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聖廟重修記 (성묘중수기)
恭惟我 朝右文爲治內自國都外及州縣皆曆學校以奉 先聖而列聖尊敬越手前代爲守校者 其敢少忽哉不侫於
(유공아 조우문위치내자국도외급주현개력학교이봉 선성이열성존경월수전대위수교자 기감소홀재불녕어)
생각컨대 우리 조선(朝鮮)은 나라를 다스림에 문(文)을 숭상하여 안으로 국도(國都)에서 밖으로 주현(州縣)에 미치기까지 모두 학교(學校)를 설치하 였다. 이에 선성(先聖)을 받들고 열성(列聖)을 존경함이 전대(前代)보다 월 등하니 수령(守令)된 이들이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侫 : 간사할 녕
當廟戊午來莅兹縣縣之士 以聖廟修改之急 謁余躬即奉審焉殿宇傾圮實有時日難 支之勢顧圮邑力蕭條事工浩大前後守手宰率莫敢生意興作以致牽架矣 遂乃概然 從按使求以轉 聞于朝越二年庚申榴夏香冊自京師至 乃移都案齊閣經始治工三月而告訖以其年七月九日還奉新廟
(당묘무오래리자현현지사 이성묘수개지급 알여궁즉봉심언전우경비실유시일난지지세고비읍력소자경사지 수내개연종사안구이전 문우조월2년경신류하향책자경사지 내이도안제각경시치공3월이고흘이기년7월9일환봉신묘)
못난 내가 今上 (肅宗) 戊午年(1678)에 이 縣으로 부임하자 縣의 선비들이 성묘(聖廟)의 수리가 시급하다고 나에게 아뢰었다. 몸소 나가 살펴보니 전우(殿宇)가 무너져 참으로 몇일을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돌아보건대 고을의 물력(物力)이 빈약하고 공사(工事)가 거대한지라 전 후 수령(守令)들이 감히 뜻을 내어 일을 시작하지 못한 것이었다. 드디어 개연히 관찰사(觀察使)를 통하여 조정(朝廷)에 알려줄 것을 청했더니 2년 후 경신(庚申) 5월에 교지(敎旨)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이에 위패(位牌)를 재각(齋閣)으로 이봉(移奉)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3개월만에 완공하였으니 그해 7월 9일에 위패(位牌)를 신묘(新廟)로 환봉(還奉)하였다.
莅:임할 리, 圮 :무너질 비, 蕭 :맑은 대쑥 소, 訖:이를 흘
人士共慶相與之言曰 累十年因循德之事承積來摘弊湯殘之餘修新其制度突兀乎眼前 可以升降周旋紙以行乎 三代之禮儀而復古之漸矣 不侫敢以爲功 實惟士民幹理之力是賴顧 何事歸難美爲也
(인사공경상여지언왈 누십년인순덕지사승적래적폐탕잔지여수신기제도돌올호 안전가이승강주선지이행호 삼대지례의이복고지점의 불녕감이위공실유사민간리지력시뢰고하사귀난미위야)
인사(人士)들이 함께 축하하면서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수십년 동안 방치한 일을 폐단이 누적되어 거의 허물어진 가운데서 경영(經營)하더니 그 모습을 새롭게 수리하여 눈앞에 우뚝하게 세웠다. 이에 승강(昇降)하고 주선(周旋)하면서 3代의 예의(禮儀)를 행하여 옛 문물(文物)을 점점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고 하였다. 못난 내가 이에 감히 功이 있다고 하겠는가. 실로 사민(土民)들의 주도하는 노력을 힘입은 것이니 무슨 일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兀 :우뚝할 올 賴 :의뢰할 뢰
然 深有感於諸君之言反有所望於諸君者 尊其廟不若師其道師其道 不若求其心 由其心而得其道則觀法乎鄒魯之門墻斯亦不遠矣 豈但規規於棟宇之美而已哉 諸君已勉之哉 廟既成諸生請余記之噫事 有記識非欲誇於人也 將而徵於後也 玆邦荒僻文獻無徵 縣誌中只載鄉校舊在九印坊永樂間移建于此
(연 심유감어제군지언반유소망어제군자 존기묘불약사기도사기도 불약구기심유기심이득기도즉관법호추노지문장사역불원의 기단규규어동우지미이이재 제군이면지재 묘기성제생청여기지억사 유기식비욕과어인야 장이징어후야 자방황벽문헌무징현지중 지재향교구재구인방영락간이건우차)
그러나 제군(諸君)의 말에 깊이 감동하면서도 도리어 제군(諸君)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 그 묘당(廟堂)을 받드는 것은 그 도(道)를 스승 삼는 것만 못하고, 그 도(道)를 스승 삼는 것은 그 마음을 구하는 것만 못하다. 그 마음을 말미암아 그 도(道)를 얻는다면 공맹(孔孟)의 문정(門庭)에서 법도(法道)를 보는 것이 이에 또한 멀지 않을 것이니, 어찌 단지 동우(棟宇)의 화려함에만 연연할 뿐이겠는가, 제군(諸君)은 이에 힘쓸지어다. 묘당(廟堂)이 이미 완공됨에 제생(諸生)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했다. 아! 매사(每事)에 기록을 남기는 것은 남에게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후세(後世)에 증거하기 위함이다. 이 고을은 외지고 황량하여 문헌(文獻)을 징험할 수 없다. 현지(縣誌) 가운데 단지 “鄉校는 예전 九印 마을에 있었는데 永樂年間(1403~1424)에 이곳으로 이건(移建)했다.
宜廟已亥因倭亂合縣山陰 光海癸丑復邑云而 其間因革月日邑宰名氏皆不能詳可慨也 今若辭巽不居終無一言則某年某月某官之營建 後人將何考信而杞宋無文之歎安知不猶今之視昔也 是爲略記顚末若李如玉權顫菫治之勞 亦不可無稱玆列書于下云爾
(선묘기해인왜란삽현산음광해계축복읍 운이기간인혁월일읍재명씨개불능상가개야 금약사손불거종무일언즉모년모월모관지영건 후인장하고신이기송무문지탄안지불유금지시석야 시위약기전말약이여옥권근치지노 역불가무칭병열서우하운이)
선조(宣祖) 己亥年(1599)에 왜란(倭亂)으로 인하여 현(縣)을 산음(山陰)과 합쳤다가 광해(光海) 癸丑年(1613) 복읍(復邑)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그간에 연혁(沿革) 월일과 수령(守令)들의 이름자는 모두 상세하지 못하니 개탄스럽다.
이제 만약 사양하고 피하여 끝내 일언(一言)이 없다면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관(某官)이 영건(營建)한 것을 후인(後人)들이 장차 어디에서 고증(考證)할 것이며, 문헌(文獻)없는 탄식이 금일에 전날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이에 대략 전말(顚末)을 기록한다. 이여옥(李如 玉)과 권전(權顫)이 공사(工事)를 다스린 노고(勞苦)는 또한 칭송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아래에 열서(列書)한다.
歲上章涒灘(檀紀4013年庚申)肅宗4年 孟秋上澣
地主 坡平 尹烒題
成造 有司 李如玉 權 顫
세상장군탄 숙종4년 경신(1680) 맹추 상한
지주 파평 윤식제
성조 유사 이여옥 권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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