을 정할 적에 반드시 某山 某水로써 경계로 삼았다. 丹城 고을은 그 동서남북의 가로 세로와 넓이 둘레가 모두 100도 못되니 긴 부분을 잘라 짧은 부분에 보충하면 겨우 20餘里가 된다. 그 작은 것으로 말하자면 十戶의 보잘 것 없는 고을이지만 그 큰 것으로 말하자면 또 한 八極(八坊極地)이 있다. 인하여 八卦으로 八坊의 분야를 구획하여 八里로 정했다. 라는 것은 머문다는 뜻이니 백성들이 머물러 거처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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