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不遠人(도불원인)

정운종의 고전공부

나의 이야기

나무의 향기

도원 정운종 2018. 1. 18. 21:56

((1974년)경에 남사학교에 근무하셨던 권영희 선생님의 '나무의 향기'수필을 옮김니다.
‘은은하고 기품있는 향기를 남기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를 되새겨 보면서...)

[나무의 향기]

지리산 자락에서 하룻밤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침 눈에 익은 산 모롱이를 돌아오다가 불현 듯 그 곳에 가보고 싶었다.
올라가는 길도 돌계단도 오랫동안 인적이 끊겨서인가 온통 잡초에 덮여있다.
예스런 고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장과 다르게 ‘남사국민학교’라는 현판이 사라져 버린 학교 문설주에는 이끼만 가득하여 낯설다.
운동장은 커다란 돌더미가 여기저기 있고, 잡초가 무성하다. 이 곳이 예전에 아이들이 체육시간에 공차고 달리고 월요일이면 전교생이 나란히 줄서서 조회 하던 곳인가.
부임한 첫 해에 가을 운동회를 했었다.
부채춤. 매스게임. 차전놀이를 몇주 동안 땀 흘리며 해가 늦도록 연습을 했다. 운동회 날에는 모두 그동안 기른 실력으로 힘껏 달리고 춤추고 신이 났다. 몇 년만의 운동회라고 어른들도 많이 나오셔서 어울려 흥겨웠다. 마을 잔치였다.
언제 그런 즐거운 일이 있기나 했었나. 황량하기까지 하다.
돌계단을 지나 서쪽 언덕 위 학교건물에 지는 해가 걸려 있다. 등에 둘러메고 온 까만 다후다 책보자기를 펼치고 작은 눈을 반짝이며 무엇이던지 지식을 받아들이고, 특히 옛날이야기를 참 좋아하던 순박한 아이들,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이 6년 동안 드나들던 정답던 교실들은 커다란 널빤지로 창문을 가린 채 묵묵하다.

취학 아동이 늘어서 학교 교사를 증 개축하게 되었었다. 몇 개월 동안 마을 건너편의 산 밑에 있는 ‘이사재’를 빌려서 야외 이동수업을 했다. 이사재는 작지만 아담하고 매우 아름다운 서재였는데 재실 방을 에워싸고 있는 난간마루를 교실처럼 사용했다. 한쪽 모서리에 작은 칠판을 세우고 양쪽으로 아이들이 옹색하게 포개어 앉다시피하여 공부를 했으니 얼마나 불편했으면 공부가 제대로 되었겠나, 저쪽 코너에 있는 또 다른 학년의 공부소리까지 들리는데....
서재는 내 동창생의 부친이 자주 드나드셨다. 한복을 정갈하게 갖춰 입고 바깥의 소동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공부만 하시던 老學人이셨다. 근엄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분이라, 철없이 떠들고 뛰던 개구쟁이들과 씨름하느라 나는 늘 긴장했었다. 혹시라도 너무 시끄럽거나 폐를 끼치지 않을까하여, 요즈음 멋진 그 동창생 친구를 만날 때면 곁눈도 주지 않고 당신 일에만 몰두하시던 그의 선친 모습이 떠올라 “부전자전”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좁은 서재뜰에 맴돌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마당 입구의 벽오동이 그 푸르고 큰 잎사귀를 마음껏 흔들며 바람과 조우하던 풍경이며, 뒤쪽 언덕에서 촐촐촐 흘러내려오던 작은 돌샘의 소리, 대밭사이로 날아다니며 뽀로롱 뽀로롱 수업의 흐름을 흩으려 놓던 새소리... 이 모두가 한 폭의 멋진 그림이 되어 나의 어딘가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지금도 가끔 병풍을 펴듯이 펼쳐지곤 한다.

운동장 중간쯤에 있는 고목이 다된 벚나무가 시선을 끈다. 마당 끝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의 저 벚나무 두 그루. 아! 그 순간 내 머리를 아스라이 스쳐가는 은은한 향기.
내가 운동장 확장 공사에 반대표를 던진 이유는 일제 때부터 학교를 지켰다는 아름드리 벚나무를 어찌 베어 내겠는가. 너무나 아름다운 저 벚나무를!.. 그러나 신참교사의 힘은 그리 막강치 못했다.
연세가 지긋하고 무척 순박한 전달부는 머릿수건을 불끈 묶고 흥부네 박을 타듯이 몇 시간 톱질을 하였다. 큰 덩치에 걸맞지 않게 저항도 한번 못 해보고 거세를 당하듯 벚나무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겨우 두그루가 남았다. 한동안 나무의 빈자리를 쳐다 볼 용기가 없었다. 가슴에 구멍이 난 듯했다.
그 해 가을 어느 저녁때 쯤.
이상한 냄새가 연기에 섞여 교사주위에 좌악 깔렸다. 사방으로 찾다가 결국 빨갛게 타고 있는 벚나무둥치를 숙직실 아궁이에서 발견했다. 청솔가지나 장작이 타는 냄새와 전혀 다른 이 향기는 학교와 운동장을 지나 언덕을 덮고 퇴근길의 나를 따라와 앞 들판까지 내려갔다. 오래된 나무는 그 만의 은은하면서 기품있는 깊은 향기를 지닌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그 향기가 “역사의 향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여운으로 남아 한동안 생각이 머물면 먹먹했었다.
그 이후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지막 순간에는 저 벚나무처럼 은은하고 기품있는 향기를 남길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그 아이들도 이젠 사회의 의젓한 동량이 되어 저마다의 향기를 지니고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돌아 나오는데 왠지 눈앞이 흐려진다.
(2003.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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