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不遠人(도불원인)

정운종의 고전공부

향교(鄕校) 서원(書院)

산청의 서원(書院)

도원 정운종 2025. 12. 7. 16:43

[청곡서원(淸谷書院)]

-. 경상남도 산청군 청현로99번길 36 (신안면)

-. 이천경 일신당문집 및 필첩 목판 (李天慶 日新堂文集 筆帖 木板)은 경남문화유산이다.

이 책판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인 일신당 이천경(15381610)의 시문과 년보, 비명, 척록을 후손들이 편집하여 철종 6(1855) 청곡서원에서 간행한 것이다. 이천경은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효행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문집 내용에 년보, 스승과 친구 그리고 당대의 현인들을 기록한 사우제현록, 비명 등이 있다. 서문은 재령 이씨인 이상의, 발문은 풍산 노광리와 이우가 썼으며, 권말에 을묘맹추상한청곡서원개간이라는 간행기록이 있다.

 

[배산서원(培山書院)]

-.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 도천서원에 모시고 있던 청향당 이원과 죽각 이광우를 따로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원(15011568)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벼슬이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남명 조식, 퇴계 이황 선생과 학문의 뜻을 같이 하였다.

배산서원은 조선 영조 47(1771)에 덕연사만 세워 위패를 모셨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1868)에 철거되었다. 그 뒤 1919년에 새로 지어 배산서당이라 하였다. 서원 안에는 문묘, 도동사, 강당이 있다. 문묘는 공자의 영정을 모시고, 도동사는 청향당 이원,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죽각 이광우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강당에는 중국 학자인 강유위가 쓴 현판과 백범 김구, 성재 이시영, 우천 조완구, 백암 박은식 선생의 배산서당 낙성축문 현판을 보관하고 있다. 배산서원은 문묘와 도동사 등 사당이 2개 있어 다른 서원과 구별된다.

-. 이원 청향당실기 목판이 경남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함양군 소재)

책의 머리말에는 병조참판 유치명이 쓴 서문이 있으며, 1에는 퇴계 이황 선생의 시를 비롯하여 언행록, 묘갈, 묘명 그리고 배산서원의 서원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2에는 퇴계 선생의 시 12수와 남명 선생의 시 10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간행 기록으로 보아 산청 단성의 배산서당에서 간행하여 후손들이 선생의 강학소인 구사재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원 선생과 교류했던 인물과 그의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완계서원 (浣溪書院)]

-.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가회로114번길 61 (신등면, 완계서원)

-. 조선 광해군 6(1614)에 지어 조선 중기 문신인 동계 권도(東溪 權濤, 15751644)를 모신 서원이다. 정조 12(1788) ‘완계라는 서원 이름을 내렸으며 그 뒤 권도의 조카이자 학자였던 동산 권극량(東山 權克亮)을 함께 모셨다.

완계서원은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졌다가 고종 20(1883) 서원의 강당을 새로이 지었고 1985년 완전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서계서원 (西溪書院)]

-. 경남 산청군 산청읍 지리

-. 서계서원은 조선 시대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덕계 오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이다. 조선 선조 39(1606)에 세웠으며, 숙종 3(1677)'서계'라는 현판을 받았다. 서원훼철령으로 사라졌다가 1921년에 다시 지었으며, 현재 오건, 오한, 오장, 박문영 등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

오건(15211574) 선생은 효성이 지극했으며, 조식·김인후·이황의 제자이다. 선조 5년에 관직을 버리고 경상도 산음 덕계리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서계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로 출입문인 입덕루를 지나면 강당과 동재와 서재가 있다. 강당의 오른쪽에는 부속강당인 덕천재와 오건 덕계문집 목판, 오장 사호집 목판, 오한 수오당문집 목판의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이 보관된 장판각이 있다.

강당 뒤로는 오건을 중심으로 오한, 오장, 박문영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 창덕사가 있다.

덕계문집은 조선 순조 27(1827)에 오건의 후손이 간행한 것으로, 오건의 시를 비롯한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다. 사호집은 조선 정조 6(1782)에 간행되었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던 오장의 글들이 실려 있다. 사오당문집은 조선 고종 1(1864)에 그의 후손 오응규가 간행하였으며, 오한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부자지간의 문집 목판이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포서원 (大浦書院)]

-. 경남 산청군 생초면 명지대포로236번길 183 (대포리)

-. 농은 민안부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민안부는 고려 후기 충신이며 두문동 72() 중 한 사람이다. 고려 공양왕(재위 13891392) 때 예의판서에 이르렀으나, 조선의 개국으로 72현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갔다. 후에 산음현의 대포리로 내려와 은둔하여 살며 고려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지켰다.

대포서원은 숙종 19(1693)에 세웠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고, 고종 11(1874) 유림과 후손들이 숭절사, 숭의제, 동재·서재 등을 고쳐 세웠다.

 

[도천서원 신안사재 (道川書院新安思齋)]

-.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 고려때 문신인 문익점(13291398)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나라에서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목화를 처음 들여와 배양,보급하여 의복의 일대 혁신을 가져오게 했다.

-. 서원은 조선 세조 7(1461)에 세웠으며, 조선 정조 11(1787)도천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75년에 사당인 삼우사를 짓고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서원 내의 신안사재는 조선 명종 6(1551)에 지은 것이며, 현재 건물은 조선 순조 4(1804)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노산정사(蘆山精舍)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오다가 1975년에 사당 삼우사(三憂祠)를 다시 지으면서 도천서원으로 복원되었다.

-. 서원의 앞쪽에는 제관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신안사재가 있다. 1551년에 처음 세웠는데 지금 건물은 1804년 다시 지은 것이다. 이외에도 도천서원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던 강당과 생활 공간인 동·서재가 있고, 강당 뒤쪽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사당을 두었다. 신안사재는 앞면 4·옆면 2칸으로 지붕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로, 건물 양쪽 끝 한칸씩 넓은 마루를 두었다. 신안사재는 서원의 제사 기능을 중요시하였음을 보여주며, 조선 후기 서원 건축 양식의 변천을 살필 수 있다.

 

[덕천서원 (德川書院)]

-.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

-. 덕천서원은 선조 9(1576)에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제자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1602)에 중건되었고, 광해군 원년(1609) '덕천'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870년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20년대에 복원되었다.

서원의 정문인 시정문(時靜門)을 들어서면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을 중심으로 그 앞에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진덕재(進德齋), 수업재(修業齋)가 있고 뒤편에 제례를 지내는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배치되어 있다.

 

[봉산 서원(鳳山書院)]

-. 경상남도 산청군 생비량면 지리산대로4119번길 37-20 (생비량면)

-. 봉산 서원(鳳山書院)1654(효종5) 봉산사(鳳山祠)로 창건 후 어은 정사(漁隱精舍)로 변경했고, 1988년에 봉산사(鳳山祠)를 신축했다.

-. 배향 인물인 어은 오국헌(漁隱 吳國獻 1599~1672)은 승훈랑(承訓郎)과 호조좌랑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사서해의(四書解義), 역계해의(易繫解義), 유후귀감(遺後龜鑑), 어은유고(漁隱遺稿)가 있다.

 

[신계서원 제기 (山淸新溪書院祭器)]

-.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지리산대로3833번길 3-16

-. 1839(헌종 5)에 박익(朴翊)과 그의 제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창건시 신계(新溪)’라고 사액되었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고종 12(1875)에 영정각과 세한재(歲寒齋)를 건립하고 복원하여 향사를 진행하였다. 1936년에 세한재를 철거하고 중건하여 재호(齋號)를 신계정사(新溪精舍), 사호(祠號)송은박선생영당이라고 현판하였으며, 19853월에 신계서원으로 복원하였다.

박익(朴翊, 1332~1398)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판도판서(版圖判書)이다. 고려때 왜구와 여진을 토벌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여러 벼슬을 지냈다.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杜門洞)의 귀은제(歸隱第)로 들어가 은거하고, 집 뒤의 산을 송악(松岳), 마을을 송계(松溪), 호를 송은, 집을 송암(松庵)이라 하여 송경(松京)()를 붙였다.

신계서원 제기(祭器)조선 헌종 5(1839)경에 박익 선생의 제사에 사용하기 위하여 제작된 그릇으로, 제작 당시에는 모두 32점이었으나 현재는 술잔 6, 술통 2, 사각형 밥그릇 4, 원형 밥그릇 2, 촛대 2, 향을 담는 그릇인 향합 1개 등 18점이 남아있다. 이 그릇들은 제기로서는 드물게 청동으로 만들었다. 경남문화유산자료로 등록되어 있다.

 

[산청 우계당 (山淸愚溪堂)]

-. 경남 산청군 차황면 부리

-. 앞면 6·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높은 기단 위에 앞면과 좌우 옆면에 툇마루를 놓고 난간을 두어 누각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대들보를 통째로 사용하여 견고하고, 좌우의 온돌방에는 아궁이를 두어 굴뚝을 기단면으로 나오게 한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도양 서원(道陽書院)]

-.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내당길 7-21)

-. 중재(重齋) 김황(金榥·1896~1978)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건물은 숭현사(崇賢祠), 강당(講堂), 동재인 용교재(用敎齋), 서재인 진학재(進學齋), 내삼문(內三門), 대문인 홍인문(弘仁門)이 있다.

-. 중재 김황은 경남 의령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일명 김우림(金佑林), 자는 이회(而晦), 호는 중재(重齋)이다. 남명의 문인이자 외손서인 동강 김우옹(金宇顒)12대손이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아버지를 따라 산청의 황매산(黃梅山) 서쪽 만암(晩巖)이라는 깊은 산골로 이사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주리학(主理學)을 대표하던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고 그 학통을 계승하였다.

1928년 산청군 신등면에서 강학을 시작해 약 50년 동안 1천여 명의 문도를 길러냈다. 한주학파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기반으로 하는 도학을 정립하였다. 도학(道學)의 정통을 현대의 신지식층에게 이어지게 하여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를 연결시키는 마지막 유종(儒宗)의 역할을 하였다. 20세기의 우리 사회가 겪은 사상사적 급류 속에서 심()이 공리(功利)에 미혹되어 심의 본체가 지닌 근원성을 확인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의리(義理)의 상실을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